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소남의 책들 - 인천에 도서관이 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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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소남의 책들 - 인천에 도서관이 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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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5.2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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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남 인문학 12강을 듣다]
(3) 인천에서 가장 컸던 소남 도서실 - 허경진 연세대 객원교수
[인천in]이 소남학회, 계양도서관과 함께 5월10일부터 9월20일까지 12차례에 걸쳐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를 탐구하는 인문학 강좌를 요약해 연재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 성호학파를 인천으로 확산시킨 소남을 통해 인천의 역사와 정신적 문화유산을 함께 탐구하며 인천 역사를 지평을 넓혀본다. 세번째 순서는 연세대 허경진 객원교수의 '인천에서 가장 컸던 소남 도서실'이다.

 

 

태평 시절에 해로한 것도 큰 영광인데

아들 있으니 오지(五之)가 어찌 부러우랴.

높은 벼슬은 본래 외물이니 가볍게 여겼고

얼굴 혈색이 좋으시니 장수 누리실 수 있겠네.

고요히 앉아 천 권의 책 읽으며 선대의 가업 계승하였고

작은 조각배로 거친 물결 건너시어 나의 근심을 위로하셨네...

- 족형 윤신의 회갑 수석연의 시에 화운하여(和族兄 愼 回甲壽席韻) -

 

소남 윤동규(1695~1773)의 손자 윤신의 회갑연을 친척 윤기가 축하하는 시 내용이다. 다섯째 구절 ‘고요히 앉아 천 권의 책 읽으며 선대의 가업 계승하였고’에  윤기 자신이 주(注)를 달았다.

“족대부 소남공(邵南公)이 평소 독서를 하며 안빈낙도하였다.[族大父邵南公平生讀書樂道]”고.

윤신이 읽는 천 권의 책이 윤동규에게서 내려온 책이며, 그의 학문도 역시 윤동규에게서 내려오는 가학(家學)이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그의 처신도 안빈낙도하던 윤동규에게서 이어진 것임을 밝힌 것이다.

 

윤기가 족형 윤신의 회갑연을 축하하는 시문

 

계양도서관이 진행하는 '길위의 인문학' - 소남 윤동규 3번째 강좌가 ‘인천에서 가장 컸던 소남 도서실’을 주제로 24일 오후 7시 허경진 연세대 객원교수의 강의로 열렸다.

 

 

조선에는 서점이나 공공도서관이 없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경’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조선은 지식을 통제하고 배급했다. 돈이 있는 국가나 사찰, 양반가문과 서원만이 책을 냈으나 서점이 없어 상업적 출판으로 인쇄술을 발전시킨 후발 주자(서양, 일본)에 뒤쳐졌다.

정조의 규장각은 열람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규장각 직원 위주의 도서관이다. 국왕의 어제(御製), 어필을 보관하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신하들을 통해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곳이있다. 영의정 우의정도 규장각을 출입할 수 없었다.

문집은 문중이나 학파가 자비 출판하여 서점 없이 무상배부했다. 돈 있는 집안만 문집 출판이 가능했다. 서포 김만중(1637~1692)의 어머니는 《사서》와 《시경언해》를 빌려다 필사해서 가르쳤다. 《소남선생유집초》도 출판하지 못해 필사본 1권만 전해졌다.

최초의 개인 도서관은 허균(1569~1618)의 '호서장서각'이다. 강릉 유인길 부사가 임기를 끝내며 허균에 인삼 32냥을 넘겨주었는데, 이를 고을의 학자와 같이 쓰겠다며 누각 하나를 비워 서적을 소장했다. 사신이 명나라에 가는 편에 구해온 육경(六經)ㆍ사자(四子)ㆍ《성리대전(性理大全)》ㆍ《사기(史記)》ㆍ《문선(文選)》, 이백(李白)ㆍ두보(杜甫)ㆍ구양수(歐陽脩)의 문집, 《통감(通鑑)》 등이 그것이다.

 

 

인천 남촌의 윤동규도 개인 도서관을 운영했다. 그가 소장하던 책들은 모두 돈을 주고 사들인 것이 아니다. 윤동규가 소장하고 있던 책 가운데 서학(西學)이나 천주학(天主學) 관련 책들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책 자체가 많지 않아서, 윤동규가 남에게서 빌려다가 베껴서 소장하였다.

윤동규는 책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도 적지 않은 도서와 문서가 종손에게 남아 있지만, 윤동규 당대에는 소문이 나서 여러 사람이 빌려다 보거나 베껴 갔다. 학자가 많지 않았던 인천에 도서관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많을 책을 사 왔던 성호 이익의 도서관도 빼놓을 수 없다. 소남이 가장 많이 빌려다 본 도서관은 안산에 있는 성호의 도서관이다. 성호가 책이 많은 서울도 아닌 안산 첨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이하진이 1678년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에 청나라 황제가 하사한 은으로 사 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 덕분이었다.

 

“왕우군(王右軍)의 진적은 탑본(搨本)이 우리나라에 전하는 것이 많다. 우리 선친이 본시 필예(筆藝)에 능하였으므로, 연경(燕京)에 사신가셨을 적에 큰 돈을 들여서 선본(善本)을 많이 구입해 왔던 것이다.” -『성호사설』 권28 「우군진적(右軍眞蹟)」

 

윤동규 자신이 이렇게 빌려다 베낀 책들을 가장 열심히 읽고 관련된 글을 지었지만, 후손들도 대대로 열심히 읽었으며, 책은 조금씩 더 늘어갔다. 소남의 아버지 윤취망(尹就望)이 지은 시권(試券)도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책들은 윤동규가 물려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가장 열심히 읽은 후손은 윤동규 다음으로 많은 글을 남긴 손자 윤신(尹愼)과 증손자 윤극배(尹克培)이다.

손자 신은 다산(茶山) 문하에 드나들며 남인의 학맥을 이어갔다. 증손자 극배는 1801년 진사에 합격하고 18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정5품) 벼슬을 하였다. 그때마다 호패의 재질(材質)이 달라졌으므로, 극배는 책 뿐만 아니라 호패와 교지도 여러 개가 되었다.

 

윤성수(1656-1708)부터 윤구용(1883-1953)까지 소남가 10대 호패
윤성수(1656-1708)부터 윤구용(1883-1953)까지 소남가 10대 호패

 

윤동규의 서재에서 가장 특색있는 책들은 당연히 성호학파의 특성을 보여주는 책들이다. 윤동규는 성호의 단순한 제자가 아니라 그의 저술을 정리하고 집대성한 학자였으므로, 당연히 그가 남긴 이 분야의 책들이 더욱 중요하다.

성호(星湖)는 선비들의 예식(禮式)이 문란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고금의 예를 절충하고 사서인(士庶人)의 예를 참작하여 자신이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치를 때마다 새로운 예식을 정리하였다. 조카 병휴가 그 예설(禮說)들을 수집하였는데, 문중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러 의절이 오래되면 없어질 것을 우려하여 1766년에 이들을 합편(合編)하여 『성호예식(星湖禮式)』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병휴가 『성호예식(星湖禮式)』을 편집하고 가장 먼저 보여준 학자는 선배이자 스승인 윤동규이다. 윤동규의 종가에 소장된 『성호선생예식(星湖先生禮式)』에는 그가 1767년에 지은 서문이 앞에 실려 있다.

윤동규의 도서관에서 또 하나 중요한 책은 『이선생예설유편(李先生禮說類篇)』인데, 퇴계(退溪)의 방대한 예설(禮說)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성호가 종류별로 편집한 책이다. 성호가 편집을 마치고 「이선생예설유편 서문[李先生禮說類編序]」을 지었는데, 이 책은 소남 종가 외에 어느 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지 않다.

성호학파가 성리학만 연구하던 노론 학자들과 달랐던 가장 큰 차이점은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성호가 긍정적으로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 서적에 관심을 가지자 제자들도 관심을 가졌는데, 권철신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여 순교하고, 소남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검토하였으며, 순암은 비판적으로 대응하여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였고, 하빈 신후담은 적극적으로 비판하여 『서학변(西學辨)』을 저술하였다. 지금 소남 종가에 전하는 책 가운데 벨기에 선교사 페르비스트(Verbiest, F., 南懷仁)가 지은 『곤여도설(坤輿圖說)』이 천주교 계통의 세계지리서이다.

 

성호학파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세계지리서  『곤여도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인식했다.

 

소남의 책들을 가장 많이 빌려간 학자는 성호학파의 제자인 순암 안정복이다. 순암이 소남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러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데, 늘 몇 권은 순암에게 대출중이다.

 

“『천문략(天問略)』과 『곤여도설(坤輿圖說)』은 지난번에 돌려드렸는데, 아마도 부침(浮沈-없어지다)되지는 않았겠지요.

『방성도(方星圖)』와 『측량법의(測量法義)』는 지금 돌려드리니, 확인해 보십시오.

『태서수법(泰西水法)』과 『만국도지(萬國圖志)』는 (저에게) 잠시 더 남겨 두겠습니다.

이외에 『기하원본(幾何原本)』, 『동문산지(同文算指』, 『공제격치(空際格致』 등의 책들은 다시 빌려 주십시오.”

 

20세기초까지도 소남의 종가는 도서관 역할을 하였다. 여러 종가의 후손들이 찾아와 서적을 열람하였다. 이때 없어진 책도 상당히 많다.

단종 때 우의정에 올랐다 계유정난으로 1454년 사사(賜死)된 정분(鄭苯)의 후손이 소남의 도서관에서 빌려간 책에서 정분의 초상화를 그렸다며 소남 종손에게 출판된 책을 가져오기도 했다. 20세기의 일이다.

 

애일당 정분의 초상화
애일당 정분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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