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표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마치고 아래층 커피숍으로 이동했다. 짠음식에 게장 비린내를 달래는 커피를 마셨다. 비가 그친 창밖 텃밭에 들깨, 옥수수, 고추, 호박넝쿨이 싱그러워 보였다.
농작물들을 둘러보는데 언뜻 낯익은 비닐하우스가 눈에 들어온다. 1978년 남편과 나는 해외 수출을 목표로 선인장 재배를 시작했다. 그 즈음 전성기였던 우리 하우스에서 석모씨가 기술도 배우고 분양을 받아 시작했는데, 바로 그 석씨의 비닐 하우스가 보인 것이다.
당시 지금의 동암초등학교 뒤 ‘꽃밭골’ 이란 동네에서 선인장 수출 바람이 일었다. 남편은 친구인 강씨, 이씨, 그 처와 남씨, 그리고 지인들 몇몇이 모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때 비닐 하우스는 각목으로 나즈막하게 지어진 하우스였다. 겨울 월동에도 벼짚으로 엮어서 지붕을 덮느라고 폭이 좁고 길게 지었다. 지금 보이는 비닐하우스가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다.
온 동네가 선인장 하우스로 골짜기를 이루어 하얗게 비닐하우스 집단촌이 되었다 석씨는 그때 이곳에서 시작해서 한참 후 구획정리가 되어 보상을 받고 이곳에 안주한 사람이다. 그는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지금도 선인장을 키우고 있다.
우리는 선인장 재배를 시작하여 애만 쓰다가 넓은 땅이 다 없어젔다. 그 사연을 말하려니 고달팠던 나의 삶이 아픈 역사처럼 떠오른다. 처음 본 빨갛고 노란 선인장이 신기했던 남편은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마침 네델란드 에델만 회사와 연결되어 선인장 첫 해외수출이란 호재가 생겨 남편은 적극 뛰여 들었다. 부모님이 두고 가신 넓은 터전에 하우스를 짓기 시작하였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친구들과 지인들을 모아 공짜로 땅을 빌려 주면서 남편은 선인장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남산식물원 화훼협회에 선인장 수출 추진회도 형성되었다. 서너 사람은 하우스에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그렇게 갑자기 경험없는 해외 수출을 크게 벌려놓았지만 뒤따르는 문제가 수도 없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걸 해결 하느라 방학 때는 원주농고 학생 실습생도 대여섯명씩 받았다.
재우고 먹이고 뒷바라지 하면서 나도 남편이 벌려놓은 사업의 치닥거리에 바빠지기 시작했다. 젖먹이 막내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겨우 아침밥 먹여 학교 보내면 저녁에 잠자리에서나 볼 정도였다. 어떻게 아이들을 키웠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장마철에는 선인장을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썩는 식물인지 모르고 시작하여 해외로 나간 선인장이 크레임이 걸리곤 했다. 선인장의 특성을 모르고 시작한 탓이고 포장에도 문제가 컷던 것 같다. 그 손해 배상을 회장인 남편이 전부 책임져야 했다.
남편이 미웠고 지금 같아선 이혼감이었지만 아이들이 어렸고 힘든 때라 나는 일에 파묻혀 지내면서 참아 냈다. 그러다가도 혼자서 다 책임지고 처리하는 잘난 남편과 무진히 싸우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은 돈을 벌었으나 남편은 뒤따르는 문제 해결에 빛만 늘어나고 겉보기만 잘 나가는 수출 회사 사장이고 선인장동우회 회장이었다. 그러면서 땅은 기업은행에 저당을 잡혔고 어쩔 수 없이 타 지역의 임대한 곳에서 다시 기회를 잡았다.
IMF 때 선인장 수출은 의외로 외화 벌이에 충신이었다. 남편은 재기하여 농림부장관의 은탑 산업 훈장까지 받았다. 고양시에서 제일 잘 나가는 선인장 수출업체로서 한때는 잃은 땅을 찾을 희망에 부풀었다. 선인장 수출에 경험도 있고 자리가 잡혀 크게 희망을 가졌다. 계속 되는 호황에 겸손을 잃은 남편은 욕심이 커지고 잘못된 판단으로 우리집에 또다시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고교 동창이란 남편 친구가 느닷없이 찾아왔다. 그 친구의 사기에 걸려 들어 세상 고생 다 겪으면서 모은 재산을 단번에 잃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편은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척추 수술도 받았다. 나는 여러가지 상황을 정리하려 했으나 너무 덩어리가 크고 아무나 달려들 사업이 못 되었다. 하늘도 무심 하시지. 그해 겨울 눈도 지겹게 많이 왔다. 게다가 겨울 태풍까지 와서 쌓인 눈에 하우스는 주저 앉고 선인장은 한꺼번에 눈 속에 묻혀 버렸다. 현대식 연동형 하우스를 크고 넓게 지어 더 큰 피해를 보았다. 억대가 넘는 선인장을 모두 태풍이, 눈이 앗아가 버렸다. 그나마 소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날아갔다. 결국 천여 평의 땅과 집도 모두 잃었다.
남 모르는 트라우마에 지금도 선인장을 보기 싫어 한다. 선인장 선자도 싫어하고 식물원을 가지 않는 정도다. 좋은 음식 배불리 먹고 하필이면 기분 좋아야 할 커피점에 앉아서 왜? 하필이면 그 선인장 하우스가 보였는지. 아직도 그 자리에 허옇게 퇴색 된 채로 '벨엘 선인장' 간판이 여닫이 문짝에 남루하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