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남 윤동규 천주학에 답하다

[다시 부르는 소남 윤동규] (19) 버릴 수 없는 천주학 - 송성섭 박사

2021-10-19     송성섭

 

[인천in]은 잊혀진 인천의 실학자 소남 윤동규의 삶과 업적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특집기사를 기획해 격주로 연재합니다. 특집 기획기사는 송성섭 박사(동양철학)와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가 집필합니다. 

 

답안백순

 

성호학파의 학풍은 매우 개방적이었다. 퇴계가 이단으로 몰아부쳤던 양명학에 관해서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았으며, 이로 인해 권철신이 양명학에 입문하기도 하였다. 성호학파는 특히 서양문물에 매우 호의적이어서 천문지리에 관한 한 중국이 따라갈 수 없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성호학파에게 가장 뜨거운 감자는 역시 천주학이었다.

성호는 천주학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구라파(歐羅巴)의 천주(天主)에 대한 설은 내가 믿는 바는 아니다.(星湖先生全集 卷之二十六 / 書, 答安百順 丁丑, 別紙)”라고 부정적으로 말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긍정적인 측면에서“천주(天主)와 마귀의 논설이 섞여 있는 것만이 해괴할 따름이니, 만약 그 잡설을 제거하고 명론(名論)만을 채택한다면, 바로 유가자류(儒家者流)라고 하겠다.(성호사설 제11권 / 인사문(人事門) 칠극(七克))”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천주학에 대한 성호의 입장은 《천주실의》 발문〔跋天主實義〕에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다.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天主)를 지존(至尊)으로 삼는데, 천주란 곧 유가의 상제(上帝)와 같지만 공경히 섬기고 두려워하며 믿는 것으로 말하자면 불가(佛家)의 석가(釋迦)와 같다. 천당과 지옥으로 권선징악을 삼고 널리 인도하여 구제하는 것으로 야소(耶蘇)라 하니, 야소는 서방 나라의 세상을 구원하는 자의 칭호이다. (…) 저 서양은 무슨 이치든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깊은 이치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오히려 고착된 관념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니, 안타깝다.”

 

결국 천주학에 대한 성호의 입장은 “나는 천주귀신(天主鬼神)의 설은 내쳐 버렸으나, 욕심을 줄이고 선(善)을 좋아하는 것은 받아들였네. 사물을 끌어다 비유를 하는 것은 종종 버릴 수 없는 바가 있네.(성호전집 제33권 / 서(書), 答族孫輝祖 壬申〕”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천주학에 대한 소남의 입장이 이제까지 명확하게 드러난 적은 없다. 그의 문집이 전적으로 해독되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소남문집』을 뒤적이다 다행히 천주학에 대한 글을 두 편이나 발견하였는데, 하나는 병자년(丙子年)인 1756년 8월 안백순, 즉 안정복에게 답하는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2월에 역시 안정복에게 답하는 편지이다. 1756년은 영조 32년 (英祖 三十二年)에 해당하는데, 이때는 조선 최초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사건인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년)가 일어나기 훨씬 전으로, 조선 사대부의 서가에는 이마두(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한 권 정도 꽂혀 있었던 시기였다.

병자년(丙子年) 8월 안백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소남이 괴이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천주가 모습을 드러내어 말한다는 것이다. 즉 천주가 예수의 육신으로 육화되어 설법한다는 것이 괴이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천주학은 그 요점이 고요함에 있기 때문에 윤리를 멸절하는 것이 아니며, 사물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힘쓰기 때문에 쓸모 없는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소남은 말한다.

 

   “천주는 중국 독서(讀書)에서 말하는 상제와 같아서 신령을 주재하는데, 그는 모습을 드러내어 말한다. 이것이 매우 괴이하다. 그런데 천주는 일념(一念)으로 선(善)을 향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대월상제(對越上帝)와 말뜻이 서로 부처와 같은 즉, 천지만물을 형태를 변하게 하고, 적멸돈오(寂滅頓悟)을 주로 한다. 서양학은 비록 아동의 몸으로 학문에 나아갔지만, 이 요점은 오직 고요함이니, 윤리를 끊어 없애려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광대한 천지와 미세한 사물에 이르러 격물치지함에 힘쓰는 것이니, 천주의 일삼음이 반드시 밑바닥까지 궁구하지 않음이 없어, 아마 쓸모없는 학문이라 할 수가 없다.”

 

안백순

 

그런데 안정복에게 답하는 병자년 12월의 편지에서는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8월의 편지에서도 다른 곳과 달리 「 」 등으로 지워진 부분이 있었지만, 12월의 편지에서는 일부의 글씨가 아예 먹으로 지워져 있는 것이다. 편지의 첫머리는 “論敎西洋人學術, 大既●●”로 시작되는데, 도대체 두 글자를 먹으로 지운 이유는 무엇일까?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펴낸 『邵南遺稿(소남유고)』에서는 이를‘正當’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서양인의 학술에 대해 논하여 알리자면, 대개 정당하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아마 후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있을 때, 이러한 평가가 두려워 먹물로 지운 것 같다.

이와 같은 일이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편지 안에서 두 번이나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다. “●●●懸殊, 恐亦不可●●●語”. 이러한 문장을 보면, 마치 암호를 해독하는 기분이다.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펴낸 『邵南遺稿(소남유고)』에 의하면, “邪正懸殊, 恐亦不可同曰而語”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전적으로 믿을 수 없는 노릇이어서, 향후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병자년 12월의 편지에서도 소남은 사람의 본성에 관한 논의와 천당과 지옥에 관한 설, 그리고 신이 예수의 육신으로 탄생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의문의 눈길을 보내고 있지만, 천문학의 정교함과 사물의 이치를 상세하게 연구하는 태도만큼을 결코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만약에 그 오기(五紀:一曰歲,二曰月,三曰日,四曰星辰,五曰歷數)의 정묘함과 사물의 상세함에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역시 가르침이 황망하고 잘못되었더라도 버릴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남 당시에는 서양의 학술과 천주학에 대한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부들이 중국에 들어와 포교할 때, 한편으로는 서구의 과학 문물을 소개하기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천주학에 대해 포교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인의 학술은 대체로 정당하다는 평가와 서양학은 윤리를 끊어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는 소남의 평가는 천주학의 전래 역사에서 새롭게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