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시작은 내가 했지만 이제는 공공재로 의미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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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시작은 내가 했지만 이제는 공공재로 의미 더해”
  • 김경수 기자
  • 승인 2023.03.29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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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공작소를 가다 - 아트 & 숨]
(15) 락캠프 정유천 대표

부평에서 인천 첫 ‘밴드 라이브클럽’으로 출발
26년째 명맥…전국 록밴드 찾아와 공연
지난해 중구 개항장거리에서 갤러리 3곳이 문을 열었다. 동구 배다리거리는 문화·예술거리 조성사업이 진행되면서 문화공간이 확 늘었다. 이들 공간은 특유의 색깔들을 입히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인천in은 이곳들을 포함, 곳곳에서 예술을 일구는 사람들을 만나 공간 이야기를 듣는 기획을 시작한다. ‘예술 공작소를 가다-아트 & 숨’이라는 문패를 달고 매주 수요일마다 한편씩 이어간다.

 

록 백드가 라이브로 공연할 수 있는 클럽을 인천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1990년대 후반 밴드들의 인디음악 문화가 한창 붐이 일 무렵 인천에서 유일한 밴드 라이브 클럽으로 전국에서 연주자가 몰려왔던 곳이 부평지역의 ‘락캠프’였다.

1997년 부평삼거리 인근에서 문을 연 락캠프는 몇 번의 장소를 옮겨가면서 26년째 명백을 이어오고 있다. 밴드 리더이자 로커로 그 세월동안 그 많은 공연을 이끌어온 이가 정유천 대표다.

부평구청 담장 맞은편 건물 지하의 ‘락캠프’에서 만난 정 대표는 그곳에서 ‘제 4기’를 열고 있다는 말로 역사를 복기했다.

“락캠프를 처음 열었을 때가 30대 후반이었는데, 눈 한번 깜빡했더니 60대 중반이 됐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여전히 록과 블루스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긴머리를 하나로 묶은 포니테일 스타일은 여전하지만 희게 변한 머리색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락캠프를 열었던 이유는 단 하나. 당시 라이브 밴드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인천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교 졸업 직후 밴드를 결성하고 음악을 했습니다. 군대도 연주를 할 수 있는 해군군악대를 지원할 정도로 삶에 음악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할 공간이 없는 거예요. 내가 만들어보자 했죠.”

 

부평삼거리에서 라이브클럽을 열고 ‘락캠프’ 간판을 달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평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 직장이 부평에스컴이었어요. 늘 캠프마켓이라는 단가 익숙했죠. 나는 ‘락을 하는 캠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습니다.”

클럽을 열자 전국에서 록밴드가 몰려왔다. 하루 3~4팀씩 공연을 올렸다. 주말에는 7~8개팀까지 공연했다. 365일을 쉬지 않고 이어갔다.

“1년에 단 하루, 현충일만 쉬었습니다. 그날은 엄숙한 마음으로 보내야한다는 공감을 갖고 있었거든요. 인천에서 활동하는 밴드는 물론 대구, 제주에서도 왔습니다.”

그만큼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는 공간에 목마름이 컸다고 부연한다. “무명 록밴드가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등용문 같은 곳이 됐습니다.”

그 역시 ‘내츄럴 밴드’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섰다. 그가 보컬과 기타를 맡고 베이스키타에 드럼을 더한 3인조 밴드였다.

그렇게 2006년까지 10년을 운영했다. “몸에서 신호가 왔습니다. 충전이 필요한 거였죠. 록음악이 특히 소리가 크잖아요. 운영자이다보니 매일을 하루 다섯시간 이상씩 듣는 상황이었어요. 공연 중간중간 잠시 귀를 쉬게해야만 할 정도였습니다” 여기까지가 락캠프 1기다.

강화로 들어가 외포리에 두 번째(2기) 락캠프를 차렸다. 이름은 그대로 가되, 공연을 줄이고 카페 기능을 강화했다.

“밴드를 초청하는 기획공연으로 한달에 한 두번 무대를 올렸습니다. 속도를 조절한 시기였어요.”

4년쯤 지날 무렵 부평으로 복귀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 부평구예술인회장을 맡게 된 것이다. 락캠프도 자연히 따라왔다. 부평구청 후문 건너편에서 라이브클럽을 다시 열었다. 3기의 시작이다.

공연은 매주 토·일요일 열기로 하고 본인도 토요일마다 무대에 섰다. 이름도 ‘정유천블루스밴드’로 바꿨다. 그렇게 다시 10년이 지나갔다.

이때 코로나19가 덮쳤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계속 강화되면서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게다가 저녁 8시부터 공연을 시작하는 데 영업시간 제한으로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2년의 공백기를 거쳐 다시 문을 연 것이 지난해 6월. 공간은 다소 좁아졌으나 토요일 밴드공연을 재개했다. 4기를 시작한 것이다.

 

그 오랜세월 전국의 밴드가 락캠프를 찾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단순히 그의 인맥의 힘이라기엔 설명이 다소 부족해보여서다.

정 대표는 이유를 이렇게 꼽는다. “나도 연주를 하다보니 연주자들과 소통이 잘되는 편입니다, 무대에서 함께 잼 연주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럽게 교감이 생기게 되죠. 무엇보다 음향과 조명에 신경을 씁니다. 악기가 좋아야 밴드가 제대로 소리를 들려줄 수 있거든요.”

역사가 오래다보니 단골도 많다. 개인별 오는 빈도수는 낮아도 록음악 마니아들이다. 밴드가 좋아할 조건을 골고루 갖춘 셈이다.

그에게 락캠프와 정유천 밴드는 삶 그 자체라고 말한다.

“록은 일정한 틀에 갖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이 매력입니다. 더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죠. 블루스는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좋아하는 장르라서 시작했는 데, 할수록 그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싱글 앨범은 발표했으나 정규 앨범은 아직 내지 못했다. 올해의 목표가 바로 정규앨범을 선보이는 것이다. “써 놓은 곡이 여러곡입니다. 이를 모아서 올해안에 앨범을 내려고 합니다.”

락캠프를 이어가는 힘은 이곳 장소가 이제 그의 손을 넘어섰다는 자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작은 내가 했지만 이제는 이미 공공재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밴드라면 누구나 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곳, 옛날에 와서 공연을 했거나 혹은 공연을 봤던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라는 의미는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내맘대로 이 장소를 문 닫을 수 없게 됐다는 생각에 이르더군요.” 결론은 능력이 닿는 한 계속 공간을 유지해야 한다로 수렴됐다.

“물론 공연도 계속 해야지요. 늘 쓰는 기계는 녹슬지 않듯, 노래를 하기 위한 컨디션 유지에 온신경을 쓰고 삽니다.” 마음은 언제나 캠프락을 처음 열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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