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의 도가니탕'이 불편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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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의 도가니탕'이 불편한 이유
  • 이영주
  • 승인 2011.10.1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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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이영주 /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 '도가니' 중 한 장면

영화 '도가니'가 개봉한 지 한 달이 다 돼가지만 그 열기는 식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영화의 소재가 된 실제 사건에 대한 분노의 도가니가 펄펄 끓는다.

영화의 모델이었던 광주인화학교는 관객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국정감사장에선 교육당국의 미온적 대처와 사법부 판결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경찰은 재수사에 나섰다. 광주광역시는 지난 4일 사회복지법인 우석에 대해 설립 허가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정치권에서는 사회복지사업법(일명 '도가니 방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영화 한 편이 정치권과 행정당국을 압박했고, 미온적이든 '눈 가리고 아웅'이든 어쨌든 반응이 있다. 그야말로 '도가니'의 도가니탕이다.

영화 한 편이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니, 이렇게 많은 관객들이 장애인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공분을 할 수 있다니, 그것이 단순한 공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 법과 제도를 바꾸는 압력으로 변화할 수 있다니, 놀랍기 그지 없다.

그러나 도가니의 도가니탕을 지켜보는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지금의 거센 분노가 과연 제2, 제3의 광주인화학교가 나오지 않도록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유영철, 강호순 등 연쇄성폭력살인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분노의 여론은 도가니만큼이나 들끓었으나 여전히 대한민국은 '성폭력공화국'이다. 배우 최진실의 사망 후 부계혈통 중심의 친권질서를 바꾸는 '최진실법'이 발의되었으나 부계 중심의 친권은 여전히 그 위용을 떨치고 있다. 분노의 도가니가 바꿀 수 없는 여전한 현실 앞에서 지금 끓고 있는 '도가니의 도가니탕' 역시 한순간 반짝 끓어 넘치다 수그러들 '한때의 유행'에 그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분노만으로 바뀌지 않는 현실

영화 도가니는 관객들에게 '분노'라는 공통의 감정을 일으켰다. 그러한 공분 앞에서 대통령을 위시한 모든 정치인들이 영화 도가니를 보지 않으면 말도 꺼낼 수 없을 지경으로 되었고, 바로 전 정권 하에서는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사학법 개정에 반대했던 국회의원들이 입장을 선회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관객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입장과 이해관계를 떠나 모두가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분노'는 분노의 대상이 모호하다는 맹점을 갖고 있다. 네티즌들은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와 도가니의 가해 당사자 신상을 털고 그들을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표하는 가운데, 사건수사를 책임져야 하는 경찰청장 역시 이 영화를 보고 "충격적"이라고 말하고 대통령도 "국민들의 의식개혁이 시급하다"고 통탄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다들 누군가를 향해 화살을 쏘아대고 있는데, 정작 � 시위를 떠난 화살은 어디에 꽂힐지 알 수 없다. 사방에서 화살만 날아다니지 무엇 하나 맞춰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 성폭력이라는 범죄행위를 수사하고 처벌해야 하는 경찰청 수장이 마치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충격적이라고 순진하기 그지 없는 고백을 하는 것도, 대통령이 국민들의 의식개선을 운운하는 것도, 관객들이 광주인화학교 가해 당사자들에 대해 맹비난하는 것도, 광주인화학교라는 '특별히 나쁜' 학교의 '특별히 나쁜' 교사들과 직원의 '특별히 나쁜' 악행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렇듯 분노는 나쁜 결과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기제로 사용되기 쉽다.

이런 '남의 탓 분노'는 결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지금껏 수없이 많은 성폭력 사건들이 들끓는 분노 속에 잊혀져갔듯이.

폭력은 권력의 위계를 따라 작동한다

영화 도가니의 소재가 되었던 광주인화학교 폭력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폭력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 행사되고, 또 침묵 속에 갇힐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교장과 행정실장, 교사로 대표되는 어른과 학생 간 권력의 위계를 통해, 비장애인과 장애인 간 권력의 위계를 통해 폭력은 행사된다. 교사가 마음껏 통제하고 주무를 수 있는 대상으로 학생이 인식되는 공간이라면, 광주인화학교가 아니라 어느 학교에서라도 폭력은 일어날 수 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한국사회에서 광주인화학교 같은 폭력은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권력의 위계질서 안에서 작동하는 폭력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이렇게 '도가니의 도가니탕' 같은 특별한 현상이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 맞는 아내 문제가 '집안 단속하는 가장' 시선에서 봤을 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권력의 위계질서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좀처럼 '아무 일'로 드러나기 어렵다.

그래서 현실법 안에서 성폭력 사건은 '항거불능'이라는 애매한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권력의 위계 속에서 결코 항거할 수 없는 약자들을 피해자로 드러내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거기에 장애인이라는 조건과 어린이라는 조건까지 더해지면, 현실의 법과 제도가 보호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도가니'는 가능했다.

침묵의 카르텔, 그 안에 나 있다

영화 도가니를 본 관객들은 대부분 영화가 알려준 사실을 지금껏 전혀 알지 못했다는 데 괴로워했고, 학교-사학재단-관청-법조계가 만든 '침묵의 카르텔'에 분노했다.

그러나 침묵의 카르텔에 분노하기 전에 먼저 질문해야 할 게 있다. 나는 과연 그 카르텔에서 자유로운가? 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에 대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고 지내지는 않는가? 권력의 위계질서 안에서 횡행하는 폭력구조에 침묵이라는 언어로 가담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특정 악인에 대한 비난으로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분리하는 사회구조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불평등한 위계를 만든다. 어른과 아이들을 전혀 다른 계급장을 단 존재로 인식하는 교육현실은 필연적인 폭력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를 성찰하지 않는다면 장애인들을 '위한', 광주인화학교와 같은 장애인복지시설은 오히려 폭력을 정당화하고 은폐하는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하기에 '도가니'는 광주인화학교라는 '특별히 나쁜' 학교의 '특별히 나쁜' 범죄자들의 '특별히 나쁜' 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권력구조와 그 구조를 타고 흐르는 폭력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대기업의 CEO가 매값을 주고 백주대낮에 폭력을 행사해도 아무렇지 않은 사회에서 일시적인 분노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분노의 도가니에서 성찰의 도가니로

물론, 현재 영화 도가니의 흥행과 그에 따른 여러 사회현상은 지금껏 드러나지 않았던 장애인성폭력문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의 문제를 가시화했다는 것만으로도 유의미하다. 그러나 현재 들끓고 있는 분노의 도가니를 성찰의 도가니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2011년 가을을 뜨겁게 달군 도가니 열풍은 한낱 유행에 그치고 말 뿐이다. 도가니의 '엄청난' 사건만큼이나 '장애인에 대한 폭력을 다룬 영화를 정작 장애인 볼 수 없는' 일상을, 이러한 일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강자 중심의 '평온한 위계질서'를 주목할 때 비로소 도가니 열풍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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