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그림을 읽으러 갤러리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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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그림을 읽으러 갤러리에 간다
  • 이상하
  • 승인 2023.04.0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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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읽기] 이상하 /조각가
단원 김홍도-무동 조선후기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단원 김홍도 - 무동 조선후기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 아득한 시간 저 너머로부터의 전언(傳言)

인류에게 남겨진 수많은 흔적은 과거의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해서 시대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다양한 형태로 남겨진 유물과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지나간 시간의 궤적(軌跡)과 당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중에서도 그림은 과거를 이해하는데 어떤 유물보다 중요하고 효과적이란 것을 많은 경험과 사례를 통해 지금도 확인하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잊혀있던 동굴 속 벽화에서 시원(始原)의 시간 저 너머, 원시로부터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희미하게 문명의 빛이 비치던 고대의 그림과 기호는 인류가 어떻게 문명을 일구고 역사의 출발선에 서게 됐는지 알려준다. 중세를 지나 근대의 시간으로 오면서 그림은 우리에게 당대의 이야기를 상세하고 친절하게 들려준다. 과거 그림(기호를 포함한)의 중요한 역할이 시대를 기록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알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한편으로 그림은 신성(神聖)의 다른 표현이었고, 교육과 통치에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인류에게 문자의 이용이 보편화되기까지 그림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면서 수월한 교육의 도구였다. 오늘날에도 그 효과와 가치는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크게 작동하고 있다. 한 장의 그림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 그것으로 우리는 시대를 알게 된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 당대(當代)의 풍속(風俗)은 물론 평범한 이웃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그림에는 담긴다.

조선의 풍속화가 김홍도의 작품 ‘무동(舞童)’에서 조선에 음악의 형태와 악기의 구성을 알 수 있고,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페테르 브뤼헐의 작품 ‘시골의 결혼식’을 통해 유럽 어느 시골에서의 하루를 엿보게 된다. 그림은 당대에 거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그때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각과 지향점(指向點)까지도 알게 해 준다. 언어(문자)가 먼저냐? 그림(이미지)이 먼저냐의 문제는 이미 오래전 결론을 냈으니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시대와 찰나(刹那)를 기록하는 새로운 방법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가 1839년 상을 포착하는 방법을 발표하면서 그를 카메라의 아버지로 부른다. 그 뒤 1888년 뉴욕주 로체스터의 조지 이스트만이 사용하기 쉬운 휴대용 카메라를 내놓으면서 사진이 본격적으로 보급된다. 이 역사적 사건으로 그림은 기능과 역할에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림이 가지고 있던 기록의 역할 중에 많은 부분이 사진으로 넘어가게 되고 화가들은 카메라가 표현하지 못하는 다른 역할과 표현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림은 이제 기록과 이야기로의 역할에서, 이미지와 이야기로의 전환을 맞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그림은 사람과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 그림(이미지) 읽기

우리는 그림을 본다. 대개의 사람에게 그림은 가벼운 마음으로 보는 것이지, 보고, 읽고, 분석하고 거기에 철학을 더해 지식으로 치환(置換)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 그것은 전문가 집단의 영역이지, 가볍게 즐기는 감상자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림이 무겁고, 깊이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거리를 느끼는 그림(미술)과 더 멀어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림을 읽어야 할까? 그것은 그림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말과 의도를 파악해서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과거 사람들에게 그림은 그저 스쳐보거나 아름다움과 부의 과시를 위한 수단이기 전에 그림의 요구와 의미를 읽어서 이해하고 깨우쳐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것은 구원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고, 인식의 정도에 따라 계급과 부(富)가 결정되고, 계층의 사다리에 오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당시에 그림이란 교육과 계몽, 신에게 바치는 영광이자 신성을 이용한 통치행위의 수단이고, 권력 그 자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림과 현대의 그림이 많은 부분에서 기능과 역할을 달리하고, 목적이나 요구와 쓰임이 과거와는 시작부터 다르고, 그림이 가진 위상이나 가치가 달라졌으니 과거와 지금의 그림 읽기는 당연히 달라져야 하는 것이 맞다. 소수 주문자의 요구로 생산된 과거의 그림은 지배와 권력의 수단으로 교육(?)과 기록의 공공재적 성격이 강하고, 통치자의 요구와 그들의 가치를 반영한 그림이어야 했기 때문이라면, 현대의 그림은 주문자 요구보다는 작가 개인의 가치와 철학이 담긴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대중의 요구와 유행에 따라 제작환경과 목적의 추가 기울어 있고, 그림 소비자의 요구 역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시간의 기록이나 대중적 필요보다는 작가 개인의 이야기와 기호(嗜好)가 반영되는 쪽으로 상당 부분 기운데다, 작가 개인의 서사에 열광하고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관객의 팬심이나, 작품에 자신을 투영(投影)해서 들여다보고, 반추하려는 개인의 욕구가 작동되는 경향이 커졌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물론 현대의 화가들이 역사의식이 부족하고 사명감이 없다거나, 기록과 교육의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가라는 사람들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고,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속한 사회의 시간과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작가는 자신이 속한 사회 안에서 시대와 마주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해서 그림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낼 것이다. 그렇게 제작된 그림에서 시대를 읽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대부분 그림은 어떤 방식으로든 당대를 반영한다.

 

- 그림과 만나는 길

그림을 만나러 가보자. 화창한 날이어도 좋고, 흐리고 낮은 하늘에 마음이 말랑해지는 그런 날이어도 상관없다. 그림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 인사동도 좋고 삼청동도 좋다. 큰 미술관을 찾아도 좋고, 숨은 듯 자리한 작은 갤러리를 찾아도 좋겠다.

근대에 시간이 흐르는 개항장 거리로 가보자. 그곳에 가면 도든 아트하우스가 있다. 윤아트갤러리와 갤러리 벨라를 들러 배다리로 발길을 옮기면 골목 안에 숨은 듯 자리한 잇다스페이스를 만나게 된다. 잇다에는 오래된 기억이 흐르는 공간과 그림이 있다. 근처 우현문갤러리에 들러 고유섭 선생을 기억해도 좋겠다. 헌책방 거리의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에서 그림과 잠시 쉬어도 좋고, 치열했던 삶의 기억이 박제된 괭이부리마을 골목 안에 우리미술관도 좋다. 한때는 미술인들의 뒤풀이로 왁자하던 구월동에 가보자, 종합문화예술회관의 전시장은 더 나은 변신을 위해 공사 중이지만 근처 골목에서 빛나고 있는 KMJ갤러리를 만날 수도 있다.

꼭 갤러리에 들어가지 않아도 한가로운 산책자의 마음으로 거리의 미술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도 좋겠다. 특별한 준비 없이 편안하고 느린 걸음이면 족한, 도시 산책자가 되어 길을 나서보자. 소란스럽고 팍팍한 세상은 잠시 잊고 사랑을 만나듯 그림을 만나자. 현대 작가의 작품도 좋고, 옛 조상들의 그림이어도 좋다. 현실에 고단함은 잠시 내려놓고, 그림 속에서 잊고 지냈던 꿈을 만나고, 지나간 사랑의 그림자도 밟아보자. 그림을 읽으며 말이다.

도든 아트하우스.
도든 아트하우스.
잇다스페이스
잇다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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