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기득권체제를 넘어 새로운 정치지형을 향하여'

황해문화 2020년 봄호 출간

2020-03-01     인천in
 
황해문화 2020년 봄 호(통권106호)가 출간됐다.
 
이번호 특집은 ‘낡은 기득권체제를 넘어 새로운 정치지형을 향하여’다.

다가오는 4·15총선에 대한 이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의 문제점과 그 극복의 방향 혹은 방안을 전반적으로 검토했다. 특집에는 5명의 논객이 함께 했다.
 
‘스펙터클로서의 촛불집회와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의 정치과제’(이승원), ‘문재인 정부는 어디로 가고 있나’(박권일), ‘‘무의식의 담합’과 ‘의식적 갈등’의 정치‘- 수구/보수 독점의 정치구조를 넘어서’(이광일), ‘‘양대정당 카르텔은 깨질 것인가’- 선거법 개혁의 향방과 의미‘(장석준),’을들의 연대에 대하여‘(진태원) 등이다.
 
먼저 이승원의 「스펙터클로서의 촛불집회와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의 정치과제」는 현재를 지난 20여 년간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훼손된 포스트민주주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지난 2016~2017년의 촛불집회는 이러한 포스트민주주의의 문제점이 극적으로 드러난 박근혜 정권의 이른바 ‘국정농단’에 대하여 대중이 대의제 정치의 한계를 뚫고 나와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한, 국민주권의 직접실현을 상징하는 스펙터클적 사건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 스펙터클적인 사건은 다른 사회경제적 요구들의 급진적 실현으로, 즉 현실적으로는 개헌이나 국회해산, 조기 총선 등의 프로그램을 지닌 혁명적 정치변환으로 이어지는 대신 ‘탄핵’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축소되어 기성정치집단이 주도하는 탄핵과정에 주도권을 뺏기고 이 사건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결국 이후 이어진 대통령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개별적이고 사적인 유권자로 격하되고 말았다.
 
그럼으로써 촛불집회는 포스트민주주의체제를 넘어서서 대안적 질서를 모색하는 포퓰리즘정치로 발전하는 대신, 단지 더불어민주당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것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과거 6월항쟁의 결과가(더 멀리 본다면 4·19혁명의 결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산되었어야 할 반민주세력의 회생으로 이어졌듯 탄핵과 함께 청산되었어야 할 새누리당 세력을 자유한국당으로 이름만 바꿔 잔존시켜 다시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회귀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박권일의 「문재인 정부는 어디로 가고 있나」는 촛불정권을 자임하며 출범했던 문재인 정권이 스스로 그 발전적 계승자를 자처했던 과거 노무현 정권에 비해서도 후퇴한 정권인가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글이다.
 
우선 문재인 정권은 재벌개혁이라는 시민적 여망과는 달리,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에 깊이 연루된 삼성과 지속적인 유착관계를 가질 뿐만 아니라 ‘산업기술보호법’ 제정이나 은산분리원칙의 후퇴 등 친재벌적 행보를 계속한다,
 
둘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약속은 용두사미가 되고 ‘죽음의 외주화’에 대해서도 미온적 대응으로 일관하는 등 노동존중이라는 애초의 입장에서 현저하게 후퇴하는 한편, 데이터 3법, 바이오헬스 핵심규제 개선방안, 혁신의료기술 정책 등 기업 성장을 위해 국민의 사생활과 건강까지도 심각하게 제약하는 친자본적 정책을 펼친다.
 
셋째, 무엇보다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장기적 청사진이 없이 오로지 절대악인 반대편에 대한 반대에만 매몰된 ‘반정립의 정치신학’에 집착하여 생각이 다른 시민들을 설득하는 노력 대신 확증편향과 집단사고적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이 비판의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회적 약자들과의 소통에 무신경한, 독선과 불통 때문에 이 정권은 노무현 정권보다 악화된 정권이라는 주장이다.
 
이광일의 「‘무의식의 담합’과 ‘의식적 갈등’의 정치 - 수구/보수 독점의 정치구조를 넘어서」는 현재 한국의 기본적 정치지형인 수구(자유한국당)-보수(더불어민주당) 독점구조의 본질을 서로 의식적으로는 갈등(하는 척)하면서 무의식적으로는 담합하는(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파악한다.
 
그 이유는 먼저 그들이 비단 현재만이 아니라 4·19혁명 이후 역사적으로 ‘재벌·자본 사랑’이라는 친자본적 유전자를 나누어 가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권이 촛불 주체들의 여망에 반하여 친 ‘삼성’행보를 계속하고 대신 생명·안전업무 외주화 금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최저임금 1만원 실현, 주 52시간 노동 엄수 등 집권 초기의 약속들에 대한 방기는 이미 예견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적폐청산이라는 구호로 수구세력과 날카롭게 적대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집권을 위한 구호였을 뿐, 정작 그들이 원하는 것은 ‘수구-보수 독점의 정치’를 ‘보수-수구 독점의 정치’로 변화시키는 것, 즉 민주당 세력의 집권에 불과한 것이며 사실상 진정한 적폐는 ‘수구적폐’가 아니라 ‘수구-보수 독점의 정치구조’이자 이것을 재생산해 온 세력(들)이라는 것이다.
 
또 민주당세력이 자신들을 ‘진보’로 자처하거나 그렇게 불리는 것을 즐기는 것은 사실상 자신들의 보수적 정체성과 그 ‘적폐성’을 은폐하는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상 세 편의 글이 촛불항쟁 이후 현재의 한국정치 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이라면 나머지 두 글은 이번 총선과 연관된 대안적 탐색의 글이다.
 
장석준의 「양대정당 카르텔은 깨질 것인가 –선거법 개혁의 향방과 의미」는 지난 해 12월27일 국회를 통과한 개정된 공직선거법이 과연 이번 총선에서 어떤 유의미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인가를 주제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애초에 정당투표 득표에 비례해 국회 의석 전체를 배분하는 독일형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전면도입을 목표로 추진된 이번 선거법 개정은 자유한국당의 전면 반대와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강력한 변형 요구로 비례의석을 100%가 아닌 50%만 보장하는 ‘준연동형 비레대표제’로 변질로었다.
 
 그나마도 전체 비례대표 의석 47석 가운데 30석에만 비례대표제에 따른 의석으로 배정하고, 나머지 17석은 정당투표 득표에 따라 할당한다는 매우 복잡하고도 왜곡된 일종의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퇴색되고 말았다.
 
이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정 공직선거법이 촛불항쟁이 낳은 양당 카르텔체제의 일시적 해체와 다당제 구도의 산물이라는 점, 그리고 비록 제한적이나마 이를 통해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요구가 수렴될 수 있는 통로가 형성될 수 있고, 그것은 한국사회의 역동성에 걸맞은 정치적 다양성의 실현에 한발 더 다가가 촛불정신의 실현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진태원의 「을들의 연대에 대하여」는 정치철학자로서의 그의 작업 가설 혹은 화두인 ‘을의 민주주의’론을 기초로 촛불항쟁 이후의 한국정치의 현실과 향방을 진단하고 있다.
 
이 글은 이를 위해 ‘보편성’, ‘주체화’, 그리고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보조 개념들을 동원하는데 지난 ‘촛불시민혁명’에서 보여준 ‘을들의 연대’는 단지 탄핵 혹은 국민주권 실현 같은 특정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적 연대가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 사회에 미만한 ‘갑을관계’의 청산이라는 공동체의 질적 변화라는 ‘보편성’을 전제하는 연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혁명에 참여한 주체들은 다음 투쟁 단계를 위해 소모되는 일회성 주체가 아니라, 그 자체 ‘민중적 요구’ 혹은 ‘민중적 주체성’을 구현하는 독자적 주체, 즉 라클라우가 말하는 ‘좌파 포퓰리즘의 주체’였고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집권 이후 문재인 정부가 선포한 ‘국민주권시대’라는 구호는 친재벌적 성장 추종, 비정규노동자 배제, 차별금지법 지연 등 실제의 정책기조들을 통해 그 ‘국민’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와 다양성을 배제하는, 그로 인해 촛불혁명의 대의를 왜곡 축소하는 구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상정하고 있는 ‘을’이란 광범한 수준에서의 피통치자, 피지배자, 피억압자들이며, 나아가 보편의 잔여, 또는 보편에서 배제되는 이들이고, 누군가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희생되고 주변화되어야 하는, 누군가의 권리 쟁취를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이들이다.
 
한편 이번 호 비평란에는 TV칼럼니스트로서 연예 문화 방면의 사건과 이슈들에 정확한 메스를 들이대온 이승한의 글 「김용균부터 설리까지, 죽음의 구조」가 실린다.
 
이 글은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산업재해로 인한 죽음과 이른바 연예계 ‘셀러브리티’였던 배우이자 가수였던 설리(최진리)의 죽음을 산업계이든 연예계이든 철저히 반노동자적 착취구조에 의한 타살로 규정하고, 한국사회가 노동자들의 삶을 어떻게 수탈하며, 심지어 죽음까지 어떤 식으로 소비하고 타자화하는지를 보여주는 날카로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