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피할 수 없었던 전쟁"

인하대박물관 시민강좌 '갈등과 충돌의 인천해역' 1, 2강 열려

2017-05-23     송정로 기자



 
2017년 인천시 작은박물관 지원사업으로 진행되는 인하대박물관(관장 이영호)의 시민강좌 ‘인천의 바다와 섬 바로알기: 갈등과 충돌의 인천해역’이 지난 18일 ‘병자호란, ’자초‘한 전쟁인가’(1강)을 시작으로 개강했다. 20일에는 강화도의 현장을 찾아보는 역사기행(2강)을 가졌다.
 
18일 첫 번째 강사로 나선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의 우경섭 교수는 병자호란이 과연 “자초한 전쟁인가?”라는 질문을 거꾸로 청중들에게 던졌다.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로 인식되는 병자호란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전후 처리 과정 속에서 벌어진 책임자 처벌의 문제 등을 살펴보면서, 우 교수는 병자호란에 대한 기존의 통설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흔히 병자호란 원인으로는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배척한 인조정권의 사대주의적 숭명정책, 그리고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진 심각한 국론의 분열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시대를 오로지 사대주의와 당쟁의 시대로 보는 일제 식민사관의 정체성·타율성 이론과 매우 일맥상통한 논리다. 오히려 청나라가 조선의 항복을 받은 후, 직접 통치에 나서지 않은 채 50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끌고 갔고, 또 변경지역의 야생 인삼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 등을 볼 때, 우 교수는 호란의 원인을 다양한 경제적 요인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적시했다. 아울러 소빙기(Little Ice Age)의 출현으로 농업과 목축의 어려움을 겪는 유목민들의 유일한 출구가 조선 정벌로 표출되었다는 이론 역시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논리라고도 밝혔다.
 
문제는 17세기의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병자호란이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는 데에 있다고 우 교수는 밝혔다. 불과 300만의 인구를 가진 여진족이 1억 5천 만명의 한족을 물리치고 300년 간 중원을 다스린 것은 일종의 기적과 같다고 일찍이 곽말약(郭沫若)이 말했듯이, 당시에 갑작스런 여진족의 흥기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병자호란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청나라가 자신들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경제적 필요성에 따라 일방적으로 행한 침략으로 설사 인조가 친명정책을 버리고 청과 화친했더라도 전쟁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우 교수는 말했다.
 
물론 병자호란 당시 조선정부가 효율적인 대처를 하지 못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전쟁에서 가장 큰 패착은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새라는 강화도만 믿고 육지에서의 결사항전을 애당초 포기한 것에 있었다. 인조는 무기력하게 자신의 피난처만을 찾아다닌 꼴이 되었고, 종묘의 신주와 왕실의 비빈, 그리고 원손(元孫)이 피신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45일 만에 남한산성의 농성을 풀고 나와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20일에 열린 제2강은 1637년 1월 22일, 1만 6천의 청군에 의해 불과 하루만에 무참히 짓밟혀진 강화도의 현장을 찾아보는 역사기행으로 이루어졌다. 남달우 인하대 초빙교수의 인솔 아래 인하대 교직원·재학생 및 외국인 유학생, 그리고 인천시민 등 120여 명이 참여, 강화도의 갑곶돈대, 연미정, 김상용순절비, 그리고 교동도의 교동읍성, 연산군유배지 등을 찾았다. 
 
제3강은 5월25일(목) 오후 6시30분~8시30분 인하대 60주년기념관 106호에서 '19~20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전쟁과 인천'을 주제로 서울대 규장각의 김시덕 교수가 강사로 나선다. 해양과 대륙이 맞서고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 그 중에서도 특히 인천해역이 지니고 역사적 위상 등에 대해 강의한다. 문의전화 032) 860-8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