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 희망 아닌 저항으로 맞서면

[인천, 영화로 읽다] ② 북경반점 : 가부장을 위한 디즈니랜드(10/29)

2021-10-29     장한섬
인천의 문화 이슈 중 영화가 요즘 화두입니다. 폐관 위기의 애관, 미림극장 살리기 시민운동에 이어 애관의 다큐멘터리 영화 '보는 것을 사랑한다'가 28일 개봉했습니다. 마침 인천영상위원회는 10월 23~29일을 ‘인천영화주간 2021’로 정하고 9편의 영화를 상영합니다. 이에 ‘인천영화’를 연구해온 장한섬 홍예문연구소 소장의 ‘인천, 영화로 읽다’를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미래한국’은 영화 [북경반점](1999)의 주제를 암시한다. 등장인물 한미래(명세빈)와 양한국(김석훈) 이름이다. 당시는 IMF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시기로, 해고와 실직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세기말 분위기와 밀레니엄 버그의 불안감이 더해지며, 대한민국 포드주의(대량생산・대량소비)에 경종을 울린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패러다임이 바뀌었지만 기존 레퍼토리 안에서 처방전을 찾는다.

 

대한민국, 공자를 위한 아침의 나라

IMF 금융위기 후 두 권의 베스트셀러는 대한민국의 응전을 대변한다. 한 권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1999)이고, 다른 한 권은 『아침형 인간』(2003)이다.

『아침형 인간』은 박정희 정권시절 국민 모닝콜 ‘새마을 노래’ (박정희 작사/박근령 작곡, 1972)의 변주다. 세상이 바뀌어도 근면과 성실로 난관을 타개하는 “닦고 칠하고 조이자”의 산업주의 메뉴얼이다. 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우상파괴다. 제목이 도발적이라 개인 구매자는 선택(소비)할 수 있지만, 기존 조직은 불가능한 선택지다. 특히, 가부장제로 작동하는 조직은 더욱 그렇다. 영화 [북경반점]은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저항과 한계를 보여주지만, 시대의 욕망과 변화의 희망을 담지 못했다.

 

현실성 없는 사장님

[북경반점] 한 사장(신구)은 원칙을 생명처럼 여기지만, 당대의 정치 지도자와 재벌 총수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부도 위기를 맞는다. 그렇다보니 영화는 현실감이 떨어진다(북경반점 사장님은 직원들 몰래 직원들 적금을 들어준다).

한 사장을 연기한 신구(1936生)는 산업화 시대의 아버지 세대를 상징하며, 당시 KBS 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1999~2009)에서 현명하고 자상한 조정위원회 위원장을 맡는다. 이러한 배역(인자한 아버지상)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시대의 욕망과 연기자의 표상이 맞아야 한다.

권위주의 정권과 산업화 시절 배우 최불암은 MBC 드라마 <수사반장>(1971~1989)과 <전원일기>(1980~2002)에서 도시의 수사반장과 양촌리 김 회장 역을 맡는다. 즉, 도시에서는 범죄와 싸우는 수사관이고, 농촌에서는 효심과 덕망 높은 마을 지도자이다. 그러다 전두환 정권(1980~1988)이 물러나자 <수사반장>은 막을 내리고, 대한민국 도시화율이 90%에 육박한 2000년대에는 <전원일기>도 막을 내린다.

1990년대 초 신세대 등장과 아버지상의 변화가 일어나자 시청률 64.9%(미디어 서비스 코리아 기준)을 기록한 드라마 <사랑의 뭐길래>(1991~1992)의 대발이 아버지(이순재)는 수사반장의 규율과 농촌 이장님의 덕망을 장착하고 서울 중산층 가정 내에서 가부장의 권위를 유지하나 1997년 IMF 금융위기 후 대한민국 이혼율이 급증한다(1998년 영화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은 가정주부가 남편을 혹사시킨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하는 내용이다. 이는 산업자본주의의 권력 상실을 의미한다).

당시의 변화는 대발이 아버지처럼 독단적으로 명령하는 가장 대신 대화와 타협을 이끌 줄 아는 가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서 배우 신구는 하소연을 듣고 중재와 화해를 권하는 조정 위원장으로 등장한다. 이런 이미지로 배우 신구는 영화 [북경반점]에 사장님으로 출연하고, 영화 포스터는 한 사장을 중심으로 나머지 출연진이 병풍처럼 한사장 뒤에 서 있다(당시는 김대중 정권 시절이다).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 속 삼국지

영화 [북경반점]에는 세 업체와 사장이 등장한다. 원칙과 장인정신으로 전통을 지키는 북경반점 한 사장. 세상을 전쟁터로 정의하고 생존과 전술에 집착하고 “6.25도 겪고, 월남전까지 겪은 놈이야”를 외치며 조선일보를 읽는 안동장 사장. 짜장면 맛보다 마케팅과 화려한 볼거리로 주변 중국집 포획을 계획하는 만리장성 사장.

1990년대 말 IMF 금융위기와 맞물려 대형마트와 멀티플렉스 등장으로 기존 지역경제는 쇠락하고, 2000년대 새해 인사는 “부자되세요”로 바뀌며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시대가 열린다.

영화에서는 시장의 변화가 아니라 시장 자체가 정글의 법칙으로 작동하며 새로 개업한 만리장성은 상도덕보다 새로운 경영기법을 구사한다. 맛과 정성보다 자본력을 바탕으로 마케팅과 볼거리 그리고 경쟁사 죽이기(북경반점 주방장을 스카우트)를 한다. 반면, 안동장은 경쟁업체(홍콩반점) 그릇을 훔쳐오고 세트요리(안동장 스폐샬) 덤핑과 요구르트를 덤으로 주는 전술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애쓴다(안동장 배달직원은 독일군 철모를 쓰고 배달하면서 다른 중국집 배달직원을 적대시 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북경반점은 옛날 짜장을 고수하다 시대의 입맛을 따라잡지 못하자 주방장(명계남)은 캐러멜과 조미료로 (몰래) 맛을 내다 한 사장과 싸운 후 북경반점을 떠나고(만리장성으로 스카우트된다), 한 사장은 충격을 받고 쓰러진다.

세 업체 사장들 내면에는 반공주의의 적대와 산업(자본)주의의 독점 그리고 가부장제의 권위가 자리 잡았다. 그중 북경반점 한사장의 합리적 권위는 (권력과 달리) 50년이라는 세월동안 한결같은 성실성과 책임감 그리고 맛에 대한 장인정신으로 스스로 쌓아 올린 것이다(딸의 증언에 의하면 아내 장례식 날에도 장사를 했다). 한 사장은 도박 빚으로 쫓겨난 옛 주방장(기주봉)을 박대하지 않고, 이윤보다 맛을 지키고자 장거리 배달 주문도 사양한다. 문제는 [북경반점] 개봉 당시 한보철강, 삼미그룹, 대우그룹 등 대기업의 부도와 파산 그리고 연계된 하청기업의 폐업과 종업원들 실업이 줄을 이었다. 존경이 아닌 생존이 시급한 상황이었음에도 북경반점 한 사장은 원칙과 전통 이외에는 혼란을 뚫고 나아갈 이렇다 할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쓰러지며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 된다. 즉, 탈산업화시대의 도래는 산업화 세대의 한계를 보여준다.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북경반점]은 위기 타개책으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배치한다. 북경반점 입구 오른쪽에는 ‘콜라독립815’ 자동판매기가 있다. 뿔뿔이 흩어진 직원들이 북경반점 재건을 위해서 다시 모이자 배달직원 창원(김중기)은 이렇게 말한다. “나라 잃은 설움을 너희들은 모를 거다. 삼일절하고 광복절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배달직원 창원은 북경반점을 떠나 동종업계 안동장에 재취업하나 기존 배달 직원에게 포로 취급당한다. 독일군 철모를 쓴 기존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포로들은 인간 취급하면 안된다니까.”

이렇듯 영화 속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는 국가와 민족이 구성원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개인은 전체를 위해서 단결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그렇지 않으면 전쟁포로가 된다). 이는 우리 편은 좋은 편이고 선이지만, 다른 편은 나쁜 편이고 악이라는 혐오와 증오의 정치로 작동하는 반공주의로 귀결된다. 북경반점 폐업 소식을 듣고 안동장 배달직원과 사장은 슬퍼하거나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안동장 직원이 우리도 “북경반점 꼴 나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안동장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베트남 융단폭격에서도 살아남은 나야. 왜 이래.” 영화는 관객을 생존 본능만 작동하는 전쟁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중국에서

 

죽은 공자의 사회, 대한민국

영화 [북경반점]은 주류사회의 권위 실추를 만회하려고 딸의 순종과 아들 같은 후계자 양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짜장면 먹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이태리 레스토랑 매니저” 한미래는 아버지 한 사장이 쓰러지자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며 짜장면을 먹은 후 레스토랑을 그만두고 북경반점 매니저로 일한다. 그리고 북경반점이 재기하고 분점 문의가 오자 한미래는 직원들 앞에서 “우리 북경반점의 분점을 내고 싶어 하는 투자자의 전화가 왔어요. 하지만 거절했어요. 그동안 아버지께서 지켜 오신 건 대량생산을 해서 돈을 벌자는 것은 아니었잖아요.” 종업원들이 모두 동의하게 만든다.

양한국은 떠난 직원들을 다시 규합하고 시대변화에 맞는 맛을 개발하면서 위기에 빠진 북경반점을 재건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한 사장의 선견지명(딸도 모르는 곳에 춘장을 숙성시키는 대규모 농장 운영)으로 신자유주의의 마케팅과 전략 없는 생존전술의 한계를 극복한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로 IMF 금융위기에 대처하지 못한 서울공화국 수뇌부(아버지들)의 판타지다.

 

 

[북경반점] 영문 제목은 [The Great Chef](위대한 요리사)다.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리는 제목이지만 당대의 모순과 미래의 비전을 그려내지 못했다. 대신 북경반점에서 불을 다루며 제다이 훈련을 마친 양한국은 다시 중국으로 떠난다. 이소룡처럼. 그리고 한 사장 딸 한미래는 중국으로 떠난 양한국을 그리워하며 준비된 현모양처를 보여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북경반점]은 인천이 아닌 대한민국 수도에서 제작되어 당대의 부조리를 그렸어야 할 영화(“바쁠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사장님 말씀 몰라?”)였으나 주변부 디즈니랜드로 설정하면서 서울과 인천 모두에게 외면 받는다. 이유는 가난한 중국에서 온 중국교포 양한국을 가르쳐 수출하듯, (문화혁명으로 중국에도 없는) 공자의 사회에서 정체성과 자부심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고, 조직의 문제를 조직 스스로 진단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외부의 메시아가 구원해주는 세계관을 재생산했기 때문이다.

 

인천, 영화로 읽다 (연재 순서)

① 들어가는 말 : 인천 없는 인천영화제(10/22)

② 북경반점 : 가부장을 위한 디즈니랜드(10/29)

③ 파이란 : 인천바다의 탁함과 동해바다의 색조(11/5)

④ 고양이를 부탁해 : 인천여상 소녀들의 표류기(11/12)

⑤ 슈퍼스타 감사용 : 함께 시작할 줄 아는 용기(11/19)

⑥ 천하장사 마돈나 : 프로씨름단 해체기와 노동자 아버지의 소멸(11/26)

⑦ 차이나타운 : 신자유주의 속 가족의 재편(12/3)

⑧ 인천상륙작전 : 반공주의의 (재)생산기지 인천(12/10)

⑨ 오늘도 평화로운 : 장소의 재발견과 일상의 재미(12/17)

⑩ 맺음말 : 인천, 영화롭다(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