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지선 작가 - ④ 인천의 병원들 -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친 발화점
병원은 내게 낯설지 않은 공간이었다. 각 지역마다 특정병원이 떠오르고, 그 지역들은 그곳의 병원으로 기억됐다. 부평은 인천성모병원, 구월동은 길병원, 신흥동은 인하대병원, 송림동은 인천의료센터, 동인천은 길한방병원으로 기억되었고, 최근에는 작전동의 세종병원이 그 목록에 추가되었다.
병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치며 오소소 소름을 돋게했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발 밑에 닿는 순간, 나는 그 공간의 특유의 분위기에 사로잡히곤 했다. 높은 천장에서 비치는 조명이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며 차갑고도 맑은 빛을 뿜어냈고, 그 딱딱한 바닥은 바퀴 구르는 소리와 발소리를 공간에 울리게 했다.
멀리서 쉬지않고 들려오는 '띵동' 소리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지친 표정들이 그 공간에 기묘한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상하게도 울음소리는 다른 소리들보다 유독 크게 들려,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이면 그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진 듯 했다. 코끝을 스치는 소독약 냄새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 냄새는 내게 항상 ‘병원 냄새’로 여겨졌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여행중 호텔방에 들어갈 때나, 소독이 잘 된 책을 펼쳤을때도, 공항에 들어설때도, 심지어 강한 피트향이 나는 위스키를 마실때도 떠올랐다. 그럴때면 나는 타임머신을 탄 듯 순식간에 과거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특이한 기억법을 가지게 된 것은 어린시절부터 겪어온 크고 작은 사건들에서 비롯됐다. 우리 가족을 뒤흔든 큰 사건과 기억들은 모두 병원이었다. 부모님은 특히 건강이 좋지 않으셨는데, 원래 체력이 좋지 않으셨던 엄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잦은 혼절을 겪으셨고, 동생을 낳으며 의료사고도 크게 겪으셨다. 아빠는 학회에 보고될만큼 큰 심장수술을 받으셨고 그 이후 몇 번의 스탠드 삽입과 더불어 최근에는 신장 투석도 시작하셨다. 외할머니 역시 뇌출혈로 인해 오랜 병원생활을 하셨다.
그래서그런지 어떤 시절들은 내게 병원 이름으로 기억된다. 가족들과의 대화에서, 혹은 중요한 사건을 회상할 때 병원의 이름은 그 시절을 대변한다.
7살 무렵은 내게 있어서 성모병원이다. 당시 엄마는 동생을 낳고 나서 부평에 있는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에 오래 입원하셨고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달 뒤에야 퇴원하셨다. 그 기간동안 나는 처음으로 가좌동을 떠나 작전동에 있는 이모네서 몇 달간 지내게 되었는데, 주말이면 어김없이 엄마가 입원해있는 병실을 찾아갔다. 엄마가 누워 계신 푹신한 물침대에서 몸을 뒹굴고, 작은 TV 너머로 만화영화를 보며 병문안 선물로 들어온 황도통조림을 먹는게 내 일상이었다.
어떤 시절은 내게 길병원이다. 당시 아빠는 등 통증으로 병원에 가셨다가, 단순한 소화불량이 아닌 심근경색증이라는 진단을 받으셨다. 심장의 혈관을 다른곳으로 돌려 접합하는 심장우회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갔을 때, 엄마가 걱정어린 목소리로 “느이 아빠 수술해야 한단다” 하시던 그 순간이 그 시절의 시작이다. 당시 심근경색증은 지금처럼 흔한 질병도 아니었고, 보험도 잘 되어 있지 않아 덜컥 겁이 났다. 아빠는 열 시간 넘게 수술을 받으셔야 했고, 우리는 대기실에서 느리게 지나가는 시계의 분침을 바라보며 긴장 속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수술종료를 알림과 동시에 우르르 나오는 의사들이 이 수술이 얼마나 큰 수술이었는지를 가늠케 했다. 중환자실에서 몇주 회복을 거친 아빠는 심혈관센터에 있는 병실에서 몇 달을 회복에 집중하셨다. 학교가 끝나면 67번을 타고 길병원 역에서 내려 심혈관 센터로 걸어가던 길목이 아직도 익숙하다. 구월동에서 살아본적은 없지만 어디에 뭐가 있었는지 선명히 기억한다.
어떤 사건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때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우리 나은병원에서 TV를 보다가 깜짝 놀랐잖아", "너 그때 유리 깨져서 얼굴에 파편 튀었을 때, 의료 파업 때문에 제대로 수술도 못 받았지" 같은 대화들이 떠오른다. 심지어 특정 맛집조차도 병원을 중심으로 기억된다. 길병원 옆 설렁탕집, 본관 뒤 김밥집, 나은병원 옆 칼국수집, 성모병원 앞 떡볶이집, 그리고 인하대병원 주변에는 먹을 곳이 마땅치 않더라 등, 병원 주변은 나의 일상 속 기억들과 깊이 얽혀 있다.
어린 시절부터 병원은 나의 삶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존재였다. 가족의 건강 문제로 인해 병원을 자주 찾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느꼈던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가끔씩 찾아왔던 희망과 안도감은 내 감정과 기억에 깊이 새겨졌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단순한 치료의 장소를 넘어, 인생의 중요한 사건들이 교차하는 지점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내 작업에 큰 영향을 미친 발화점이 되었다.
인간의 삶은 생명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질병과 마주하게 되고, 투병을 통해 삶을 지속해나간다. 질병과 투병은 단순한 신체적 고통을 넘어, 정신적, 감정적 도전을 동반하며, 이는 우리의 삶을 더 풍부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를 지치게 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내 작업 노트에는 언제나 ‘메디푸어(Medipoor)’라는 단어가 자리하고 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경제적인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병원과 얽힌 내 삶의 경험과 감정들이 응축된 표현이다. 지금의 날 만들어낸 병원에 대한 시절들의 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