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遺感)과 사과(謝過)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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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遺感)과 사과(謝過)의 차이
  • 김정희
  • 승인 2011.11.0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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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김정희 / 시인


우리말은 문장을 다양하고 섬세하게 구성할 수 있어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세밀히 표현하는 데 매우 용이하다. 그런 반면 다의적인데다 혼동하기 쉬운 것도 많아서 잘못 쓰게 되는 경우가 있지만, 뜻을 생각하지 않고 씀으로써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를 피하려면 꾸준히 우리말에 관심을 가지면서 바르게 쓰려고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말이 넘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특히 정치판은 말이 가장 심하게 요동치는 현장이어서 구설수와 설화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 차별적인 존재가 있다면 ‘단어 정치’를 한다고 회자될 정도로 말을 아끼는 차기 대선 후보 박근혜씨일 것이다. 그는 말을 지극히 아끼지만 이따금 부지불식간에 말실수를 저질러 도마에 오르곤 하는데, 9월 초에도 그랬다.  

‘안철수 현상’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병 걸리셨어요?”라고 되물었던 것으로, 파문이 일자 박씨는 이튿날 기자들에게 “표현이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에 관하여 각 언론사 기자들은 이렇게 기사화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안철수 현상’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병 걸리셨어요?”라고 말한 지 하루 만에 “표현이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며 유감을 표명했다.(조선일보)

-박근혜 전 대표는 기자에게 “병 걸리셨어요?”라고 말했던 것과 관련해 “표현이 부적절했던 것 같다”고 유감을 표명했다.(한겨레신문)

-취재기자에게 “병 걸리셨어요?”라고 반응한 것에 대해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표현이 적합하지 않았다”고 유감을 표시했다.(오마이뉴스)

누군가의 지시문을 옮기기라도 한 듯 대부분 기자들이 ‘유감을 표시(명)했다’고 표현한 것을 보고 나는 참으로 의아스러웠다. 박씨는 단지 “표현이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자기 생각을 말했을 뿐 사과를 한 것도 유감을 나타낸 것도 아닌데, ‘아’와 ‘어’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 기자들이 박씨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기사문을 씀으로써 박씨 실수를 축소시켜주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유감’과 관련한 예는 또 있다. 얼마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문제가 불거졌을 때, 노무현 대통령의 사저를 가리켜 아방궁 운운했던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에게로 화살이 날아갔다.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온 나 후보는 노 대통령 사저와 관련한 발언에 대해 사과할 뜻이 없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제 말로 인해 가슴을 앓았던 분들에게 ‘유감’을 표시하겠습니다.”  

나씨는 분명히 유감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는데,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당사자가 그 말을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
국어사전에 의하면 유감(遺憾)이란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씨는 유감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는 입장인 게 분명하다. 일제 만행에 대해 가해자인 일본은 사과를 해야 하고 피해자인 우리 측이 유감을 나타낼 수 있는 것처럼, 명확하게 사과해야 할 나씨가 자기 말로 상처받은 쪽에 유감을 표시한다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소통의 고리인 말과 글은 사용자 의식 수준을 반영하는 법이다. 기자는 사회 각처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와 정보를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과 글을 사용하는 데 있어 누구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허물이 드러났을 때 진정성이 담기지도 않은 어쭙잖은 말로 면피하려들기보다 솔직하게 사과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가 물었다.

“만약 재상이 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공자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바른말을 하는 습관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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