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같은 만남, 감사와 그리움으로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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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같은 만남, 감사와 그리움으로 돌아보다
  • 최재순
  • 승인 2023.05.0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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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최재순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인문학 아카데미 소통의 글쓰기반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인하대학교 공대 건축학과 조교를 하면서였다. 대학교 졸업 후 처음 일하게 된 일양 건축에 연수생으로 나간 지 5개월쯤 되어서 “인하대 조교로 가지 않을래?”라고 ‘지순’ 선생님(일양 건축 소장님이시고, 연세대 주생활과 스승님)이 제안하셨다.

건축학과 조교로 일하던 연세대 주생활과 1년 선배가 결혼을 하면서 그 자리가 비게 되었던 것이다. 1973년 봄은 희망이 가득 찬 봄이었다.

인하대학은 전 직원을 위한 통근버스를 8대 운행하고 있던 시절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마다 정확한 시간에 나가서 저녁 시간에는 근무를 정확히 5시에 마치고 통근버스를 타고 집에 오고 하는 나날이었다.

아직 조교의 업무 일이 익숙치 않은 상태에서 어느 날 퇴근 시간에 통근버스를 타려고 급히 내려가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일이 있었다. 정신이 없지만 크게 다친 것도 아니어서 아픈 발목과 발을 쩔뚝이며 통근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정신이 반쯤 나갔지만 넘어지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던 것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그것은 학교에 근무한 지 이 개월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고 내가 기계공학과 조교였던 남편과의 첫 만남이 되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그 후 일본문부성 장학생 모집 공고가 났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였지만 시험은 볼 수 있다고 하여 원서를 내 보기로 했다.

그 전 해까지는 1년 이상 근무한 조교와 직원 대상으로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는데 그 해부터는 조건이 바뀌어 나도 경험으로 내보게 된 것이다. 인하대학교에서는 세 명의 조교가 원서를 내게 되었다. 교무과 직원이 어느 날 연락을 하여 본인들이 직접 서울 광화문에 있는 종합청사에 가서 내라고 하였다.

화학과 조교는 일이 많다고 하면서 기계과 조교와 같이 갔다 오라는 말을 들었다. 근무시간에 학과 사무실에 말하고, 그와 둘이서 삼화 고속버스를 타고 광화문까지 가게 되었다. 나의 전공은 주거학이고 연대 주생활과를 나왔다고 자기소개부터 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버스를 타고 1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고, 이때부터 우리의 데이트는 시작되었다.

그는 인하대 출신으로 졸업 후 3년 군대를 다녀오고 바로 조교가 되었다고 하였다. 알고보니 제대하기 전까지 일본 유학을 위해 벌써부터 일본어와 역사, 시사까지 열심히 준비해온 사람이었다. 나는 준비가 안 되어있지만, 경험으로 본다고 하니 매일 과외로 시험 준비를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 후 우리는 매일 도서관에서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은 퇴근 버스를 타고 서울시청 뒤 ‘성궁’이란 다방에서도 만나 공부하고 시험 보는 7월까지 더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다. 문부성 시험을 같이 보았던 두 사람의 조교들은 합격하여서 1974년 4월 일본 大阪大学과 京都 대학으로 매달 생활비를 학비를 받는 국비(國費) 장학생이 되어 떠나게 되었다.

남편은 1974년 4월부터 1975년 7월까지 내가 유학을 갈 수 있는 대학들을 알아봐 주었고 사비 (私費) 유학생으로 가게 도와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당시 사비 유학생도 외국어 시험과 논술(시사 문제), 역사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해외 유학을 갈 수 있었던 시기였기에 나는 차근차근 준비했다. 일본어 회화를 열심히 배우고 정확한 발음과 언어 습득을 위해 어학원에서 친해진 몇 사람과 개인 강습도 받았다.

일본에 가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끔 일본 사람들 중에 나의 발음이 좋다고 하였다. 또한 말하는 태도가 품위 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東京 표준어로 아나운서를 했다는 경험있는 분께 개인 강습을 받았던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문부성 시험을 계기로 1975년 7 월 25월까지 편지로 소통하였다.

일본에서 그가 여름방학 때 나올 수 있어서 본인이 없지만 5촌 아저씨가 중간에 연락을 해 주시면서 우리의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동안 중곡동에 사시던 시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1975년 7월 말경부터 8월 10일 결혼식까지 바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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