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는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사람, 故 권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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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는 것 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사람, 故 권명회
  • 이용식
  • 승인 2024.07.2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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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제고 사람들]
(48) 故 권명회 전 인천대 부총장- 이용식 / 전 인천연구원장
고 권명회 전 인천대 부총장
고 권명회 전 인천대 부총장

 

언론매체는 그의 부고를 이렇게 전했다. 두 개를 인용하는 이유는 ‘별세’ 소식을 초점을 달리해 전하고 있어서다. 그의 삶을 좀 더 넓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부고] 권명회 인천대학교 부총장 별세, 물리학계의 큰별 지다 - 일생 대학과 물리학계 발전에 기여해 온 인물 -

권명회 인천대학교 부총장이 18일 오전 8시경 별세했다. 향년 62세다. 국립대학법인 인천대학교에 따르면, 권명회(權銘會) 부총장은 1956년에 출생해 1979년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미국 텍사스주립대학교(Texas Tech University)에서 이학석사, 1990년 동 대학교에서 이학박사를 취득했다. 주 전공 분야는 고체물리학과 센서 및 응용물리학이다. 학위 취득 후 귀국한 고인은 1991년 인천대학교 교수로 임용돼 기획처장과 자연대학장, 부총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2012년부터 국제청소년물리토너멘트(International Young Physicist’s Tournament, IYPT) 조직위원, 2014년부터 인천지역 거점 무한상상실 센터장 등의 주요 보직을 거치며 인천대학교와 물리학계 발전에 크게 기여해 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중략--) (미디어스, 2017. 2. 18.)

 

[부고] 권명회 인천대 부총장 별세, 지난해 7월 부총장 보임, 각종 대학 현안과 씨름, 과로 누적

인천대학교 권명회 부총장이 18일 오전 8시경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동료 교수, 직원들에 따르면 지병이 없던 권 부총장은 전날 오전 대학 졸업식을 치르고, 동료 보직교수들과 저녁 식사까지 함께하고 오후 10시30분쯤 귀가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8시경까지 기척이 없어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으나 병원에 도착하기 전 심근경색으로 숨진 것으로 보인다.

고인은 지난해 7월 30일 국립 인천대 제2대 조동성 총장 체제 출범과 함께 부총장에 보임됐다. 인천대 관계자들에 따르면, 고인은 거의 매일 아침 일찍(6시 30분~7시) 출근하고 늦은 밤 퇴근을 반복하는 등 각종 대학 현안들과 쉴 틈 없이 씨름하며 과로했다. 최근에는 인천시와 재산 문제로 협상해왔으며, 학교 운영비의 국비 확보를 위해 고심해왔다. (--중략--) 고 권명회 부총장은 1956년생으로 성균관대 물리학사, Texas Tech University 석, 박사 취득 후 1991년 인천대 교수에 임용돼 기획처장, 자연대학장을 역임했다. (인천in, 2017. 2. 18.)

 

‘물리학계의 큰별 지다-일생 대학과 물리학계 발전에 기여해 온 인물-, 다른 매체는 ’지난해 7월 부총장 보임-각종 대학 현안과 씨름, 과로 누적-‘이란 작은 제목을 붙여 그의 부고를 알리고 있다. 그의 삶과 생전의 헌신적 노력이 이룬 성과를 다른 각도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017년 2월 學校葬(학교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을 다녀온 한 지인은 그 자리에서 느꼈던 감동을 이렇게 정리했다.

 

(--중략--) 인천대학교가 주관하는 영결식 자리에서는 너무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영결식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통상적, 의례적인 장례 절차가 아닌 모두가 진정으로 고인을 회상하고 추모하는 존경과 사랑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대학 총장부터 동료 교수, 학부 학생에 이르기까지 추모사를 하면서 말을 잊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모두가 숙연해졌고 노조위원장도 진정 고인을 애도했고 참석한 많은 학생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중략--) 요즘같이 존경과 신뢰가 사라져가는 세대 속에서, 더군다나 개인적 성향이 강해 자기와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는 무관심한 대학 사회에서 총장, 동료 교수, 학생, 노동조합원 모두가 신뢰와 존경, 사랑을 보냈다면 그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추모자들은 권 부총장의 매우 인간적이고 솔직하면서도 원칙과 사명감으로 학교의 어려운 일에 헌신했다고 말하였다. (--중략--) 말로만 구호를 외치며 자기 과시와 이해관계에 민감한 현 세태 속에서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기과시보다는 원칙과 소신 그리고 자기희생으로 현안을 뚫고 나간 것이다. (--중략--) 요즘 세상에 꼭 필요한 소금 같은 존재였다.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떠나고 난 후에 더 분명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중략--) (유필우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회장, ‘권명회 인천대 부총장 영결식에 다녀와서’, 경기일보, 2017. 2. 26.)

 

필자도 권명회 부총장을 조문하고 나오는 자리에서 이 같은 상황과 감정을 경험하였다. 장례식장 현관 근처에 교직원들이 모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비통한 표정으로 일부는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대학 사회에서 세상을 떠나는 교수를 교직원들이 저렇게도 절절한 감정으로 ‘직접’ 보내고 있다니 - - - .” 한동안 그 낯선 풍경에 점점 더 먹먹해지는 마음을 다잡기 쉽지 않았다.

그때의 먹먹함은 이 글을 준비하면서 재현되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라며 젖은 목소리로 그의 과거를 소환했다. 너무 일찍 보낸 탓도 있지만, 그에 대한 ‘부채의식’도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 - - .

나는 그 선배를 잘 안다고 봤다. ‘비교적’ 잘 안다는 말로 한발 물러서도,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글을 준비하면서 금방 알아차렸다. 함께 했던 정례 모임에서 자주 봐 왔고, 대학 관련해 여러 현안을 두고 깊이 있는 얘길 나눈 적도 꽤 있어 그를 잘 안다고 봤는데,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가 알아봐 왔던 것보다 여러 면에서 훨씬 더 크고 무거운 사람이었다.

오랜 친구들은 그를 친구들과의 관계며 사회에서 그리고 가정에서도 열심히 아주 원칙대로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일단 친구들이 다 좋아했어요. 진짜 법 없이도 살 제고(출신)인에 딱 맞는 그런 사람이었고요. 그리고 친구들한테도 리더격이었어요. 그냥 겉으로는 굉장히 부드럽고 또 사람들한테 모질게 대하지 않고 그러면서 늘 또 설득력 있게 여러 얘기들을 해주고, 그러면서도 자신한테는 매우 엄격했죠.”(권희철, 제고19회 졸업생)

또 한 명의 절친 김성중 사장(제고19회 졸업생, 포스코계열사 대표 역임)은 그의 순수함과 소심함을 폭로(?)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친구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늘 친구나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 술 먹으면 먹을수록 눈만 껌뻑거리고 노래라고는 애국가밖에 못하는 사람. 근데 일할 때 보면 딱 결정하는 순간 바로 일어나서 해치워요. 근데 그게 나중에 가서 잘못된 게 거의 없어요.”

 

2014. 8. 22. 인천대 무한상상실 개소식_왼쪽에서 세 번째(출처: 인천대학교)
2014. 8. 22. 인천대 무한상상실 개소식. 왼쪽에서 세 번째(출처: 인천대학교)

 

무한상상실 설립 과정에는 그의 인간적·교육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숨겨져 있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학적 상상력을 키우기 위한 과학실험 교육 프로젝트를 직접 구상하고 국책사업으로 따내는데 마치 개인사업처럼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것이 성사되자 이번엔 그 공간을 꾸미고 운영하는 데 헌신적 노력을 다했다.

부족한 예산을 자신의 ‘노동’으로 메꿨다. “가서 보니까 권 교수가 직접 작업을 하고 있더라구요. 용달차로 연구실 낡은 가구나 중고 가구를 사서 옮겼고, 실험실 공간을 직접 꾸미고 있었죠. 칸막이 공사며 페인트 작업, 도배 일을 손수 했어요. 결국 저도 함께 거들게 되었어요. 인건비는 한 10만 원도 안 썼을 거예요.”

더 놀라운 건 그런 친구가 어린 학생들 간식 준비엔 자기 돈을 쓰면서까지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랑 둘이 벽 페인트칠하고 그런 돈은 많이 아끼던데, 애들에게 사주는 거는 안 아끼더라고요. 애들 오면 먹으라고 과자하고 음료수 이런 걸 냉장고에 잔뜩 넣어놔요. 근데 이걸 자기 돈으로 사놓더라고요.”

과학(실험)교육에 대한 그의 열정은 무한상상실 이전부터 불타고 있었다. 창의적인 과학교육은 실용적인 경험 축적을 통해 이뤄진다는 생각을 가진 그는 청소년들의 과학교육을 위해 여러 방안을 찾아 나섰고 직접 실천했다. 그 결과 권 교수가 직접 지도한 학생들이 최고 수준의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2003년 8월 열린 제1회 <한국청소년과학탐구토론대회>에서 인천지역학생들이 우승을 차지했다. 전국 19개 대학 과학영재교육원의 과학영재들로 구성된 33개 팀이 열띤 경쟁을 벌인 이 대회에서 인천지역 학생들이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전국 각 대회의 이곳 출신들로 구성된 인천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은 한국청소년물리탐구토론대회 (KYPT : Korean Young Physics Tournament)에서 3년째 우승을 차지했고 이 해에는 국제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2009년에는 물리학의 월드컵이라 불리는 <국제청소년물리토너먼트대회(IYPT, International Young Physicists’ Tournament)>에서 한국팀이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때에도 권명회 교수는 한국팀 지도교수의 일원이었다. 이 대회는 <국제물리올림피아드>와 쌍벽을 이루는 물리경연대회로 7월 22일부터 27일까지 중국 톈진의 남개대학에서 27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권명회 교수는 또한 2014년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물리토론대회>의 조직위원장을 맡아 대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2009. 7. 27. 제22회 국제청소년물리토너먼트대회(IYPT) 우승한 학생_중국 톈진 남개대학(출처: IYPT 홈페이지)
2009. 7. 27. 제22회 국제청소년물리토너먼트대회(IYPT) 우승한 학생_중국 톈진 남개대학(출처: IYPT 홈페이지)
2014. 8. 17. 제5회 아시아청소년물리토론대회 및 제2회 인천청소년물리토론대회_맨 앞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
2014. 8. 17. 제5회 아시아청소년물리토론대회 및 제2회 인천청소년물리토론대회_맨 앞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

 

2014년 8월에 문을 연 무한상상실은 이후 과학문화 체험 공간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무한상상실은 18개 실 660㎡ 규모로, '아이디어 샘터' '3D 공작실' 'R&E 탐구실' 등을 갖추었는데, 3D 프린터, 레이저 조작기, 천체망원경, 데이터 스튜디오 등 50여 종의 실험·가공 장치가 마련돼있다. 16개 과정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무료로 진행하고 있는데, 문을 연 2014년 한 해의 9월에는 800여 명, 10월엔 700여 명 등 두 달간에만 1천500명 이상의 학생이 인천대 무한상상실을 찾았다. 백령도를 찾아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학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권명회 교수는 2015년 <대한민국과학문화상>을 수상했다. 인천지역의 거점인 무한상상실을 운영하면서 메이커 문화 조성에 기여한 공로가 주된 수상 사유였다.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진짜 선생’이었다고 회고한다. 가르치는 걸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래서 잘 가르쳤으며 동시에 학생들, 제자들을 진정으로 보살폈다. 특히 학생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남달랐다. 강의실 내외를 불문하고 시간을 아껴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을 나눠주려 여러 방식을 활용해 학생들과 시간을 가지려 노력했다. 학생들도 그래서 그에게 ‘열성적으로’ 다가갔다.

학생으로 시작해 학과 조교로 20여 년 이상을 그를 지켜봤던 고민정 선생(물리학과 조교, 졸업생)은 학생들의 그에 대한 성원과 제자로서의 보답을 이렇게 전했다. “권명회 교수님 학생들은 언제 어디서 부르든 달려갔어요. 너무 좋은 거죠. 교수님과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게. 조교인 저도 항상 따라갔죠.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으신 분이신 거죠. 그래서 항상 보면 학생들이 안 모일 것 같은 그런 조건인데도 교수님이 부르면 학생들은 다 달려갔어요. 교수님하고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

그는 학생들을 진심을 다해 챙겼고 따뜻하게 보살폈다. “항상 조교인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생계에 어려움을 겪거나 부당한 일을 겪는 사람들 이야기가 있으면 나한테 빨리 와서 알려달라, 도와줄 수 있는 데까지 도와주겠다, 이럴 정도로 워낙 인품이 있으셔서 다들 좋아했죠. 학생들한테 애정이 깊으셨죠.”

학생들 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한 일화는 아직도 마음이 짠하다고 했다. 송도로 이전하자마자 권 교수는 주변 기업을 죄다 방문했다. “거의 다 직접 찾아가셨어요. 제자들 인턴 시켜달라고. 취업 관련 보직을 맡은 것도 아닌데, 또 거기 사장님들은 뻣뻣하시잖아요. 근데도 이제 우리 학생들 잘 지도해서 보낼 테니까 인턴 기회 좀 달라고 이러면서 협약을 하나하나 다 맺고 다니셨죠?”

학교는 좋아졌고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해서 공부도 열심히 해서 실력도 있는데, 학교 평가나 이미지가 여전해서 학생들 취업이 힘들었다. 그래서 학생들 이력서를 싸 들고 가서 송도에 있는 기업들을 다 찾아다닌 것이다. “우리 인천대학교 학생들을 인턴으로라도 우선 써달라.” 그 시기 권 교수의 자동차 트렁크에는 학생들 이력서와 인천대 홍보물로 꽉 차 있었다.

 

권명회강의실
권명회강의실

 

그의 이러한 헌신에 대학 구성원들도 호응했다. 힘든 일임에도 그가 하는 일에는 발 벗고 나섰다. 학교 발전을 위해서는 늘 최선을 다했는데 그러면서도 주변을 진심을 다해 챙기는 심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의 진정성에 마음이 동한 교직원이 스스로 그 험한 자리를 지키겠다고도 했다. “권 교수님을 따르면 그만큼 일은 많이 했지만 그게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 다들 보람되게 일을 할 수 있었죠. 교수님이 보직을 맡아 하실 때도 같이 일을 하게 되면 서로서로 도와드리고 같이 하겠다고 이렇게 할 정도였어요. 심지어는 권 교수님이 학장이 되자 옆에서 즐겁게 일해보고 싶다며 보직 이동을 취소해달라는 직원도 있었어요.”

보직을 맡아 바쁜 와중에도 수업을 빠진 적이 없다. 실험실 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학습이나 실험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구입할 수 있는데 그때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권명회 교수가 직접 실험실 시스템 구축을 시도했다.

그 시기를 함께했던 제자 황지현 박사(대학강사)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실험을 하면서 그 실험을 컴퓨터로 프로그램화해서 데이터를 정리하고 센서를 가지고 측정을 하는 그런 시스템을 갖춘 학교가 생각보다 없어요. 그런데 그런 시스템을 저희 인천대는 가지고 있거든요. 실험실에 있는 제 동기들 중에 컴퓨터 잘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제대하고 컴퓨터실 실험실에서 계속 작업하고 있었던 거예요. 네트워크 작업이랑 프로그램 작업을 권명희 교수님이 주도하셔서 실험하면서 그 실험을 프로그램화해서 학생들이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끔 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거였어요.”

그는 실험실에 있는 대학원생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다 챙겼다. 제자들에게 스승인 그는 언제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고 튼튼하고 따뜻한 기둥이었다. “다른 학교의 다른 교수님들도 이렇게까지 하셨을까 싶어요. 저한테는 정말 은사이시고, 거의 뭐 아버지 같으셨죠. 정말 제가 되게 힘들 때 만나 뵙고 그러고 상담을 하면 그러셨어요. 아버지가 그렇잖아요. 기둥이 되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그런 분이셨죠. 늘 제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시고 정말 따뜻한 분이셨어요.”(황지현 박사)

그의 임용 이후 인천대는 진통과 성장을 거듭한 격동기였다. 학내외에 걸쳐 여러 일들이 있었고 또 한참 변화가 심할 때였다. 그러면서 학교가 발전을 거듭했는데, 그 과정에서 권명회 교수의 큰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총장이 바뀐 상황에서도 기획처장을 또 맡았는데 그때마다 충실하게 소임을 다했다. 머리도 좋고 숫자 기억과 해석이 빨라 대학 현안에 대한 분석과 대응이 객관적이고 매우 빨랐다.

2014. 7. 10. 2014 제27회 국제청소년물리토너먼트대회 은상_권명회 단장(출처: 파이낸셜 뉴스)
2016. 9. 22. 2016 china biz-cool 2기 입학식_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출처: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홈페이지)
2016. 9. 22. 2016 china biz-cool 2기 입학식_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출처: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홈페이지)

 

그는 매우 분석적이어서 기획업무에 적합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판단이 빠르고 정확했는지 놀랄 때가 많았다. 이러한 탁월한 능력은 그가 학교 행정과 교육 관리 업무에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게끔 했다. 게다가 미국 유학 전에 국책연구원(KIDA, 한국국방연구원)에서 7년 동안 보고서 작성 경험이 더해졌으니 - - - .

동료로서 학교 현안 해결에 함께 나서며 인간적인 관계도 돈독했던 변윤식 명예교수(전자공학과)는 학교 발전을 위한 그의 헌신적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총장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비화를 전한다. “학교를 위해 많은 일을 했죠 헌신적으로. 예산이나 기금을 확보하기 위한 외부 활동도 확실히 했고, 내부 의견을 모아 대학발전의 동력을 얻는 데도 큰 역할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를 왜 다음 총장으로 생각했었냐 하면 교수들을 절대로 윽박지르지 않고 설득을 해요. 무슨 일이 생기면 찾아가서 설득을 해요. 상대방이 이해할 때까지 설득을 하는 거예요.”

 

2016. 9. 28. 인천국제개발협력센터 개소식_오른쪽 맨 뒤
2016. 9. 28. 인천국제개발협력센터 개소식_오른쪽 맨 뒤

 

후배이자 동료 교수로서 그를 매우 잘 아는 박재윤 명예교수(신소재공학과, 제고21회 졸업생)는 필자에게 ‘인간 권명회’를 ‘전형적인 제고 출신 선배’라 상기시킨다. “그 선배랑 워낙 많이 만났고 나 같은 경우는 어쨌든 싫은 소리도 많이 했는데 근데 진짜 그 양반은 전형적인 아주 제물포고등학교 사람, 아주 전형적인 딱 제물포고등학교 출신 선배야. 전형적인 제물포고등학교 출신으로 대표주자를 뽑으라면 권명회 선배야. 진짜 양심적인 사람, 아주 성실하고, 깨끗하고 남한테 싫은 소리 절대 안 하고 모든 부담을 자기가 다 다 갖고 가는 사람.”

박 교수는 그의 희생과 헌신 사례를 보탠다. “그러니까 이런 거야. 그 양반이 보직을 꽤 했는데, 워낙 책임감 있게 업무를 잘 처리하니까 역대 총장들이 도움을 청한 거지. 근데 사람 만나 뭘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집에 월급을 가져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아버지한테 돈을 빌려다가 쓴 거로 알고 있어, 말하자면 학교 일을 위해 사재를 턴거지”

그의 아내(서선희 박사)도 남편을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무조건 열심히, 헌신적으로 산 사람이라 얘기한다. “제가 화도 참 많이 났어요. 보직을 맡은 것도 아닌데, 자신을 혹사하면서까지 학교 일을 직접 나서서 했으니까요.”

지금의 국립인천대학이 있기까지의 긴 여정에는 곳곳에 그의 흔적이 깊이 새겨져 있다. 사학비리의 대명사였던 학교가 거친 분쟁을 겪으면서 시립화가 되었고, 송도로 이전했다. 얼마 후 국립대학이 되었고 그다음 해 전문대와 통합했다. 이 모든 과정이 험난한 여정이었다. 속된 말로 그때마다 학교가 뒤집어졌다. 사립대로 시작해서 지금의 국립대학으로 통합될 때까지의 그 소용돌이 속에 중심을 잡은 핵심 중의 한 명이 권명회 교수였다.

학교와 학생을 위한 그의 헌신과 열정은 아내를 열받게 할 정도였다. “기획처장이 된대요. 근데 이 사람 얼굴을 볼 수가 없네. 너무 바빠가지고 밤에 들어왔다 밤에 나가고. 근데 재밌는 거는(웃음) 보직을 맡으면 왜 돈이 좀 더 생기잖아요. 근데 마이너스야. 수당은 이미 다 썼는데 그는 제 돈을 써가며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는 거에요. 그 사람들을 다 만나고 돌아다녀야 학교가 돌아간다는 거죠.”

책임감, 헌신성, 성실함 등의 기본스펙(?)에 학교와 학생에 대한 애정이 함께 했으니 그는 늘 바빴다. 학교와 학생 일에 나서는 건 보직 여부와도 관계없으니 더욱 그랬다. 천상 선생의 자질에 학교와 학생, 그리고 주위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의 깊은 소명 의식과 헌신적 노력이 그의 몸을 힘들게 내몰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행복해했지만, 그러나 그의 육체는 그 행복감을 누리지 못했다.

“새벽 6시에 귀가했죠. 밤새 근무했으니까. 1시간쯤 쉬었다가 그날 졸업식에 참석했어요. 그날 남편의 기분이 엄청 좋은 날이었어요. 저녁 9시쯤 왔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냐고 했더니, 해결 안 되던 문제가 해결이 됐다는 거예요. 신임 교수한테 줘야 되는 오피스가 6개가 모자랐다는 거예요. 막 고민을 했는데 본관 사무실 공간과 학장 사무실 등을 줄여서 6개를 다 마련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오늘 해결됐다. 이제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기분이 좋다고.”

내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가야 한다며 그렇게 기분 좋게 잠든 권명회 부총장은 그러나 다음 날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은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學校葬(학교장)의 喪主(상주)이기도 했던 조동성 총장(국립인천대 2대 총장 역임)은 영결식에서 그를 진심으로 애도했다. 그의 삶과 희생, 그리고 ‘그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이룬 헌신적 성과들이 ‘남겨진 사람들에겐 너무도 크고 무겁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추모사는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세상이 그에게 진 빚(부채의식)을 다시 한번 깊이 상기할 수 있길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

 

(--중략--) 제가 권명회 부총장님을 처음 만난 날은 작년 이맘때였습니다. 3월 초의 어느 일요일 아침, 제가 관장으로 있던 남산 기슭의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다소 어눌한 어조로, 국어 선생님이 책을 읽어주시듯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을 주어가면서, 인천대가 사립대에서 시립대로, 또다시 국립대로 발전해온 역사를 찬찬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송도 바닷가에 터전을 잡은 국립 인천대가 가진 잠재력을 무한상상의 날갯짓으로 설명해주시는 부총장님 모습에서 저는 티 없이 해맑은 소년을 보았습니다. (--중략--) 항상 저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고, 학교가 나아가야 할 비전과 현재 학교의 현실을 메워주시던 분이셨습니다. 단과대학과 본부, 또 실무 부서 간의 의견이 다를 때에도, 모든 구성원의 의견을 들으시고 지혜롭게 중간에서 그것을 조율해주신 분이셨습니다. 항상 모든 교수님들과 직원 선생님, 조교 선생님, 그리고 학생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셨기에 누구나 편안하게 찾아갈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다정한 아버지처럼 언제나 아낌없는 조언과 진심 어린 격려로 학생들이 부총장님의 그늘 아래서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중략--) 부총장님께서는 탁월한 연구 정신으로 우리나라의 고체물리학 분야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부총장님께서는 1990년 미국의 Texas Tech University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시어 국내에 고체물리학의 씨를 뿌리시고 가꾸셨습니다. 또한 국제학회를 통하여 한국의 학문적 지위를 높이심은 물론 후학들의 국제적인 활동무대를 튼튼히 닦아 주셨습니다. 부총장님께서는 국제청소년물리토너먼트(IYPT)의 조직위원으로서 전 세계 물리 꿈나무들에게 길과 방향을 제시해주셨고, 동시에 인천지역 거점 무한상상실 센터장으로서, 인천지역의 자라나는 꿈나무들이 누구나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특히 얼마 전 인천지역 다문화가족과 함께 한 글로벌 희망완성 프로젝트에서 아이들에게 3D프린트를 설명하시는 가운데 영롱하게 반짝이던 그 눈빛은 제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중략--) 이제 눈물을 거두고 학교를 위해서 불철주야로 고민하시던 부총장님의 뜻을 받들어,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부총장님께서는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고, 편안히 쉬시기 바랍니다. 인천대학교는 부총장님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고, 부총장님은 저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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