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의 책력(冊曆), 일기장이 되다

[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11) 삼백년 종가의 역사가 담긴 책력들 - 허경진 / 연세대 명예교수

2021-06-01     허경진
[인천in]은 잊혀진 인천의 실학자 소남 윤동규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특집 기획기사는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원재연 박사, 송성섭 박사(동양철학) 3분이 집필합니다.

 

 

예전에는 나라에서 일년치의 날짜와 연호(年號), 간지(干支), 24절기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책력(冊曆)을 만들어서 관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책력은 왕만이 만들 수 있어서, 관상감에서 천체의 움직임을 조사하고 중국 시간과의 차이를 반영하여 제작한 책력 말고는 개인이 제작할 수 없었다.

『선조실록』 24년(1591) 2월 10일 기사에 “동지사(冬至使) 정사위(鄭士偉)와 서장관 최철견(崔鐵堅)이 책력을 받아다가 바로 하인들에게 주어버리고 빈손으로 와서 복명하였으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아울러 추고하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사신이 중국에서 받아온 책력을 마음대로 친지에게 나누어주었다가 왕에게 조사를 받을 정도로 책력은 귀중한 물건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음력을 썼다고 생각하지만, 24절기는 양력이다. 음력 생일은 해마다 양력과 달라지지만, 춘분, 하지, 추분, 동지 등의 24절기는 양력으로 언제나 같은 날짜이다. 윤동규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력은 대부분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적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하여 만든 시헌서(時憲書)이다. 서양 신부 탕약망(湯若望 요한 아담 샬 폰 벨) 등이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편찬하여 청나라에서 사용되었던 역법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1653년(효종 4)부터 조선 말까지 이를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수정 계산하여 사용하였다.

윤동규 종가에 소장된 책력은 명칭부터가 조선후기의 시헌서(時憲書)에서 대한제국의 명시력(明時曆), 조선총독부의 조선민력(朝鮮民曆) 등으로 바뀌어, 국가에서 민간의 시간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기 몇 년에 해당되는 책력인지를 확인하려면 연호(年號)와 간지(干支)를 확인해야 하는데, 청나라 연호인 건륭(乾隆), 가경(嘉慶), 도광(道光), 광서(光緖), 선통(宣統)에서 대한제국 시대의 광무(光武), 일제강점기의 다이쇼(大正)와 쇼와(昭和)까지 다양한 연호가 확인된다. 대청(大淸)이라는 국호를 붙인 까닭은 청나라 표준시를 기준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다시 계산하여 관상감에서 책력을 제작하였기 때문이다.

종가에 남아 있는 30여 권의 책력 가운데 윤동규가 사용한 책력은 건륭(乾隆) 시대의 기사년(1749), 병자년(1756), 정해년(1767), 임진년(1772)년의 4권인데, 이 가운데 병자년 뒤에는 정축년(1757) 책력이, 정해년 뒤에는 을유년(1765) 책력이 덧붙어 있어서 모두 6권이 남은 셈이다. 임진년 책력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 해에 사용한 것이다.

책력은 단순히 날짜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24절기를 비롯하여 나라의 제삿날이라든가 금기일(禁忌日) 등의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날짜 아래에는 빈 칸이 길게 있었으므로 비망록처럼 간단한 일기를 쓰기도 하였다. 실제로 책력에 썼던 비망기(備忘記)를 편집하여 일기를 만드는 경우도 많다.

조선전기에는 관상감에서 책력을 적게 찍어 왕족과 상급 관원들에게만 나눠 주었으며, 후기에는 비교적 많이 찍었지만 종이값을 지급하고 받는 형식이어서 일반인들이 쉽게 구하지는 못하였다. 윤동규가 살던 시대만 하더라도 책을 파는 서점이 따로 없었다.

종이를 아끼는 많은 선비들이 그랬듯이, 소남은 책력을 본래 목적 이외에 일기장이나 공책의 용도로도 사용하였다. 날짜 아래의 빈 칸에 이따금 그날의 일상사를 적고, 접혀진 속지를 칼로 잘라서 이면지에는 다른 책의 본문을 필사하였다.

 

기사역서(1749)

 

‘기사역서(己巳曆書)’라고 표제를 쓴 1749년 책력을 예로 들면, 『대청 건륭 14년 세차 기사 시헌서(大淸乾隆十四年歲次己巳時憲書)』라는 권수제가 인쇄된 첫 페이지 옆의 공백에 사언시(四言詩) 형태의 『예기(禮記)』 〈공자한거(孔子閒居)〉를 필사해 놓았다.

“소리가 없는 음악은 기운과 뜻이 어긋나지 않고, 형체가 없는 예는 위엄과 자태가 여유로우며, 상복(喪服)이 없는 상(喪)은 안으로 인자하여 몹시 슬프다. 소리가 없는 음악은 기운과 뜻이 이미 얻어지고, 형체가 없는 예는 위엄과 자태가 엄숙하며, 상복이 없는 상은 뻗쳐서 사방의 나라에 미친다. ... 소리가 없는 음악은 기운과 뜻이 이미 일어나고, 형체가 없는 예는 뻗쳐서 사해(四海)에 미치며, 상복이 없는 상은 자손에게까지 뻗쳐간다.”

〈공자한거(孔子閒居)〉는 자하의 질문에 공자가 대답한 말인데, 자하가 ‘무복지상(無服之喪)’의 뜻을 다시 묻자 ‘모든 사람들이 상사가 있을 적에는 급히 달려가서 구원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윤동규는 1737년 2월 17일자로 인천 남촌(南村)의 도리산(道里山) 아래에 있던 최인성(崔仁性) 소유의 밭 여러 필지를 모두 71냥에 사들여서 매매문서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혼자 잘 살자고 땅을 늘린 것은 아니다. 70년 전에 증조부의 종형제 윤명신이 도남촌에서 처가인 청주 한씨들과 결성한 동계(洞契)를 1742년에 발전시켜 만신동계(晩新洞契)라는 이름으로 재결성하였다. 늦게나마 새롭게 동계를 재결성하였다는 뜻이다. 인천에서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공동체를 꿈꾸었던 윤동규가 55세 되던 기사년(1749) 첫날 아침에 이 글을 큰 글자로 써서 일년의 좌우명을 삼은 것이 아닐까? 이웃들의 애경사를 나의 애경사로 여기자는 마음가짐이 자손에게까지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다.

윤동규가 여러 해 동안 매달 책력에 적어놓은 기록들을 탈초하여 편집하면 조촐한 한 권의 일기책이 되어, 삼백년 전 인천에 살았던 양반 학자의 일상사를 소략하게나마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