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색, 왕자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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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색, 왕자의 색
  • 공주형
  • 승인 2011.11.0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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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공주형 / 미술평론가, 인천대 초빙교수

두 해 전 일입니다. 초등학생 큰 아이가 굉장히 기특한 일을 했습니다. 소원을 물었지요. 네일숍에 가는 것이랍니다. 예상 문제에 모범 답안이 아니었습니다. 엄마 체면에 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알록달록 손톱에 색을 칠하고 학교에 가는 게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아이가 쉽게 수긍을 합니다. 그래서 나온 타협안이 방학 전날 네일숍에 들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생애 처음 네일숍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방학보다 네일숍 들를 일이 더 기쁜 첫째입니다. 그런 언니를 부럽다는 듯 바라보는 유치원생 둘째까지 데리고 아파트 상가 안 네일숍에 갔습니다. 처음 들르는 곳이니 분위기도 용어도 어색하고 낯섭니다. “케어는 무엇이고 칼라는 무엇 이예요?” 용기를 내 물어보았지만 더 궁금해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무척 간단하고 단호한 어투의 답변이 돌아옵니다. 딱 봐도 초짜처럼 보였나 봅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오천 원 씩을 지불하고 아이들 손톱을 칠하는 것으로 흥정을 마치고 본격적인 네일 아트에 들어갔습니다.

둘째 앞으로 분홍색 매니큐어가 대령을 합니다. 첫째와 저는 흠칫 놀랐습니다. 둘째는 분홍색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노란 색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연두색도 참 좋아합니다. 아이에게 어떤 색을 칠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해도 될지를 물었습니다. ‘이 맘 때 여자 아이들은 다 분홍색을 좋아해서 고른 색이다.’ 그럼 골라보라고 말하면서도 일하는 분 태도에 불편함이 역력합니다.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자란 둘째는 눈치가 빠릅니다. 분위기가 살짝  험상스러워지자 좋아하는 색을 선택해 보라는 첫째 독려에도 불구하고 그냥 분홍색을 칠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둘째 아이 손톱 끝에는 분홍색이 칠해졌습니다. 이번에는 큰 아이 차례입니다. 열 살 배기는 씩씩하게 베이비블루와 스카이블루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결국 네이비블루를 고릅니다. “어머, 너도 분홍색 별로야.” 일하시는 분이 뜨악해 하십니다.

혹시 여자 아이들이 분홍색을 좋아하고, 남자 아이들이 파랑색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닐까요. 그 분께 윤정미의 ‘핑크 프로젝트’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윤정미, 핑크 프로젝트 ⓒ 윤정미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 아이가 온통 분홍 세상 속에 앉아 있습니다. 아이는 분홍색 연필로 분홍색 노트에 분홍꿈을 써내려갈 것만 같습니다. 분홍색 튀튀를 입고 분홍 선율에 맞추어 분홍빛 발레를 출 것만 같습니다. 분홍색 책에 담긴 분홍 이야기를 읽고 분홍색 침대에서 분홍 꿈길로 접어들 것만 같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분홍이야' 분홍색 잠옷을 입고 분홍빛 하품을 하며 일어난 아이는 아마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렇게 생각할 것만 같습니다.

윤정미, 블루프로젝트 ⓒ 윤정미

실제로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분홍은 공주의 색, 파랑은 왕자의 색입니다. 언제부터 분홍은 공주의 색이고 파랑은 왕자의 색이 된 걸까요. 서양미술 역사에서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분홍은 작은 빨강이었습니다. 빨강은 왕의 색깔이었지요. 그러니 작은 빨강 분홍은 왕자이겠군요. 간혹 마주하는 서구의 작품들 중에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등장하는 아이들은 공주가 아니라 왕자입니다. 한편 파랑은 좀 복잡합니다. 사회적 의미가 가장 많이 변한 색이라고 해야 할까요. 처음에는 천박한 색이었지요. 파란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은 이유 없이 천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던 파랑이 성스러운 색이 된 것은 성모마리아가 파란색 옷을 입으면서부터였습니다. 그 후로 파란색은 모성을 상징하는 어머니의 색으로 되었습니다. 천박한 색에서 성스러운 색으로 신분 이동을 한 파랑은 오늘날 대중의 색입니다. 청바지가 출현하면서 의미가 다시 변한 것이지요.

색의 의미는 이렇게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공산품이 대량 생산되면서 우리 사회에 핑크 걸과 블루 보이가 보편화한 것처럼 말이지요.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이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 빛깔 열 손가락을 쫙 펴고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언니가 부러운 모양입니다. 뾰로통한 얼굴로 손톱을 지워도 될지를 묻습니다. 사뭇 결연하게 다시는 네일숍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아이를 달래 봅니다. 대형마트 화장품 코너에 들르기로 손가락을 꼭꼭 건 후에야 아이가 마음을 풉니다. 어떤 빛깔을 고를 것인지, 형형색색 매니큐어 진열대 앞에서 선택할 기회를 주겠노라 다짐을 받은 후였습니다. 좋아하는 색 때문에 눈치 보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공주인지 왕자인지를 따져 묻기보다 잘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질문하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런 제 바람이 딸 셋 키우는 엄마의 생각으로 오해되지 않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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