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극도로 위험한' 대한민국에서 살아남는 방법

위험 계급화에 대한 시민적 성찰

2014-04-23     진달래 청년녹색당 운영위원장
세월호2.JPG
 
 2014년 4월 16일, 476명의 인명을 싣고 인천항에서 제주를 향해 출발한 ‘세월호’가 제주에 거의 다 도착한 진도의 군도 앞에서 좌초,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해당 사고로 인하여 약 300여명이 실종되고, 170여명만이 구조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실종자는 사망자로 바뀌어갔다. 약 1,000명을 태울 수 있는 구명정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 중의 단 하나도 작동하지 않았다. 가장 빠르게 경찰 헬기를 통해 구조된 것은 선장을 비롯한 선박직 승무원들이었다. 일반 탑승자들이 3,4층에 있을 때 그들은 배의 가장 아래인 1,2층에서 사고가 났다는 상황을 공유한 뒤 가장 빠르게 구조되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방송한 내용은 곧 구조될 테니 현재 있는 곳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과, 오랜만에 제주로 여행을 떠난 100여명의 인천 시민들을 비롯한 승객들은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3,4층 객실 안에서 가만히 구조자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몇몇 사무직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이 선실에 머문 채로 배는 먼저 침몰해 버렸다. 정부와 언론은 승무원들이 구조될 때 탑승자들이 전원 구조되었다고 오보를 하였으며, 침몰하는 과정을 전부 방송 카메라가 촬영하던 동안 그들은 물 속에 빠져 죽어갔다.
 
“특별재난국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재난이 일어난 지역을 ‘특별재난구역’으로 선포할 수 있다면, 한국은 아마 ‘특별재난국가’로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재난이 많이 일어나는 것과 사상자가 많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교통사고, 폭발, 산업재해, 해상사고, 건설사고 등의 사고에서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동 대처가 미흡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한국의 빈번한 집단 사망 참사는 단순히 우발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다. 높은 교통사고율은 빠른 속도가 허용되는 자동차 도로가 주거지 가까이 있다는 점에 어느 정도 기인하며, 높은 자살률은 사람들을 구분하고 경쟁시키는 사회 분위기 및 인명경시 문화, 높은 인구밀도와 관계가 있다. 신체 건강한 남성이라면 어린 나이에 군대에서 2년간 다양하지만 상당한 위험에 노출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익히 알듯이 한국전쟁, 보도연맹 학살, 대추리 학살,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5.18 항쟁 등을 비롯한 정치적 학살도 역사를 통해 시시때때로 곳곳에서 끊임없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이런 참사들이 일어나기 전에 수없이 발화되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말은 사고의 조짐이 보였을 때에 관리주체와 감독주체가 하는 말들이며, 그것은 ‘무너져서 누군가 죽을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1960년부터 지속된 압축적인 발전 기간 동안 ‘노동을 통한 분배’와 ‘가족 제도’는 가장 최소한의 복지 체제였다. 그것은 그저 ‘노동력으로서의 삶의 유지’에만 초점을 맞춰 왔다. 한국은 빠르게 인구가 증가함과 동시에 (특히 수도권의) 인구 과밀 문제를 겪게 되었고, 그것은 노동 현장에서의 인명 경시, 장애인/여성/성 소수자/어린이 등의 인권 무시 등 사람들에 대한 경제/사회/정치적 계급화와 라벨링을 통해 시민권을 차등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단순한 인구 과밀 문제로 여겨지기도 하는 이 문제들은, 생각보다 복잡하게 사회 구조를 이루면서 한 국가 내의 국민들의 공간을 확보한다. 이것은 결코 ‘누가 더 잘 사는가’의 지위 차등화가 아니다. 그것은 ‘누가 더 위험하며, 누가 덜 위험한가’를 나누는 ‘위험 지위’이다. 이런 국가에서 자신이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인 ‘집’ 혹은 ‘가게’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권력이며 복지 수단이고, 안전한 공간의 확보가 된다. 그것은 매우 가치있기 때문에 임대료  혹은 구매가에 덧붙여 ‘권리금’이 오가며, 독점권과 안전권을 위협하는, ‘공간 점유권’을 갖지 않는 노점상과 노숙인은 엄격히 제거의 대상이 된다. 청년과 노년층 등 잉여노동력의 임금은 최저임금선에 머물며, ‘건강하기 때문에’ 혹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더 낮은 위험지위에 속하게 된다.
 
조금 덜 위험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국 사회
 
 이렇게 좀 더 낮은 곳으로 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사회는 집단적인 우울증과 함께 마찰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게 되며 관용이 머물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젊은 층들은 자신의 위험을 낮추기 위해, 그리고 낮은 위험지위에 후세대가 노출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출산하지 않기’를 자신의 삶을 지키는 기제로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인구 수가 줄어들면 현재와 같은 기득권을 가질 수 있는 국가 구조가 무너질 것이라 예상하는 기득권층은 별 것 아닌 유인책을 내놓으며 ‘출산’과 ‘육아’, 그리고 여성들로 하여금 ‘직장 복귀’를 통한 값싼 노동력 풀의 유지를 위하여 그들이 ‘낮은 위험지위’에 머물기를 요구한다. ‘노동력’ 혹은 ‘출산 기계’로 여겨지고 ‘경쟁’을 통한 ‘경쟁력의 표명’을 요구받는 젋은이들은 실력을 지녀야 한다는 ‘강박’과 원하는 만큼 달성할 수 없다는 ‘우울’, 그리고 승자도 패자도 정신적/신체적인 피로라는 심각한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삶의 위험은 쉽게 측정되며 그것은 보험금의 양으로 전가된다. 그렇게  지금까지 국민들의 삶은 ‘더 나은 삶’을 향한 ‘평범한 삶’에서의 노력이 아니라, ‘더 위험한 상태’와 ‘덜 위험한 상태’ 들의 간극에서 그저 ‘덜 위험한 상태’로 사투를 벌여 온 과정이다. 그것은 위험을 없애지 못하고 그저 회피하거나, 다른 수단으로 전가하는 것이다.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국민들이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은, 그저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슬픔만이 아니라,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던 ‘위험 지위’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지금까지 돈의 소유로 계급지어지고 규정될 수 있는 ‘부’의 지위가, 금융위기, 인플레이션과 통화 정책을 통해 흔들릴 수 있고, 집의 소유로 규정될 수 있는 지위가 부동산 정책과 개발 사업으로 흔들려 왔던 것과 같다. 지금 현재 사람들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사투에 공감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이 지켜 왔던 ‘위험 지위’가 흔들림을 경험하고 있다. ‘규칙을 지키면, 위험한 곳에 가지 않으면, 돈이 많으면, 건강하면, 지시에 잘 따르면’ 안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위험 지위’가 ‘선생님들을 믿고 떠난 수학여행에서’ 혹은 ‘초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떠난 환갑 기념여행에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탈출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들마저’ ‘지시에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티비에 나올 정도로 믿음직하게 운항해 온 선장이 먼저 탈출해버려서’ 몰살당한 현재 상황 속에서 자신의 ‘위험 지위’가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론에서 위험에 대한 대응의 근대적 단계인 분노, 혹은 후기근대적인 대응인 허무주의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극도로 위험한’ 나라인 한국은 죽음의 위협을 사형제의 존치 뿐만 아니라 공익 캠페인부터 모든 곳에서 국민 통치에 효과적으로 사용해 왔다. 국민들은 결코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통제의 대상이었으며, 그것은 이번 세월호 사건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대책본부와 구조진행에 지쳐 실종자 가족들이 청와대에 민원을 넣겠다고 나섰을 때 그들을 막아선 사복경찰들과 경찰 버스들이 재확인시켜 준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그들을 만나러 갈 수는 있지만 그들이 주체적으로 찾아가는 것은 거부당한다. 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정치인들은 각종 선거 일정을 취소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이 사건에서 정치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을지 물밑에서 끝없이 회의하고 미뤄진 선거 일정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을 정비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가 만들어낸 위험 회피와 전가의 굴레를 넘어설 방법
 
 이 끝없는 위험 사회 속, 도피수단으로서의 위험 회피와 위험 전가의 굴레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현재의 국가적 테제를 전환시키기 위한 국민들, 혹은 시민들의 가장 적절한 전략은 무엇일까? 필자가 제시하는 해답은 바로 지금까지 경시해 왔던 타인의 삶과 생존에 대한 시민적 성찰의 시작이다.  아마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안산에 단원고가 어디 있는지도, 인천과 제주를 오가는 세월호라는 배가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몰랐던 이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충격을 준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무의식중에 우리가 내면화하고 사회 규칙으로 설정한 위험 계급이다. 우리가 위험을 차등하고 계급을 나누는 우리 삶의 전제들에 문제가 있음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은 울리히 벡이 제시하는 위험에 대한 대응의 세 번째 단계인 ‘변형’을 일으킨다. 위험은 여전히 거기에 있지만, 우리는 현재의 위험 지위를 시민의식과 합의를 통해 다시 배분함을 통해서 위험의 영향력을 재설정할 수 있다. 현재 우리를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차등된 위험 지위 자체를 내려놓고, 경제사회적 조건에 따른 개인별 위험의 차등을 당연한 것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것으로, 경제적으로 보면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비정규직이 되는’ 규칙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것은 ‘열심히 사는 내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적용되는’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나를 중심으로 위와 아래를 나누어 계급을 짓고, 결국 정치/사회/경제/물리적 위험을 차등적으로 분배하도록 우리 모두에게 내면화된 기제들이다. 누가 우리 주변에서 어떤 형태로 살든, 어떤 노동을 하거나 하지 않든, 혹은 노동을 할 수 있거나 없든, 그들이 그들 그 자체로 그저 우리가 모르는 채로라도 그 자리에 평온하게 있어 주는 것은, 그들이 슬픈 삶을 아프게 마무리하는 것보다 분명히, 명백하게 우리 스스로에게 도움이 더 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지구적 의식’이 된다. 길의 고양이와 강아지들이 굶지 않고 길거리의 음식쓰레기통을 풀지 않으며, 초고압 송전탑에 새들이 죽지 않고 철새들은 갯벌에서 쉬어 가며, 내가 모르는 곳에서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폭력을 겪지 않고, 내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바다 속에서 다랑어가 남획의 위험 없는 삶을 살고 무명의 열대 우림이 번창하는 것은, 사실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되는 바가 전혀 없더라도 그렇지 않을 때보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편안하게 한다.
 
타자의 평온이 바로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
 
 이제 슬픔과 분노,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자.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는 살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지구적 시민의식의 단계로 나가가야 한다. 책임자 처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다. 행복하기 위해서, 안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닌 주변이 안전하고 행복해야 하며, 그러려면 타자의 삶을, 혹은 내가 아닌 모든 것들을 자신의 이익에 관계없이 긍정해야 한다. 사실은 똑같은 이야기를 종교를 막론하고 세계의 모든 선지자들이 해 왔다.  우리는 이제 이 깨달음을 앞으로의 의사결정과 시민 행동에서 중심적인 테제로서 가지고 가야 한다. 전환은 가장 작은 곳에서부터 조용하게 일어난다. 결국 이 한국을 이루는 것은 80%의 평범한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어쩌면 그래서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덜 위험하기 위한’ 발버둥보다 ‘위험 분배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세상을 위한’ 생각과 노력을 만들어내자. 더 아프지 않을 세상을 꾸려갈 수 있는 용기를 갖자. 마지막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기적의 생존자들이 부디 무사 귀환하길 바란다.
 
진달래 /청년녹색당 운영위원장, 인천녹색당 운영위원, 인천시 주민참여예산 경제수도추진분과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