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봄의 마지막 절기 곡우(穀雨). 신록이 푸르릅니다. 새움은 언제 이렇게 푸르러졌는가? 산들바람에 실린 신록은 기쁜 소식을 전해 줄 것만 같습니다.
아침부터 꾸물대던 날씨가 안개인지 이슬비인지 내리다 그쳤습니다. 나는 물병 하나 들고 뒷산인 마니산에 오릅니다. 낙엽 쌓인 촉촉한 등산로가 푹석푹석합니다.
출발할 때 그쳤던 이슬비가 제법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어느새 속옷까지 축축하게 젖습니다. 그만 산에 오르는 걸 포기하려는데, 보라색 야생화가 눈을 사로잡습니다.
'와! 요 녀석들, 올해도 같은 자리에 어김없이 피었네!'
각시붓꽃입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뚫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보랏빛 요정 같은 꽃이 너무나 반갑습니다.
작년에 봤던 각시붓꽃이 올해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올망졸망 피어 수줍은 새색시가 봄나들이를 나온 것 같습니다.
위쪽 바윗골에 피었던 각시붓꽃들도 만날 수 있을까? 이쯤 해선 이슬비 정도는 개의치 않고, 발길은 어느새 산 위로 향합니다.
각시붓꽃! 꽃말은 '기쁜 소식'이랍니다. 대부분 붓꽃 종류는 키가 껑충 큰 데 비해 각시붓꽃은 꽃이 피는 동안에는 10cm도 못 됩니다. 그래서 아담하고 귀엽습니다. '각시'라는 이름에 정감이 갑니다. 식물 이름에 접두사 '각시'가 붙으면 '작다'를 의미합니다. 그보다는 각시라는 이름 때문인지 각시붓꽃에서 볼 연지 찍은 새색시가 연상됩니다.
예전 시집가는 딸에게 어떤 어머니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애야, 가서 걱정만 하면 지는 거고, 늘 설레는 맘으로 살면 이기는 거여! 내 뭔 말하는지 알쟈?"
각시붓꽃에서 새색시의 고운 자태와 설레는 마음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고운 한복에 행주치마 입은 새색시처럼 단아해 보입니다.
얼마 안 가 홀로 피어있는 또 다른 각시붓꽃이 서 있습니다. 누가 널 여기 홀로 두었을까? 홀로 핀 각시붓꽃이 고고하게 느껴집니다. 바라볼수록 다소곳하고 소박합니다. 보라색 바탕에 흰 무늬들이 박혀 섬세하고 세련된 멋이 느껴집니다. 길고 곧게 뻗은 잎도 한층 분위기를 더합니다.
그쳤던 비가 제법 추적추적 내립니다. 나는 빠른 발걸음으로 작년에 무더기로 피었던 곳을 찾았습니다. 와!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걸까? 각시붓꽃은 어김없이 피었습니다. 자기들을 예쁘게 봐주려고 찾아온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듯싶습니다.
각시붓꽃은 한 해 피고 마는 꽃이 아닙니다. 여러 해 같은 자리를 지키며 피었다가 지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자연 그대로 놔두면 알아서 크고 자랍니다. 얼마나 고맙고 대견합니까!
산에 오르다 각시붓꽃을 만나면 꼭 기억해두세요. 이듬해 봄 당신을 기다리며 보라색 각시붓꽃은 같은 자리를 꼭 지킬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요.
녹음이 우거진 산에 새들이 지저귑니다. '구구 구구!' 산비둘기가 멀리 떨어진 임을 찾는지 울어댑니다. 박새, 딱새도 왔다 갔다 합니다. 각시붓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보다 새들인 것 같습니다.
각시붓꽃에 얽힌 슬픈 전설 하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삼국시대 화랑 관창과 그의 정혼녀 무용 사이에 애달픈 이야기입니다.
각시붓꽃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보라색 붓꽃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각시붓꽃의 전설> /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