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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완 교수의 가족세계여행 365일] (2) 바리나시에서 느낀 행복공식

2016-05-26     서진완

서진완 인천대 교수(행정학)는 지난 2013년 1월 3일부터 2014년 1월 2일까지, 365일간의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왔다. 중·고등학생이던 두 아이와 아내까지, 온 가족이 함께 1년이란 시간을 붙어있었다. '24시간, 365일'을 꼬박 함께 여행하며 경험하고 느꼈던 감정들의 기록을 <인천in>의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알록달록한 릭샤가 거리를 가득 매우고 있다. 사진 = 서진완

1년의 여행을 위한 1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우리 가족의 긴 여행이 시작됐다. 여행의 출발은 방글라데시 다카였다. 

드디어 여행이 시작되는구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아내와 작은아이는 화장실부터 찾았다. 아뿔싸! 인천공항에 비교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화장실에선 지린내가 코를 찌르고, 사방에 모기가 웽웽거린다. 조명은 침침하고, 변기가 몇 십 년은 족히 돼 보인다. 여행의 시작을 이렇게 실감했다. 

거리로 나오니 상황은 더 열악하다. 자동차와 오토릭샤가 뒤섞여 차도와 인도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차선을 넘어오는 차들 하며 늦은 밤에도 버스 위에 태연히 앉아가는 사람들, 정차하지 않는 버스에 능숙하게 올라타는 사람들 하며, 창문을 여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매연. 

우리는 모든 창문을 닫고 볼륨을 낮춘 영상을 보는 것처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길거리 담벼락 아래 맨발로 아이들이 서 있다. 아낙네들이 진흙탕 물에 빨래를 하고, 바로 그 옆에 샤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아래에 사람들이 볼 일을 본다. 동물과 사람, 울긋불긋한 릭샤들, 그리고 끝없이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가 뒤섞여 있다. 차가 잠시 정차하자 창문으로 다가오는 아이들이 창문안을 들여다보며 손을 내민다. 빈곤이라는 추상적인 말을 이곳에서 구체적으로 목격한다. 

다카를 출발한 버스는 아침부터 밤까지 10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달렸다. 아내는 배앓이까지 경험한 탓에 너무나 힘들고 긴장된 시간이었을텐데 잘 참아주었다. 다행스럽게도 큰 탈 없이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경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걱정마세요. 제가 엄마와 동생을 잘 지키고 있을게요!" 큰 아이는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다짜고짜 여권을 보여달라는 이들을 뿌리치고 출입국관리소로 이동했다. 어둠속에서 버스회사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믿으라고 하는데, 누가 누군지 도저히 믿을 수도 없거니와, 출입국 관리소 앞에서 줄 서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큰 소리도 들린다. 

피난 온 사람들처럼 앞사람을 따라 방글라데시 쪽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보이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는 어느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다. 우리 짐을 들고 가려고 했던 사람들이 따라오며 조금 전에 배낭을 들어줬다며, 팁을 달라고 한다.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배낭의 일부를 그 사람들이 들고, 나머지는 우리가 들고 가는 형국이었다. 그걸가지고 팁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가지고 있던 달러를 내밀자 순식간에 배낭에서 손을 떼고 사라졌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큰 아이는 내가 입국신고서 작성을 마칠 때까지 아내와 작은아이 곁에서 사방경계를 서듯 긴장한 채로 지키고 서있었다. 

출입국 수속을 모두 마치고 나자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국경을 벗어나 인도 콜카타로 가기 위한 버스를 타기까지, 같은 과정이 반복됐다. 이번에도 버스까지 가방을 운반해 주었다며 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였다. 내가 그들에게 팁을 지불 할 동안 큰아이는 짐을 확인하고 가족들의 자리를 찾아놓고 기다렸다. 드디어 버스가 출발하고 차창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웠다. 


괜찮을거란 그 말 밖에는


사진 = 서진완

콜카타에서 처리해야 할 일정이 없었기에 우리가 일정을 정하고, 한결 여유롭게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거리를 걷는 내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눈 앞에 펼쳐진 낯선 것들 모두가 우리들에게는 신선하다. 

하지만, 자유로움과 즐거움도 잠시. 인도박물관에 들어간 이후, 아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내는 방글라데시에서부터 몸살기와 배앓이를 했지만, 그런데로 잘 적응해 왔는데 콜카타로 오는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데다 맥도날드에서 먹은 햄버거와 탄산음료 때문인지 다시 배앓이가 시작됐다. 

아내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면서 화장실에 들어갔고, 그러길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 동안 아이들을 박물관 내를 둘러보고 오라고 보내고 우린 밖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아내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저녁에 바리나시로 가는 일정을 미루더라도 아내가 안정되길 기다리기로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배앓이 약이 효과가 있었다. 아내는 속이 좀 가라앉자 빨리 이곳에서 떠나자고 했다. 

아내 곁에 작은 딸을 남겨두고 나와 큰 아이가 부랴부랴 숙소로 뛰어가 짐을 챙겨왔다. 그 사이 아내는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렸는지 진이 다 빠진 얼굴이다. 

바리나시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하우라(Howrah)역 안으로 들어서자 움찔해졌다. 엄청난 규모의 역사도 그렇지만 역사 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과 수많은 걸인들 그리고 처음 맡아보는 고약한 냄새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들었던 인도의 역이다. 나를 따라 아내와 아이들은 종종 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겨, 화장실 근처에 우리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배낭을 모두 세워놓고 체인으로 연결해 묶었다. 엄마의 건강상태가 불안하다고 느낀 큰아이의 판단대로 빨리 역으로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면서 아내도 점차 안정을 찾았고, 그렇게 심하던 배앓이도 점차 나아졌다. 

무사히 바리나시에 도착했다. 밤새 기차를 타고 오면서 나는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열차 내에서 도난사고가 자주 발생한다는 말을 들은데다, 아내의 기침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때는 걱정이 앞섰다. 아내는 괜찮다고 했지만, 힘들어도 항상 웃으려고 하는 아내의 '괜찮다'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그저 바리나시에 도착하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거란 말 외엔 달리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바리나시, 이 이상 더러울 수 있을까? 

사진 = 서진완
 
바리나시는 삶과 죽음이 현실에서 함께 공존하는 곳이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곳의 무질서는 여전히 적응하기 어렵고 경적소리 또한 참기 어렵다. 미로 같은 길을 걸어 강이 내려다 보이는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갠지스강에 이르는 이 일대 모두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있고, 골목마다 오물 투성이에 때로는 소들이 길을 막고 서 있다. 아내는 이곳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밖으로 나가려하지 않았다. 죽어있는 온갖 동물, 각종 쓰레기와 오물 더미가 바닥에 널려져 있고, 뭔지도 모를 고약한 냄새가 풍기고, 그 길에 소와 개들이 다니며, 건물 위에는 원숭이들이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이곳보다 더 이상 지저분하고, 더러울 수가 없다. 

작은아이를 데리고 숙소를 나섰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장작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그리고 그 옆에 태연하게 누워있는 소들로 주변은 어지럽다. 게다가 지린내와 똥냄새, 알 수 없는 불결한 냄새가 뒤섞여 엄청나게 코를 압박했다. 아이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더러운 바닥을 밟지 않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피할 길이 없다. 너무나 더럽고 지저분하다. 

강물은 또 어떤가! 이미 인도 당국에서도 갠지스강의 수질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고민을 한 적이 있고 국제기구까지 나서서 인도의 젓줄이라는 이 강을 구하려고 노력했다는데, 우리가 바라보는 강 주변은 온통 오물과 냄새가 여전하다. 가트(Ghat)-종교적 성지이자, 생활공간이며 목욕재개를 할 수 있는 곳-로 가는 길에는 걸인들이 구걸을 하고, 사공들은 배를 타는데 좋은 조건을 제공하겠다고 다가왔다. 아이는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자고, 연신 나의 팔을 당겼다. 

바리나시의 행복공식


사진 = 서진완
 
다행이도 아내의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열악한 주변 환경이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과일도 먹고, 충분히 기운을 차린 덕분이다. 게다가 툭하면 정전이 되던 이곳에서 저녁 이후 정전없이 한동안 전력 공급이 원활했다. 갑자기 모든 면에서 풍성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 마음이 마치 배고픈 자가 하나의 사과를 얻었을 때의 기분일 것이다. 이곳 바리나시에서 바라본 행복이라는 것은 소위 '행복공식'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이었다. 소유를 욕망으로 나눈 바로 그 몫이라는 행복공식 말이다. 

파스칼도 팡세에서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소유가 많아지더라 욕망이 더욱 커져버린다면 행복은 더 적어진다. 반대로 소유가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욕망이 적으면 행복의 몫이 커지게 된다. 누구든 이 곳 바리나시에서 일정기간 머물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소유한다는 것과 욕망한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언젠가 인도여행을 하신 분의 글에서 적선을 요구하는 어린아이들의 눈빛에 대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흔히 적선을 요구하는 아이들은 불쌍한 눈빛을 보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이곳 아이들은 밝고 선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눈빛은 마치 "우리가 당신들에게 적선할 기회를 주었지만 당신들은 그 기회를 외면해 버렸다"는 듯, 적선을 하지 않은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는 눈동자였다는 것이다. 가트를 따라 가는 길 내내 당연한 듯이 손을 내미는 사람들과 적선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글이 생각났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트에서 시체를 태우는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장정 4~6명이 화려한 색깔의 천이 드리워지고, 그 위에 노란색 꽃으로 장식한 상여를 메고 골목에서 나와 우리 옆을 지나 강가에 가서 시체를 물에 담구어 씻은 후,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들은 불길 사이로 살이 타들어가고 뼈만 남은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운구를 강으로 운반해서, 강물로 시체를 씻고, 그리고 시체를 직접 태우는 그 모든 과정 동안 어느 누구도 우는 사람이 없다. 아니 흐느끼는 사람조차 찾을 수가 없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종교적인 가르침이 그들을 그렇게 행동하게 했을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Welcome to India! 꼭 한번은

델리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에어컨이 없는 열차였지만 그 정돈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아뿔싸! 내 옆 조금 남은 공간에 아주머니가 엉덩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는다. 통로쪽에 앉아 있는 나보고 안으로 더 들어가라고 손짓을 한다. 아주머니 좌석이 어디냐고 묻기도 전에 먼저 앉아버리니 어쩔 도리가 없다. 뒤이어 들어온 남편처럼 보이는 덩치가 큰 아저씨는 집사람 옆에 너무나 당연한 듯 앉았다. 아내가 놀라 뒤로 물러나자 더 편안히 자리를 잡는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인도인 친구들이 웃으며 한마디 한다. 

"Welcome to India!"


사진 = 서진완

열차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워졌다. 후드를 덮어쓰고 책에 집중하려고 했다. 온갖 냄새가 차내에 진동한다. 그나마 열차가 달리는 동안에는 바람이라도 불어서 견딜만하지만, 열차가 정차하면 화장실에서 그리고 어디서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나오는 지린내는 정말 참기 힘들다. 인도 관광청에서 발행한 포스터에 적혀있는 문구 "Incredible India!"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 인도는 믿기 힘든 곳이 맞다. 

시간은 정말 더디게 갔다. 자연스럽게 자기 좌석인 것처럼 앉았던 아주머니는 마침내 자기 무릎 위에 앉혔던 아이까지 의자에 앉게 하려고 엉덩이로 나를 밀쳤다. 바닥에 앉은 여성들은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목소리를 높여 얘기하고, 상단에 앉아있는 친구는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여행기를 통해 일반 열차칸에 대한 얘기를 많이 접했지만 상황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작은 아이는 이 사람들이 대단히 개인주의적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고 자신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한다. 큰아이는 동생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이 사람들이 개인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서로 자리를 함께 나누고 가는 것이나 아무도 그 상황에서 짜증을 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즐기는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는 공동체를 지향하지만 실은 개인적인 면이 강한데, 이 사람들은 개인적인 것 같은 측면도 있지만 오히려 공동체적인 측면이 우리보다 강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큰 아이의 시각이 흥미로웠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시각이 대견스러웠다. 

"그래도 좋았어요. 그런데 한 번 이면 족해요!", "다시 오고 싶지는 않지만, 친구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어요!" 

하루사이에 아이들의 표정도 전보다 밝아졌다. 빠하르간지에서의 생활이 어제의 열차보다는 더 행복하다는 상대성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적용된 것이다. 사람들의 만족도와 행복도라는 것이 이렇게 가변적이고 상대적이다. 

큰아이와 빠하르간지의 밤거리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위해 숙소를 나섰다. 대부분 상점들이 철시한 자리에 야식거리를 파는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늦은 먹거리를 팔고 있다. 지린내가 나는 노천화장실이 있는 자리 바로 옆에, 이 거리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치킨집이 있다. 바람이 불자 각종 휴지들이 거리를 뒤덮는다. 그 속을 릭샤꾼이 달린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변함없이 이곳을 찾는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 처럼 말이다. 

<정리 = 이미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