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추억 … '신포동과 동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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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바랜 추억 … '신포동과 동인천'
  • 배영수
  • 승인 2011.09.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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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음반' 모이던 곳 - "지금은 향수만 남았다"

아이슬란드의 시규어 로스가 기록한 DVD '헤이마(Heima)'

취재 : 배영수 기자

아이슬란드 출신 밴드 '시규어 로스'가 2007년 발표한 DVD 중에 헤이마(Heima-아이슬란드어로 '집으로'라는 뜻)'라는, 한때 주목을 받았던 영상물이 있었다. 자신들이 나고 자란 나라에서 시간이 갈수록 사라져가는 곳들(이를 테면 탄광, 어촌마을, 생선창고 등)에 대한 안타까움과 기억의 편린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기록한 DVD였다. 이 두 장짜리 DVD는 개발주의에 입각해 무조건 '새 것'이 좋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국내에도 적지 않게 판매됐다.
 
그러고 보면, 인천 역시 개발주의나 산업의 변화에 밀려 없어진 흔적이 꽤 많다. 그런데 곳곳에서 그 흔적들이 아예 없어지지 않은 채 일종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움을 안겨주는 요소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소재가 지역 예술인들 영감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것은 중구 혹은 동구 일대에 위치한 쪽방촌과 같은 옛 생활상이 될 수도 있고, 옛 분위기를 기억하는 예술인들 작업이나 경제활동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을 터이다. 이렇게 아직도 남아 있는 흔적은 신포동과 동인천 인근에 많이 분포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없어진 '음반 가게'를 추억하는 시간을 마련해 본다.


지금은 옷가게와 핸드폰 가게 등만 즐비한 신포지하상가지만,
1980~90년대 이 곳에서는 수백 가지 희귀 음반을 살 수 있었다.
 
"괜히 서울 회현동 같은 데를 갈 필요가 없었다니까요."
 
부평구 산곡동에 거주하는 음악 마니아로 지난 기획 8월 초 기획기사 '인천은 한국의 LA였다'를 제작할 당시 도움을 줬던 조모(34)씨 이야기다. 서울 회현동은 그 일대 명동 등과 더불어 구하기 힘든 LP나 CD 등 음반들과 LD(레이저디스크) 등의 영상물을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이야 인터넷 발달로 신용카드 한 장만 있으면 전 세계서 나오는 영상물과 음반들을 구입할 수 있지만, 그때는 많은 음반 수집가들이 회현동으로 발품을 팔아야 했다. 미루어 봤을 때, 조씨 말은 "서울까지 안 가도 인천에서도 그런 걸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당시 인천에서 회현동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은 어딜까? 바로 신포동과 동인천역 일대였다. 신포동 초입서부터 동인천역 인근까지 길게 늘어선 지하상가는 지금도 이 일대 상권을 대표하는 시설. 1980~90년대에는 이 지하상가에 10곳이 넘는 크고 작은 음반점이 호황을 이루며 장사를 했다. 음반시장 불황으로 지금까지 이 곳을 지키고 있는 점포는 단 두 곳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시 이 곳은 '주요 쇼핑 포인트'로 음반이나 영상물 가게들이 언급됐을 정도로 풍성한 콘텐츠를 자랑했다. 이러한 사실은 1980~90년대 이 곳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면 누구나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빼곡히 CD가 꽂혀 있는 조모씨 자택의 방 한켠 모습.
조씨는 "2000년대 이전 산 건 죄다 신포동-동인천이 구입처"라고 했다.

성헌고(현 인제고) 출신으로 학창시절 '주무대'가 이 곳이 아니었음에도 주말이면 항상 동인천역과 신포동 일대를 찾았다는 조씨는 자신을 비롯한 많은 친구와 음악 마니아들 상당수가 여기서 음반을 다 구했다고 했다. 이 지역에서 못 구하는 경우 석바위나 주안역 지하상가 등도 쏠쏠한 대안으로 됐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는 "정말 회현동을 가야했던 친구들은 당시 밀수 형식으로 수입됐던 일본 음악을 듣는 친구들뿐이었다"면서 "가요서부터 시작해서 팝, 클래식, 재즈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음반들은 여기서 다 구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곳 두 음반 가게에서는 사진 촬영과 자문을 거부해 음반 매장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사진이나 당시 분위기 등 정보를 얻지 못했다. 이에 기자는 조씨 집을 한 차례 더 방문했다. 명목은 '빼곡한 CD 이미지 촬영'이었지만 당시에 대한 정보를 더 얻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조씨는 또 하나 특별한 사실을 알려줬다.


조씨 자택에서 찍은 LP들. 그의 말에 따르면 이것들 역시 신포동-동인천이 구입 경로였다.

조씨가 소장하고 있는 CD는 1만여 장. 빼곡이 꽂힌 800여 장의 LP도 동시에 구경할 수 있었다. 조씨는 "내가 갖고 있는 음반 중 절반 정도가 신포동-동인천 일대에서 구입했던 것"이라고 했다. 나머지 절반의 구입 루트를 묻자 "2000년대 이후 구입한 것들로 온라인으로 주문했다"면서 "실제 나 같이 음반을 구입한 인천시민들이 꽤 됐다"는 얘길 전해줬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터넷이 없어 음반을 구하려면 발품을 팔아야 했던 시기에 인천의 음악 마니아들은 버스 한 번 타고 신포동으로 갔다.
 
기자는 조씨와 알고 지내는 음악 마니아 3명과 잡지기자 시절 알고 지내던 2명의 인천 출신 음악업계 관계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 모두 신포동-동인천 일대에 대해 조씨와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중 학창시절 음악 마니아였다는 주부 진모(36)씨)는 "동인천역 건너편에 '심지'라는 음악감상실이 있었는데, 주말 대부분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마음에 드는 뮤직비디오를 보면 지하상가로 내려와 음반을 구입해 듣는 게 취미였다"라고 말했다.
 

동인천역 앞 '심지음악감상실'이 있던 거리는 지금은 특색 없는 골목으로 됐다.

직장인 강모(34)씨는 "학창시절 인기 있던 해외 팝스타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가요 음반들을 근거리에서 모두 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신포동과 동인천 일대였다"면서 "이에 대한 동경심으로 1997년에 잠깐 음반가게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다"라고 했다. 당시 아르바이트에 대한 기억을 묻자 "물론 가요 테이프를 구하러 오는 10대들이 제일 많았지만, 딥 퍼플이나 레드 제플린 등이 발표했던 희귀 음반을 구하러 오는 진득한 마니아들 역시 매상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면서 "이 때문에 가게 주인이 소위 '보따리 장사' 형식으로 일본에서 발매된 음반들을 구해 오는 경우도 많았다"라고 말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국 음반 가게들은 mp3가 무분별하게 돌아다니는 2000년을 기점으로 하나둘 문을 닫고 말았다. 서울에서 아주 큰 음반매장 중 하나였던 종로의 '뮤직랜드'가 2004년 결국 문을 닫은 사건은 전국 음악 팬들 사이에서 '음반시장 몰락'에 대한 상징과도 같았다. 물론 인천도 마찬가지였다.
 
조씨를 비롯해 만나본 음악 팬들은 "신포동-동인천은 살아남길 바랐다"고 했지만, 큰 산업 변화 앞에서는 이 곳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조씨는 헝가리 재즈 피아니스트 스자크시 라카토쉬의 1989년 앨범을 보여주며 "당시 많은 음반 가게 앞에는 '점포정리'라는 이름으로 CD들을 떨이로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게 내가 '떨이' 형식으로 동인천 일대에서 산 마지막 CD이고 그 시기가 2001년 경이었다"라고 밝혔다. 덧붙이자면, 기자 역시 동인천역 인근에 위치한 '지성'이라는 음반 가게에서 2000년 경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 음반을 구입한 게 이 일대에서의 마지막 음반 구입이었다.


조씨가 2001년 경 동인천 일대에서 마지막으로 구입했다고 밝힌
스자크시 라카토쉬 음반(왼쪽)과, 기자가 비슷한 시기와 장소에서 산 키스 자렛의 앨범. 
 
강씨는 "스마트폰 하나를 들고 다니면 그것 자체로 수백만 장 음반을 들고 다니는 효과가 대중화됐듯, 기술의 발달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만드는 현대 사회 특성상 이곳 일대가 그때와 같은 분위기를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보진 않는다"면서도 "스마트폰 속 수백만 장 음반들이 들어 있다 해도 그것이 개인적인 추억으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과거 그곳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 혹은 '흙 속의 진주'와도 같은 숨은 음악들을 발견해 듣는 재미를 지금 10대 친구들이 경험할 수 없는 데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다"라고 했다. 아울러 강씨는 그때 추억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했다.
 
"산업의 변화에 휩쓸린 음반가게 추억은 다시는 볼 수 없는 내 머리 속 행복한 기억입니다."


이제 서울 회현동과 같은 모습을 한 곳은 인천에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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