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한 자태로 뭇 식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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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한 자태로 뭇 식물 압도한다
  • 정충화
  • 승인 2011.11.07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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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화의 식물과 친구하기] 물매화


미국이란 나라는 워낙 땅이 넓다 보니 동부에서 서부까지 차로 이동하는 데만도 사흘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나라야 어디든 반나절 생활권인데 여행을 하다 보면 이 좁은 땅덩이 안에서도 기후 및 기상 변화의 차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특히 지역에 따라 기후 및 기온의 차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때가 겨울을 앞둔 이즈음일 것이다.

내가 임시로 머물고 있는 곳은 내륙 한가운데인 데다 큰 호수를 끼고 있고 산자락에 둘러싸여 타지보다 기온이 다소 낮은 편이다. 체감하기로는 2° 정도는 낮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보니 식물의 개화시기가 대체로 늦다. 주말에 집에 다니러 갔다가 본 꽃들을 이곳에서는 한참 뒤에야 다시 보곤 한다. 한 가지 식물을 더 오래 볼 수 있으니 좋기야 하지만, 문제는 꽃 피는 시기에 대한 감각이 흐트러져 버리는 데 있다.

열흘간 지방 출장을 다녀온 뒤 지난주 일터 뒷산에 올랐다가 새로운 꽃을 많이 만났다. 두어 주 전에 보았던 꽃은 거의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를 용담, 톱풀, 쓴풀 같은 가을꽃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운 좋게도 산 중턱 임도 옆 도랑에서 고아한 자태로 근처의 뭇 식물들을 압도하고 있는 새 친구를 만났다. 도감에서만 보았지 실제로는 처음 보는 물매화였다.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마치 옛 연인을 만난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매번 겪는 느낌이지만, 처음 만나는 식물을 대할 때의 설렘은 변함이 없다. 

물매화는 원산지가 우리나라로 알려진 숙근성 여러해살이풀이다. 비교적 높은 산의 습지나 풀밭에서 무리지어 산다. 뿌리잎은 둥근 심장형이며 줄기잎은 줄기 가운데쯤에 한 장의 둥근 잎이 줄기를 감싸고 달린다. 가늘고 기다란 줄기 끝에 매화를 닮은 꽃 한 송이가 달린다. 꽃 피는 시기는 대부분 7~8월경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드물게 7~10월 사이에 핀다고 적힌 도감도 있다.

아무튼 다소 낮은 기후 때문에 10월 말에도 이곳에서는 물매화 꽃을 볼 수 있어 커다란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하늘을 향해 핀 흰 꽃은 영락없는 梅花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 피어 바람에 흔들리는 물매화 꽃에서는 고아한 기품이 느껴진다. 5장의 꽃잎 안쪽에 5개의 헛수술이 있고 그 끝이 갈라져 12~22개의 작은 알갱이 같은 황록색 선(腺)이 있다.

산과 들이 하루가 다르게 황량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나무마다 무성하게 매달고 있던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 사이로 차가운 바람을 흘려보내고 있다. 한두 주 사이 풀들은 거의 사그라질 것이다. 새봄을 맞기까지 5개월여 이상을 회색빛만 보며 지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아찔하다. 겨울은 춥고 지루한 계절이지만, 식물들은 그 엄혹한 시련 속에서도 찬란한 봄을 준비해 나간다. 그런데 미련한 나는 내 앞에 닥친 삶의 혹한기를 잘 넘길 궁리는 짜내지 못하고 대책 없이 걱정만 앞세우고 있다.

글/사진 : 정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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