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노(喜怒)는 기(氣)의 발로' - 소남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 주목해야

[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2) 소남학의 자리에 대한 모색

2021-01-26     송성섭
인천의 잊혀진 실학자, 소남(邵南) 윤동규(1695~1773) 탄생 325주년를 맞아 지난 12월 30일 인천 남동문화원이 기념사업준비위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연구사업에 들어갔습니다. [인천in]은 남동문화원의 소남 연구사업을 지난해 12월 [소남 윤동규를 조명한다]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특집기사로 소개했습니다. 이어 새해에는 소남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새해 특집기사는 남동문화원 소남 연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송성섭 박사(동양철학)가 집필을 맡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소남선생유집초

정체성이란 자리잡기이다. 시대마다 절박하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자리잡는가에 따라 좌표가 정해지고, 이러한 좌표들의 목록에 의해 정체성이 부여되며, 좌표들의 계보에 의해 학파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소남 윤동규 선생은 그 시대의 현안들에 대해 어디에 자리를 잡았을까?

순암 안정복이 쓴 소남 선생의 행장에 의하면, 선생은 『태현경(太玄經)』을 한 번 보고서 환히 알고 그 취지를 설명할 정도였다고 한다. 소남의 스승인 성호 이익은 궁리지학(窮理之學)의 경우, 당대에 소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고 평하였다.

『태현경(太玄經)』은 양웅(楊雄)의 저작이다. 양웅이 살았던 전한 말기 ~ 후한 초기는 각종 경전을 점성술적, 신비적, 예언적을 해석하는 소위 참위(讖緯)가 극성을 이루던 시대였다. 아울러 황제와 노자(老子)를 추숭하는 이른바 황로학(黃老學)이 횡행하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양웅은 경(經)으로는 『역』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고 여겨 『태현(太玄)』을 지었고, 전(傳)으로는 『논어』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고 여겨 『법언(法言)』을 지었다. 양웅은 도(道)에 들어가는 문은 바로 공자(孔子)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또한 노자의 도덕에 관한 사상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양웅은 고려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공자의 사당에서 석전(釋奠)의 예를 행할 때, 배향하는 명단에 포함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양웅이 중국 최초의 왕위 찬탈로 평가받는 왕망의 신(新) 왕조에서 대부를 지낸 사실 때문에, 주자(朱子)로부터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의해 조선 태종 때부터 제사의 명단에서 양웅을 배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주를 사람이 보지 못하는 막히고 가려진 곳에 묻어버렸다. 또한 영조(英祖)도 양웅에 대하여 “그의 심사(心事)뿐만 아니라 마음과 행적도 모두 옳지 않다.”고 평한 적이 있는데, 소남 선생이 양웅의 『태현경(太玄經)』을 공부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또한 소남 행장에 따르면, 선생은 주염계(周濂溪)와 정명도(程明道)의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주염계(周濂溪)는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를 지어 송명 도학(道學)의 시초를 연 사람이다. 정명도는 동생 정이천과 함께 부친의 명에 따라 주염계에게 배웠는데, 주염계가 공자와 안자가 즐거워한 곳에서 배운 것이 무엇인가를 묻자, 정명도는 “주무숙(염계)을 다시 뵙고 나서부터 바람과 달을 읊고 노닐며 돌아왔다. 나는 증점과 함께 하겠다는 뜻이 있었다.”고 답하였다.

증점은 공자의 제자이다. 공자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누군가가 자네들을 알아준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이에 자로는 백성들을 용맹스럽게 만들어 군사 강국을 만들어 보겠다고 하고, 염구는 재정적으로 풍족한 부유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답했으며, 공서화는 예를 돕는 소상(小相)이 되겠다고 하였다. 공자가 증점에게 묻자, 증점은 연주하고 있었던 비파를 밀어 젖히면서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갓 쓴 이 대여섯 사람과 동자 예닐곱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다가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답하였는데, 공자는 감탄하면서 증점과 함께 하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소남 선생에게도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와 같은 기상이 있었다는 것인가? 소남 선생은 처음에는 과거 시험 공부를 하였지만 이내 그만두고 학업에 전념하여, 세간에 공부 이외에 다른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를 몰랐다고 한다. 선생은 만년에 용산의 옛 마을에 다시 살았던 적이 있다. 마을 앞에 큰 강이 흘러 강산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선생이 때로는 지팡이를 짚고 거닐기도 하여, 무우단(舞雩壇)에 바람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는 뜻을 가졌고, 수레와 사람이 복잡한 시장거리에 살면서도 조금도 속세에 오염되지 않고, 시원한 청풍의 기상이 있었다고 행장(行狀)은 전하고 있다.

안정복이

 

성호학파는 도통(道通)에 관해서는 주자(朱子)-퇴계의 계보였다. 퇴계에 대해서는 조선의 주자라고 여기었다. 우리 나라가 생긴 이래로 학문이 훌륭하기가 퇴계(退溪)만한 이가 없다고 여기어 순암 안정복이 주도하고 소남 선생이 하교(下敎)하면서 이자수어(李子粹語)를 편찬하였다.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은 『주자어류』에서 나온 것을 퇴계 선생이 『천명도설』의 서문에 기록한 것인데, 기대승(奇大升)과 퇴계 선생은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논변하였다. 이에 학자들의 학술이 어긋나게 되는 것을 걱정하여 성호 선생이 『사칠신편』을 지었다. 그 뒤에 성호 선생의 제자인 신후담이 “공리(公理)의 희노(喜怒)는 이(理)의 발로이다.”라는 설을 제기하자, 성호 선생이 그 설을 받아들여 『사칠신편』의 발문을 다시 지으셨으니, 이것이 바로 중발(重跋)로써 「소남유고」에도 전문이 실려 있다.

공리(公理)의 희노(喜怒)란 예를 들면, 요순(堯舜) 시대에 제순(帝舜)이 노하거나, 맹자(孟子)가 기뻐한 것을 말한다. 제순(帝舜)이 통치할 때, 유묘(有苗)가 어둡고 미혹하며 불경(不敬)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어진 체하며, 도를 위배하고 덕을 파괴하여, 군자가 초야에 있고 소인이 높은 지위에 있어 무력으로 정벌하고자 했다. 그런데 제순(帝舜)이 마침내 문덕(文德)을 크게 펴시어 무무(武舞)와 문무(文舞)로 두 뜰에서 춤을 추셨는데, 70일 만에 유묘(有苗)가 와서 항복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노나라의 악정자(樂正子)는 선(善)한 말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인데, 악정자로 하여금 정사를 다스리게 하자, 맹자가 이 말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희노(喜怒)는 사사로운 인간적 정감의 발로, 즉 기(氣)의 발로가 아니라, 성리(性理)의 발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남 선생은 비록 성인의 마음이더라도 그 근본을 미루어 보면, 그 희노(喜怒)는 기(氣)의 발로라고 변론하였으며, 성호 선생이 그 변론에 수긍하여 중발(重跋)을 즉시 지워버리고 그 설을 쓰지 않았다.

그 후에 다시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가 성인의 공정한 희노(喜怒)는 이발(理發)이라는 설을 다시 주장하면서 소남 선생과 20년도 넘게 다투었으나, 선생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임종할 무렵에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사칠이기설은 『사칠신편』과 서로 뜻을 분명히 밝혀주는 것으로서, 후세에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올해부터 남동문화원이 주관하여 「소남유고」에 대한 번역 사업이 시작된다. 이제까지 봉인되었던 판도라의 상자가 드디어 해제되는 것이다. 소남 선생이 유언했던 것처럼 이제서야 비로서 선생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의 진가를 알아줄 때가 도래한 것이리라.

퇴계와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성호 선생이 「사칠신편」을 지었으며, 성호 선생의 「사칠신편」은 신후담의 문제 제기에 의해 「중발(重跋」로 수정되었다. 이후 「중발(重跋」은 소남 선생의 문제 제기에 의해 폐기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성호학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나아가 퇴계학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 자리는 바로 여기이지 않을까? 소남의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 바로 여기가 바로 소남 학문의 자리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