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변화시킨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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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킨 자동차
  • 박병일
  • 승인 2011.10.24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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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일 명장의 자동차 이야기] 포드(Ford)

 
2011 포드 뉴 익스플로어

세계 제일의 자동차 회사였던 포드

자동차 100년사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져 간 회사를 모두 합하면 4천이 넘는다. 이 수많은 회사들이 내놓은 자동차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 1천만 대 이상 팔린 차는 단지 세 개뿐이다. 폴크스바겐의 딱정벌레, 도요타의 카롤라, 그리고 T형 포드가 그것이다. 지금은 제너럴 모터스, 도요타에 이어 세계 3위지만, 포드는 한때 세계 제일의 자동차 회사였다. 세계에서 제일 큰 초현대식 공장을 갖고 있어 하루에 만들어 내는 자동차 수도 가장 많았다.

미국에 자동차가 굴러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미국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차를 손꼽아 보라면 단연 포드일 것이다. 미국의 다른 자동차 회사들이 이윤이 많이 남는 고급스럽고, 화려하며, 값비싼 차만 만들고 있을 때 포드는 일반 시민들이 탈 수 있는 값싸고 튼튼한 차를 개발했던 것이다.

자동차 왕국의 황제 헨리 포드

1908년 오랜 연구 끝에 태어난 포드의 새 모델 T형 포드가 1914년까지 그야말로 불티나게 팔리면서 포드는 미국에 자동차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포드 공장이 있는 미국의 디트로이트 시에서 헨리 포드는 대통령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되었다.

자동차 왕국의 황제가 된 포드는 1915년 새해 아침을 맞아 사람들에게 엉뚱한 약속을 했다.

"여러분, 우리 포드 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T형 포드는 이제 시민의 발이 되었습니다. 나는 올해 말까지 30만 대는 문제 없이 팔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내 말이 맞는다면, 나는 올해 T형 포드를 산 모든 사람들에게 50달러를 줄 생각입니다. 전부 현금으로 말입니다."

30만대가 팔린다면 자그마치 30만 명의 사람들에게 50달러를 주겠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1천500만 달러이다.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헨리 포드의 장담은 틀리지 않았다. 그 해 말까지 총 30만 8천 대의 T형 포드가 팔렸던 것이다. 당시에 30만이라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헨리 포드는 자신의 약속을 지켜 1천 5밴만 달러가 넘는 돈을 썼다. 괜한 내기로 생돈을 썼지만, 헨리 포드는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T형 포드는 1928년 모델 A가 그 자리를 대신할 때까지 무려 1천 600만여 대를 파는 신기록을 세웠다.

보통 사람들이 좋아했던 T형 포드

"그 누구도 T형 포드를 앞지를 수 없다. 아무리 달려도 그 앞엔 또 다른 T형 포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1924년 무렵에는 약 1천만대의 T형 포드가 미국 전 도로를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미국 어느 곳에 가도 T형 포드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넓은 미국 땅에서 빠르고 편리하게 갈 수 있는 값싼 자동차는 참으로 반가운 선물이었다. 그 때만 해도 차는 부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값싸고 튼튼한 T형 포드가 나오자, 보통 서민들도 차를 가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1924년 12월 T형 포드의 값이 자동차 역사상 제일 싼 290달러까지 내렸으니,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조차 포드 한 대씩은 가지려고 애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욕실이 없는 집에 살더라도 포드 한 대씩은 꼭 갖추려 했던 것이다.

다음의 우스갯소리만 보더라도, 당시 포드가 서민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집에 욕조를 만들지, 포드를 삽니까?"

"욕조라니요? 욕조 타고 읍내에 갈 수 있습니까?"

'틴 리지'(싸구려 차)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했던 T형 포드는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포드를 사지 않으면 장가 가기 힘들어."

'잘 달리는 내 귀여운 포드 T' 같은 말이 팝송에 등장할 정도였다.

T형 포드가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 당시 미국에는 올즈모빌, 맥스웰, 캐딜락, 뷰익 같은 크고 작은 자동차 회사가 50군데나 있었다. 하지만 가격이 2천 달러 정도로 모두 비싸서 부자나 귀족들만 자동차를 가질 수 있었다. 옛날엔 자동차를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T형 포드는 처음 나왔을 때 단지 825달러였다. 이 파격적인 가격은 1913년 포드에서 컨베이어식 조립 라인을 개발하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컨베이어란 에스컬레이터처럼 자동으로 부품을 옮기는 기계 장치인데, 이 라인을 통해 대량 생산이 가능해짐으로써 포드는 자동차를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싸게 팔 수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헨리 포드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어릴 때부터 기계를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 했다. 특히 고장난 시계는 모두 거두어 말끔히 고치는 게 취미였다. 열세 살이 되던 해, 헨리는 아버지와 디트로이트 시에 놀러 갔다가 증기 자동차를 보고는 홀딱 반해 버렸다. 칙칙폭폭 연기를 내뿜으며 시내를 달리는 차를 보는 순간, 헨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증기 자동차로 달려갔다.

"우와! 정말 신기하다. 말로만 듣던 증기 자동차를 직접 보게 되다니! 그런데 아저씨, 이 자동차는 어떻게 말이 끌지 않는데도 저절로 가지요?"

"아저씨, 이건 뭐예요? 저건 또 뭐지요?"

헨리는 운전사가 귀찮을 정도로 증기 자동차의 원리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의 꿈은 '시계 박사'가 아닌, '자동차 박사'로 바뀌었다. 증기 자동차에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한 번은 학교 담벼락 옆에서 증기를 이용한 실험을 하다가 보일러가 터지는 바람에 불이 날 뻔한 적도 있었다.

헨리는 농부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 일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집에서 나왔다.

헨리가 제일 처음 취직한 곳은 디트로이트 시의 '미시간 차량 회사'라는 곳이었다. 그러나 겨우 1주일 후에 해고되고 말았다. 아무도 고치지 못한 기계를 헨리가 30분 만에 고친 것이 이유였다. 이 젊은 청년 때문에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봐 겁이 난 공장장이 쫓아낸 것이다. 그 후 헨리는 여러 회사를 떠돌면서 기술을 익혔고, 드디어 뛰어난 기술자가 되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발명왕 에디슨이 세운 '에디슨 전등 회사'가 있었는데, 헨리는 이 회사에서 전기에 관한 지식을 배웠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자동차 연구에 빠져들었다.

헨리 포드의 첫 작품, 포드 1호차

1896년 초여름, 밤새워 작업을 하던 헨리 포드는 새벽 무렵에 마침내 포드 제 1호를 완성했다.

"야호, 시동이 걸린다. 성공이다, 하하하!"

헨리 포드는 몹시 기뻐 펄쩍펄쩍 뛰었다. 하지만 아뿔싸, 작업실 문이 자동차보다 작아 나갈 수가 없었다. 헨리는 도끼를 들고와 문과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도끼 소리에 놀라 잠이 깬 식구들 앞에서 헨리는 자신이 만든 1호차에 당당히 올라탔다. 시운전은 성공이었다. 2인승, 4마력, 시속45km의 이 차는 친구에게 200달러에 팔렸다.(지금 이 차는 포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포드는 한편 자기 차를 선전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서른여덟 살이었을 때, 자동차 경주에 참가하여 최고 시속 72km로 미친 듯이 달렸는데, 그 당시 시속 72km는 요즘으로 치면 비행기를 탄 것과도 같은 어마어마한 속력이었다. 덕분에 헨리는 우승을 차지했지만, 죽을 뻔했다고 한다.

자동차 경주 우승 - 포드의 이름과 자동차 세상에 알려져

자동차 경주에서 잇따라 우승하자, 포드의 이름과 자동차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3년 그의 이름을 딴 포드 자동차 회사가 세워졌다. 그로부터 5년 뒤, T형 포드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포드 사는 세계 제일의 자동차 회사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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