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사진은 예술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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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사진은 예술이었을까
  • 최종규
  • 승인 2011.10.04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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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이경민,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

 나한테 사진기가 없던 때이든 나한테 사진기가 있는 때이든, 사진찍기를 예술이라 여긴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쓰던 자동사진기를 빌려 수학여행 때에 사진을 찍었든, 후배한테서 빌린 수동사진기로 처음 작품사진을 찍었다 하든, 어떠한 사진이라 하더라도 예술이라 느낀 적이 없습니다.

 사진을 바라볼 때에 그저 사진이라 느끼지 예술이나 문화나 다른 무엇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 그저 사진이라 여기지 예술이든 문화이든 다른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예술을 말하거나 사진문화를 다루는 일은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방송에서 떠들썩하게 나오는 대중노래를 놓고 노래예술을 말하거나 노래문화를 다루는 일 또한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를 놓고 영화예술이라든지 영화문화를 밝힌다 할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무슨무슨 예술이나 문화를 들려주거나 살피는 일은 언제나 이 나름대로 뜻이나 값이나 보람이 있어요.

 다만, 하루하루 아름다이 살아가면서 따로 예술이나 문화를 잘라서 밝히거나 따지거나 살펴야 할까 궁금합니다. 송두리째 껴안을 수 있고 남김없이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사진 그대로 껴안으면 즐겁습니다. 사진은 사진인 만큼 사진다이 살아내면 아름답습니다.

 이경민 님이 엮은 사진책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아카이브북스,2010)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은 사진 발자취를 학문으로 파고듭니다. 학문으로 이렇게 파고드는 사진책은 이 나름대로 뜻과 값과 보람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사진이 맨 처음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퍼졌으며 뿌리내렸는가를 들여다보면서 오늘 내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요. 지난날과 오늘날과 앞날을 견주면서 우리 사진삶이 어떻게 영글면 좋을까를 곱씹는 밑거름이 됩니다.

 “결국 살롱사진은 사진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예술사진의 제도화 과정에서 오인된, 그리고 공모전 명칭에서 비롯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살롱사진이라는 명칭으로부터 비롯된 예술사진에 대한 단선적인 이해를 넘어 다양한 예술사진의 생산 맥락을 밝히는 작업이 요구된다(11쪽).” 같은 말마디를 읽으면서 한국 사진밭에서 흔히 쓰는 낱말이 얼마나 알맞을까 곱씹고, 얼마나 사진다울까 헤아립니다. 이윽고, “살롱사진은 앞서 언급했듯이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속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 사진계의 패권을 잡기 위해 호명된 용어라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예술사진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에는 부적절한 표현이며(12쪽).” 같은 말마디를 되뇌면서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한국사진을 하는 길이란 어떻게 나아가는 길인가 톺아봅니다.

 참말로 어떻게 걷는 내 사진길이 가장 나답다 할 사진이면서 가장 한국사진답다 할 한국사진이 될까요.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일구거나 가꿀 때에 내 사진밭을 알뜰히 여미면서 알차게 북돋울까요.

 2011년에 되돌아볼 때에 일흔두 해를 먹은 글월, “사진은 있는 그대로 백여 내인다고 하지만 촬영하는 그 자신의 눈을 통하여 마음에 비치우는 것을 백는 것인 만큼 사진 작품에는 작자의 마음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의도가 없어서는 더 발전할 수 없는 줄 압니다(200쪽/박필호 1938.6.30.).”를 되읽습니다. 사진에는 사진을 찍은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글에는 글을 쓴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노래에는 노래를 부른 사람 마음이 담깁니다.

 가장 좋은 사진이나 글이나 노래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장 흐뭇하게 받아들일 사진이나 글이나 노래란 없습니다.

 누구한테는 이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누구한테는 이 글이 가장 마음에 찹니다. 누구한테는 이 노래가 가장 마음에 와닿습니다.

 더 하지 않되 덜 하지 않습니다. 더 낫지 않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더 좋지 않되 더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찾아 일굴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믿는 고운 보금자리를 돌보며 두 다리 느긋하게 뻗을 노릇입니다. 나는 내가 아끼는 사진기를 마련해서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내 이야기를 담아 사진으로 찍을 노릇입니다.

 굳이 갈라야 하지 않으며, 애써 갈라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늘 사진이었고, 사진을 예술로 바라보고 싶으면 언제나 예술이 됩니다. 사진은 한결같이 사진이었으며, 사진을 문화로 바라보고 싶다면 노상 문화가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기에 예술이나 문화가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면서 삶이나 꿈이 됩니다. 사진은 사진이라는 알몸뚱이로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손길이 됩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사진이 없이 예술과 문화만 판치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 나라에는 예술과 문화는 없이 사진만 예쁘게 감도는지 모릅니다.

― 카메라당과 예술사진 시대 (이경민 글,아카이브북스 펴냄,2010.9.15./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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