바보스럽든 슬기롭든 제 목숨껏 살아가는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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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스럽든 슬기롭든 제 목숨껏 살아가는 오리
  • 최종규
  • 승인 2011.09.01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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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정유정, 《오리가 한 마리 있었어요》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가던 지난날에는 오리라든지 거위를 볼 일이 없었습니다. 흔하다는 닭이나 토끼 또한 볼 일이 없었습니다.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던 때 학교에 사육장이 있었고, 학년과 반에 따라 청소가 돌아가기 때문에 사육장 청소를 자주 했고, 이 사육장에는 거위와 닭과 공작이 있었습니다.

 사육장은 ‘짐승을 키우는 우리’라는 뜻이지만, 정작 사육장이라는 데를 들여다보면 쇠줄로 얽은 우리에 가둔 셈이요,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도시에서 짐승을 볼 일이든 돌볼 일이든 없는 국민학생이 이들 짐승을 어여삐 보살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린이에 앞서 어른인 교사부터 짐승우리 짐승을 예쁘게 바라보지 않았으니까요.

 어른인 교사는 날마다 쌓이는 짐승똥 치우기를 어린이인 국민학생한테 맡길 뿐입니다. 어른인 교사가 하는 일이란, 닭이나 거위가 낳은 알이 있을 때에 주워 오도록 시키는 한 가지입니다. 그런데, 닭이든 거위이든 좀처럼 알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호젓하거나 넉넉하게 살아갈 앞날이 보일 턱이 없는 쇠그물 2층짜리 울타리에 갇혀 지내면서도 암탉과 암거위는 끝까지 알을 품으면서 우리들한테 맞섰습니다. 이때, 사육장 청소를 맡은 동무들 누구나 알을 빼앗기 싫다고 생각했는데, 빈손으로 교실로 돌아가면 ‘어른인 교사’는 크게 꾸짖습니다. ‘그깟 알 하나 못 가져오느냐’고 몽둥이나 주먹을 흔들며 윽박질렀습니다. 닭이나 거위한테서 알을 빼앗기도 싫지만 얻어맞기도 싫습니다. 아니, 얻어맞는 일이 조금 더 무섭습니다. 끝내, 조금 더 힘이 센 쪽(어린이)이 조금 더 힘이 여린 쪽(닭과 거위)한테서 목숨을 빼앗습니다. 닭이든 거위이든 알을 빼앗으려 들어가면 금세 알아채며 콕콕 쪼거나 꽉 물려고 달려듭니다. 닭은 열 스무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쪼면서 똥을 싸지르고, 거위는 숫거위가 곁에서 껑껑 울고 부리로 쪼면서 몸으로 밀칩니다.


.. 오리는 우리 안에서 날마다 똑같은 하루하루가 되풀이되는 것이 정말 답답했어요. 그래서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5∼6쪽)


 똥을 잔뜩 뒤집어쓰고 온몸이 물려 아픈 채 달걀과 거위알을 들고 교사한테 갑니다. 교사는 커다란 냄비를 어디에선가 빌려서 교실에서 알을 삶습니다. 거위알은 닭알보다 훨씬 크고 빛깔이 다릅니다. 삶긴 뒤에도 빛깔이 퍽 다릅니다. 어른인 교사는 이 달걀과 거위알이 얼마나 좋은 줄 아느냐고 웃음지으면서 말하고, 사육장 청소를 맡은 우리한테는 거위알을 나누어 주겠다며 먹으라고 내밀지만, 사육장 청소를 맡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달걀이든 거위알이든 받지 않습니다. 달걀이나 거위알이 싫어서가 아니라, 억지로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어린 날 외할머니와 이모들 사시는 시골집에 갔을 때에는 달걀을 ‘곱게 얻어’서 ‘아주 고맙게’ 먹었습니다. 흔히 먹거나 아무 때나 먹을 수 없던 달걀이라고 시골집에서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도시에서는 값싸게 사먹는다지만, 시골에서는 암탉이 알을 낳았을 때 드문드문 얻어 아껴서 먹습니다. 밥은 벼가 내어준 살점인 목숨이고, 달걀은 닭이 내어준 살점인 목숨입니다. 도시에서 살며 어머니 심부름으로 가게에서 달걀 열 줄이나 한 판을 사서 들고 올 때에는 ‘목숨을 먹는다’고 못 느꼈지만, 외할머니 댁에서 닭우리에 들어가 한 알 살며시 얻어 나와서 먹을 때에는 ‘목숨을 먹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사육장 청소를 자주 맡아 하던 국민학생 때, 어른이자 담임인 교사가 알을 꺼내 오라고 시키던 날부터 닭과 거위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집니다. 이 일이 있기 앞서까지는 닭똥과 거위똥 냄새가 구리다며 쓸고 치우기를 코를 감싸쥐며 했지만, 이 일이 있은 뒤로는 닭과 거위가 이 좁은 데에 갇혀서 조그마한 저희 알을 지키려고 애쓰거나 용쓰는 모습을 겪은 탓인지, 코를 감싸쥐지 않으며 쓸고 치웠으며, 모이는 예쁘게 그릇에 놓고 물그릇은 잘 씻어서 틈틈이 갈았습니다. 닭과 거위는 더 나대거나 울거나 물지 않았으며, 그저 조용히 그예 죽은듯이 지냈습니다.


.. 오리는 찔레꽃 향기로운 산길을 돌아 뒤뚱뒤뚱 걷고 또 걸었어요. “호수 냄새는 더 향기로울 거야.” 오리는 생각했어요 ..  (11쪽)


 그림책 《오리가 한 마리 있었어요》(보림,2001)를 읽습니다. 아이하고 함께 읽습니다. 아이하고 살아가는 시골마을에서도 닭이나 오리나 거위를 보기란 퍽 힘듭니다. 드문드문 닭을 치는 집이 있으나, 좋은 고기나 알을 얻어 조금씩 먹으려는 시골집이 아니고서는 굳이 닭을 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닭공장에서 금세 닭을 뽑아내어 값싸게 파니까, 시골집에서 닭을 친들 벌이가 되지 않습니다. 오리농사를 짓는 데가 아니라면 오리를 칠 일이 없겠지요. 거위를 치는 집은 훨씬 적습니다.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까만오리가 사람하고 함께 지냅니다. 이 까만오리는 날지 않고 걸어다닙니다. 가끔 날갯짓을 하며 조금 날기는 합니다. 사람 곁에서 한식구처럼 지내는 오리라면 이렇게 날지 않고 걷기만 하면서 지낼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사람들이 고기하고 알을 얻으려고 집에서 키우니 그렇지, 오리이든 거위이든 하늘을 날아다니는 짐승입니다. 새끼일 때에 날갯죽지를 끊어 못 날도록 하니까, 오리이든 거위이든 날기를 잊고 맙니다. 오리나 거위 스스로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사람들 쓰임새에 따라 날짐승이라는 목숨값이 달라집니다.

 뒤뚱뒤뚱 걷는 오리나 거위를 보면 어딘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총총총 뛰듯 걷는 참새나 박새를 볼 때에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겅중겅중 걷는 왜가리나 해오라기를 봐도 그래요. 새한테는 어쩐지 걷기가 안 어울립니다. 새라면 날아야 어울려요. 가끔 날개를 모두 펼쳐 푸드덕거릴 때가 있는데, 안 나는 닭이나 거위라 하더라도 날개가 참 큽니다. 그래, 처음부터 하늘을 날도록 태어난 목숨이니까, 날개가 이처럼 커야겠지요. 커다란 날개가 아니고서는 좀 뚱뚱하다 싶은 오리나 거위가 하늘을 훌훌 날 수 없겠지요. 갈매기이든 매이든 올빼미이든 꾀꼬리이든 직박구리이든 날개가 몸뚱이와 견주어 얼마나 큰데요.


.. “백로 아저씨. 여기가 호수예요?” “호수? 여기는 논이야. 호수는 날아서 가야 돼.” “저는 날지 못하는데요.” “그럼 할 수 없지. 호수는 아니지만 여기도 살기 좋은 곳이야.” ..  (23쪽)


 그림책 《오리가 한 마리 있었어요》에서는 짐승우리에 갇힌 채 태어나 갇힌 채 죽는 오리들이 나옵니다. 물가나 숲이나 들판에서 살아가는 오리가 아닌, 처음부터 사람이 길러서 고기를 얻으려는 오리가 나옵니다. 이들 오리가 스스로 날갯짓을 하면서 우리를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사람들한테는 이들 오리가 돈이니까, 한 마리라도 섣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빈틈없이 두르겠지요.

 그러나, 어찌 되든 그림책이기 때문에, 주인공 오리는 아무 걱정없이 홀로 살며시 빠져나옵니다. 다른 오리도 근심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을 텐데, 주인공 오리만 씩씩하게 길을 떠납니다. 찔레꽃 내음을 맡으며 언덕을 오르고 들판을 지납니다. 짐승우리 아닌 논에서 이웃 오리를 만나지만 이곳이 물가가 아닌 줄 알며 슬픔에 잠기고, 슬픔에 잠기기 무섭게 으르렁거리는 개한테 쫓깁니다.

 그림책이니까 벼랑까지 쫓긴다고 그렸을 텐데, 날지 못하고 걷기만 하는 오리로서는 금세 개한테 잡혀 물려 죽었겠지요. 어떻든 그림책이니까, 주인공 오리는 벼랑에서 힘껏 뛰어내렸고, 목숨을 걸고 뛰어내리며 날갯짓을 했기 때문인지 처음으로 하늘을 납니다.


.. 오리가 한 마리 있었어요. 물론 여러 오리 가운데 한 마리였지요 ..  (38쪽)


 오리는 수많은 오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오리는 우리에 갇혔으면서 우리인지 아닌지 모르거나 우리에 갇혔어도 그럭저럭 살 만하다고 여기며 태어나고 죽는 오리일 수 있습니다. 이 오리한테는 때맞추어 먹이를 주는 사람이 없으나, 스스로 먹이를 찾고 스스로 잠자리를 찾으며 스스로 짝꿍이나 동무를 사귀는 한편 스스로 날개를 다듬으며 하늘을 누빌 줄 아는 오리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사름들도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느 회사원으로 다달이 적잖은 일삯을 받아 아파트에서 퍽 괜찮다 싶은 살림을 꾸리는 사람일 수 있고, 시골에서 논밭을 손수 일구며 내 먹을거리와 보금자리와 아이들을 내 손으로 건사하며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든 오리는 오리로서 살아갑니다. 어느 곳에서건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갑니다. 바보스러운 오리이든 사람이든, 제 목숨껏 살아갑니다. 슬기롭거나 씩씩한 오리이든 사람이든, 제 깜냥껏 살아냅니다.


― 오리가 한 마리 있었어요 (정유정 글·그림,보림 펴냄,2001.2.1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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