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르시즘으로 너의 나르시즘을…"

[문학의 향기] 장재연 / 소설가

2012-07-03     장재연

김영하의 <거울에 대한 명상>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이미지란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자의 담론과 연관되는 보다 많은 것을 포함한다.

라캉은 그 유명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각주1)는 것과 더불어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인간의 욕망 자체가 타자의 욕망에 의하여 구조된다는 의미이다. 이때 타자의 담론 속에서 형성되는 이미지는 '내재된 자아'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이 자아는 타인에게서 반영된 이상적 심상을 자신의 자아로 견고화시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심상계적 나르시시즘과 무의식적 동일화를 통해 각 개인의 주체를 형성하는 특징이 되기도 한다.

작품 속 나는 충분히 아름답고 건강하고 매력적이고 능력 있는 존재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다. 나는 주위의 모든 것, 모든 텍스트로 나 자신을 포장하여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갈 줄 안다. 이미지는 실체보다 더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섹스를 할 때나 심지어는 죽음이 닥치는 순간에도 나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나의 아내 역시 정갈하고 상처를 입지 않은 백색의 대지로 나의 이미지를 완성시켜주는 존재이며, 또한 나의 자화상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 같은 이미지의 거울을 갖고 있는 사랑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나에게 '가희'라는 정부가 있다. 학창시절 연애 상대였던 그녀는 어느 날 아내를 소개해주었고, 나는 정숙하고 순진한 아내에게 반해 결혼을 했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가희와의 관계는 유지되고 있다. 나는 아내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혹은 자신의 이미지를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가희와의 만남을 1년에 한두 번 정도로 제한하였고, 나머지는 오로지 아내에게 최선을 다 하며 살아왔다. 아내가 상수도라면 가희는 하수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월의 어느 날 11시, 강변에서 11시(각주 2) 방향에 있던 트렁크 안에서 하수구가 말썽을 일으켰다. 호기심에 들여다보았던 폐차의 트렁크 안, 텅 빈 공간을 채우고 싶은 욕망으로 트렁크 안에 들어갔다가 갇혀버리게 된 것이다. 좀 더 따뜻하고 안전하고 자극적으로 섹스를 해보겠다는 유치한 담합의 결과였다. 그러나 에로스적 환상을 불러일으켰던 공간은 서서히 타나토스적 욕망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내는 하수도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상수도이자 하수도인 줄 알고 있었고, 그런 만큼 인생에 대해 무지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가희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시시각각 죽음의 공포가 몰려올수록 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의 실종 때문에 반 실성 상태가 되어 있을 아내가 걱정되었다. 그러자 이런 상황을 만든 가희에게 불같은 증오가 솟구쳤다. 내 더러운 욕망의 배출구를 자청하여 나를 분열시킨 여자, 폐차의 트렁크 속에 갇혀 죽음을 맞게 한 여자. 내 손이 증오심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하자 분노한 그녀는 급기야 '나의 거울'을 깨트리고 만다.

아내가 나와 결혼한 것은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가희를 사랑해서, 가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결혼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는 동성애자였다. 아내는 나를 한 번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나를 사랑한 것은 오히려 가희가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나의 거울은 아내가 아니라 가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수구로 취급했던 가희의 욕망은 곧 나의 욕망이었으며, 결과적으로 내가 심취해 있었던 거울 속 이미지는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르시시즘적 사랑은 일종의 보상심리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상대에 의해서 자기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것으로 사랑보다는 사랑에 대한 느낌이 중요할 뿐이다. 즉, 사랑한다는 느낌은 이런 것이어야 하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저런 느낌을 가져야 될 것 같아, 하는 등의 느낌이나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경우 서로의 개성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타자의 담론에 기대게 되어 남자 일반을, 혹은 여자 일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그들이 서로 원하는 것을 상대가 갖고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인정되는 '그 무엇', 자신은 결함하고 있는 '그 무엇', 그래서 끝없이 그것을 욕망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1. 의식에서 나타나는 꿈이나 여러 현상들을 볼 때, 치환이나 응축과 같은 언어적 구조가 무의식적 메카니즘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무의식(/) 때문에 기표(S)는 기의(s)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이다. (S/s) ).
 
2. 11이라는 숫자는 죄를 의미한다고도 함.

3. 프로이드는 자기보존적 본능과 성적 본능을 합한 삶의 본능을 에로스(Eros)라 했고, 공격적인 본능들로 구성되는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Thanatos)라 했다. 삶의 본능에서 성격발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성 본능이고 이것에 내재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리비도(libido)라 한다. 삶의 본능은 생명을 유지·발전시키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며, 한 종족의 번창을 가져오게 한다. 죽음의 본능은 파괴의 본능이라고도 불렸다. 이것은 생물체가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이다. 그래서 인간 자신을 사멸하고,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을 파괴하며, 처벌하며, 타인이나 환경을 파괴시키려고 서로 싸우며 공격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런 삶과 죽음의 본능들은 서로 중화를 이루기도 하고, 대체되기도 한다.(용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