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학파의 토대를 이룬 소남 윤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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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학파의 토대를 이룬 소남 윤동규
  • 인천in
  • 승인 2023.05.1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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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인문학 12강을 듣다]
(1) 소남의 편지들 - 구지현 선문대 교수
[인천in]이 소남학회, 계양도서관과 함께 510일부터 920일까지 12차례에 걸쳐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를 탐구하는 인문학 강좌를 요약해 연재한다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 성호학파를 인천으로 확산시킨 소남을 통해 인천의 역사와 정신적 문화유산을 함께 탐구하며 인천 역사를 지평을 넓혀본다이번 강좌는 계양도서관에서 열리는 10개 강좌와 장서각, 성호박물관 등에서 진행하는 2개의 탐방활동으로 이뤄져 있다. 첫번째 순서는 선문대 구지현 교수의 '소남의 편지들'이다.

 

 

'반계 유형원이 시작했고, 성호 이익이 넓혔는데 성호는 자손과 제자를 많이 키웠다. 안정복(1712~1791)은 역사, 신후담(1702~1761)은 예학, 황운대(?~1757)는 역산(수학·천문학), 윤동규(1695~1773)는 지리에 뛰어나 높은 수준에 이르렀으며, 정약용(1762~1863)은 사숙하여 대성했다'(『석천유고』,정인보(1893~1950))

 

"성호의 학문세계는 그의 수제자 소남이란 토대위에서 이뤄졌다. 성호의 문집은 대부분 소남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소남 없었더라면 성호의 학문세계도 없었을 것이다."

구지현 교수는 소남 인문학 첫 시간으로, 성호 이익의 첫 번째 제자인 소남 윤동규를 소개하고 그가 남긴 서간(편지)들을 함께 읽어보았다.

소남은 본래 한양의 용산방에서 태어나 사부학당 가운데 서학에 속한 학생이었으나,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고 18세인 1712년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갔다. 성호가 살던 안산과 가까이 있기 위해 증조부 때부터 연고가 있던 인천 도림동으로 이사하였다. 인천의 옛이름인 소성(邵城)에서 따와 호를 지을 정도로 인천을 사랑하였다.

평생 학문에 몰두하였던 소남은 성호에게 첫 번째 제자이기도 하였으며 친인척이 아닌 첫 번째 제자이기도 하였다. 성호가 죽을 때 병수발을 하였을 정도로 가족처럼 지냈으며 스승의 사후에는 성호의 책과 문집을 편찬함으로써 이후 다산 정약용처럼 사숙하는 인물이 나오도록 성호의 학문을 전수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단순한 제자가 아니라 성호에게는 동료 학자였고 후배들에게는 작은 스승이었다.

성호의 제자들은 소남에게 어른을 뜻하는 ‘丈’자를 붙여 부르며 존중하였고 소남도 이들에게 존대하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성호학파 내에 연배에 상관없이 서로를 학문적인 동료로서 존중하는 기풍은 성호가 소남을 대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성호학파 형성에 있어서의 소남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편지이다. 전근대 시기 편지는 학자들 사이에 학술적인 의견을 교유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윤동규의 문집인 『소남문집』 과 종택에 소장되어 있는 간찰을 통해 인천의 학자 소남 윤동규의 활동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구 교수는 소남 윤동규가 1742년, 1745년, 1751년과 1754년에 실제 쓴 편지를 보여주며 그의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을 함께 살펴보았다.

 

< 1742년 8월15일, 소남이 성호 이익에게 보낸 편지 >

1742년 편지

제가 성대한 염려를 입어 스스로 보전하였습니다. 이웃의 전염병 역시 저절로 침식되어 조금은 여유 있게 노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흉년이라 죽음으로 모는 상황을 면하지 못할까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스스로 살 계책이 없어 매우 고민이 되니 어쩌겠습니까? 선영 근처에 터전을 잡았으니 작은 집을 지어서 이곳에서 노래도 하고 곡도 하면서 아침에 나무하고 저녁에 독서를 할까 합니다. 뒤에는 언덕과 송추의 그윽함이 있고 앞으로는 관악산과 수리산의 빼어남이 펼쳐져 발과 눈이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정취가 있을 것입니다. 흉년이라 일자리가 절박하니 공사가 쉽게 이루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산이름이 중경이라 거소의 이름을 "重慶"이라 하고 선영이 있는 곳이니 감히 방의 이름을 "敬止"라 할까 합니다. 훗날 집이 완성되면 마땅히 절하고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종택 소장 서간 "壬戌八月十五日 侍生尹東奎 再拜上")

 

<1745년 4월, 소남이 성호의 장남 이맹휴에게 보낸 편지>

1745년 편지
1745년 편지
떨어져 산 지 오래라 반듯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훌륭한 의논을 듣지 못하니 마음이 어찌 적적하지 않겠는가? 초여름이 덥네. 삼가 생각하니 벼슬길은 진중하고 그리운 마음은 구구하니, 예조에서 오래 고생하는 것에 탄식하게 되나 직임을 맡으면 그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니 어느 곳인들 마음은 관대하고 몸은 편하지 않겠는가? 지난번 성호께 갔을 때 『춘관지』를 대략 보니 사실을 잘 기술하여 열심히 노력한 것을 알 수 있었네. 그러나 한쪽 방향으로 몰두할까 걱정스러웠으니, 이러다가 혹시라도 초목의 경계가 많음을 면치 못할까 해서이네. 공무의 여가에 독서하며 이치를 탐구하기를 깊이 기원하니, 본원을 잘 기르는 일은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네. 내 생각에 순수는 이런 일에 이르지는 않겠으나 우리들이 순수에게 의지하고 바라는 것을 본디 모르는 것은 모르는 법이라 이에 감히 충고하여 어리석음을 드러내네.……(尹東奎, 「乙丑四月初七日」)
 

< 1751년, 소남이 성호 이익에게 보낸 편지 >

1751년 편지

• 동규가 두 번 절합니다. 시골집에서 체류하다가 한 달을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병세가 어떠신지 듣지 못하여 염려가 마음에 맺혀, 자나 깨나 근심스러웠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도동록》 일로 와 있는 편지를 받고, 비록 손으로 직접 쓰신 것은 아니지만 하문하시는 글이라서 ‘정력이 진실로 여기에 미치시는구나’ 하고 삼가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친구 한 두명이 역시 와서 ‘근래 병세가 갑자기 좋아져 거의 안정되실 것 같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듣고서 기뻐한 것을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 삼가 서릿바람 부는 계절을 살피지 못하였으니, 환절기에 건강은 어떠신지요? 침식과 언동 등 기거하시는 것 역시 어떠신지요? 병환이 오래 되셨으니 ‘지금 조금 안정되었다고’는 하나 진원이 크게 손상되어, 향후 조섭하는 데 더욱 마땅히 주의하여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구한 제 마음 역시 우러러 염려되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 순수[이맹휴(성호의 장남)]의 장례 기일이 이번 28일이라 들었으니 과연 그러한지요? 장례 치르는 일은 반드시 힘들 것이니 조섭하는 데 해를 끼칠까 걱정스럽습니다. 한 번 동요되면 쉽게 저촉되어 슬퍼한 끝에 아픔을 더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제 생각에 나아가 문후를 여쭙고 얼굴을 뵙고자 하였으나, 제 마음이 미칠 것만 같고 타고 갈 것을 마련하지 못하여 엄두를 내지 못하여, 장례일에 또 장지에서 영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애오라지 몇 마디 적어 제사에 부치고 자목[이삼환]에게 대신 술을 올려달라 청하였습니다. 가난이 끝까지 사람의 정리를 막는 것이 이와 같으니 개탄스러움이 어떠하겠습니까?

•《도동록》의 차제와 제목은 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번 몸을 조섭할 즈음 번거롭게 아뢰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만, 소세(梳洗)의 가르침에 이르렀으니 어찌 감히 쉽게 받들겠습니까? 다만 가르침에 따라 고쳐서 다시 정리하여 말씀을 받드는 것으로 삼겠습니다만, 괴롭게도 서사가 없고 못난 솜씨는 편치 않아 우선 종이 묶음을 남겨두고 다시 명하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책상 아래에서 절하며 제 마음을 펼 수 있을까요? 다만 이 마음이 우러러 흘러넘쳐 날마다 보내고 있습니다. 삼가 수시로 조섭에 신중하시고 빨리 평소로 회복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윤동규, 신미년 9월 23일 간찰)

 

< 1753년, 소남이 성호 이익에게 보낸 편지 >

1753년 편지
1753년 편지
삼가 여쭙니다. 장단(長湍)의 근친 가운데 가형이 죽고 후사가 없자 그 차자(次子)가 대신 제주(題主)를 하였는데 혹시 직접 ‘효(孝)’자를 쓰는 것을 허용하셨는지요? 평소 들었던 것과 다름이 있어서 그 사람의 형편을 헤아려 하교하셨으리라 적이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 사람은 선생님의 위세를 빌어 책임을 전가해 막으려는 것입니다. 그 이웃이 구성(駒城)에 출입할 때 집안일을 맡은 사람이 말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혹시 이 일이 선생님께 전달되었는지요? 이 일 때문에 다시 생각하니 멱악(幎幄)이나 명정(銘旌)의 종류는 아마도 마땅히 반복해서 생각하고 길이 생각해야 할 듯합니다.(尹東奎, 「上星湖李先生書 癸酉五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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