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와 전통으로 달리는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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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와 전통으로 달리는 '별장'
  • 박병일
  • 승인 2011.11.2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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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일 명장의 자동차 이야기] 롤스로이스(Rolls-Royce)


롤스로이스 팬텀2

명예와 전통의 자부심

롤스로이스에는 명예와 자부심, 그리고 전통과 귀족적인 품위가 담겨 있다. 롤스로이스는 돈이 많다고 해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차가 아니다. 명예와 존경할 만한 인격,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지위를 갖춘 사람만이 탈 수 있는 차다.

롤스로이스만큼 우아하고 부드럽게 달리는 차는 이 세상에 없다. 시속 125km로 달려도 차 안에서는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아무리 빨리 달려도 롤스로이스 안에서는 커피 잔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처럼 부드럽고 빠르고 편안하고 조용하게 달린다고 해서 롤스로이스는 ‘달리는 별장, 황제의 차, 달리는 요트’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1904년에 롤스로이스사가 세워진 이후로 90년 동안 롤스로이스는 최고의 차로 군림해 왔다.

일찍이 롤스로이스사를 세운 로이스는 최고의 차를 원했다. 만약 그런 차가 없으면 자신이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로이스는 무슨 일을 하든지 완벽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조금이라도 더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로이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도 롤스로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기술자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 그래서 차 한 대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열 달이나 되는 것이다.

1년에 6천 대 정도만을 만들어 내는 롤스로이스는 다시 말해 조금 만들되, 잘 만들어 최고로 비싸게 파는 자동차인 것이다. 그래서 1995년, 롤스로이스가 탄생한 지 91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세상에 태어난 롤스로이스는 10만 대를 넘지 않는다.

롤스로이스의 상징 - 승리의 여신 '나이키'

고급 승용차에는 그 승용차를 표시하는 독특한 상징물이 있다. 보닛 앞 중앙에 달려 있는 이 엠블럼은 공기를 가르며 앞으로 질주하는 배의 뱃머리처럼 멋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그 자동차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다. 롤스로이스의 엠블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나이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보닛 앞머리 한가운데 10cm쯤 솟아 있는 이 빛나는 여신상은 예술품처럼 정교하고 아름답다.

싱그러운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리는 옷자락, 아름답고 자신감에 넘치는 여신의 모습, 우아한 자태 ……. 하늘로 솟아오르는 여신 나이키의 이와 같은 모습은 품위를 지닌 명차, 롤스로이스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 이 나이키 여신상이 탄생한 것은 1909년이었다. 그 전까지는 주로 희귀한 인형이나 동물 같은 것들이 엠블럼으로 쓰였는데, 미술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롤스로이스의 관리 부장 끌로드 존슨은 아무래도 이런 것들이 롤스로이스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롤스로이스에 어울리는 엠블럼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1901년, 당시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찰스 사이크스에 의해 롤스로이스의 마스코트가 탄생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나이키 여신상에서 힌트를 얻은 이 여인상은 얼굴, 손, 발은 물론이고 가느다란 주름 하나하나까지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어, 보는 순간 사람들 모두가 ‘황홀하다’고 탄성을 지를 정도였다.

롤스로이스의 탄생

주문 생산으로 만들어지는 롤스로이스는 그 유명한 라디에이터 그릴의 가느다란 쇠창살 하나하나까지도 경험 많은 기술자들이 직접 만든다. 또 롤스로이스 한 대에는 엄청난 양의 최고급 스칸디나비아산 가죽이 쓰이는데‘차체는 썩어도 가죽은 남는다.’고 말할 만큼 좋은 가죽으로 무려 40명의 전문 기술자들이 직접 손으로 바느질하여 만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롤스로이스의 엔진은 정기검사 외에는 특별 검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 시장에 나오기 전에 1만분의 1까지 정밀한 검사를 받기 때문이다. 또한 롤스로이스에는 차 한 대마다 역사책이 한 권씩 따른다. 만들고 검사하는 모든 과정을 한 권의 책속에 기록하기 때문이다.

롤스와 로이스가 만든차

롤스로이스의 앞쪽 라디에이터 그릴 머리에는 영문자 RR이 새겨져있다. RR은 롤스로이스를 탄생시킨 두 사람의 이름, 롤스(Rolls)와 로이스(Royce)의 머릿글자 R을 따서 만든 것이다.

가난한 신문 배달 소년이었던 프레드릭 로이스와 귀족의 아들로 부유하게 자란 롤스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프레드릭 로이스는 1863년 영국의 랭카셔 주 앨월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이 아주 가난해서 로이스는 아홉 살 때부터 집안을 돕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 한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기술자가 되는 것이었다. 괜찮은 기술 하나만 있으면 식구들이 밥 굶지 않고 오손도손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로이스는 뛰어난 기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열네 살 때, 철도 공작소에 견습공으로 취직한 로이스는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3년 후, 그 회사는 경영이 어려워져 문을 닫고 말았다. 로이스는 전기 회사로 옮겨 낮에는 전기 기술을 배웠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 다녔다.

스물한 살이 되면서 로이스는 회사를 그만두고, 친구와 함께 전기 제품을 만드는 로이스 전기 회사를 차렸다.

로이스 회사는 날로 번창했다. 로이스는 아무리 조그만 물건이라도 최선을 다해 우수한 재품만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손님들은 로이스 회사의 제품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을 벌게 되자 자동차에 흥미를 갖게 된 로이스는 프랑스에서 ‘데까베’라는 10마력짜리 차를 들여왔다. 하지만 그 차는 출발하기가 힘들고, 엔진은 쉽게 과열되는 데다 소리도 너무 시끄러웠다.

로이스는 그 날부터 공장 한 구석에 자동차 제작실을 만들고 자동차에 매달렸다. 그러기를 1년 여, 로이스는 드디어 1903년 12월에 자신이 직접 설계한 차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로이스의 차는 조용할 뿐 아니라, 시동이 잘 걸렸으며, 매우 편안했다. 그 후 로이tm는 자동차 회사를 차렸다.

한편, 롤스는 남작의 아들로 명문 이튼 고등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또한 그는 모험심이 강해서 뭔가 신기한 것이 있으면 꼭 해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젊은이였다. 게다가 롤스는 대학 때부터 자전거와 자동차 경주, 축구를 좋아했던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열아홉 살이 되자, 롤스는 프랑스에서 푸조를 들여와 몰고 다녔다. 그 당시 케임브리지 시에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롤스뿐이었다. 롤스는 유럽에서 나온 차라는 차는 모조리 다 타보았으며, 자동차 경주가 열릴 때마다 빠지지 않고 출전하는 열렬한 자동차광이었다.

롤스는 당장 로이스 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가

훤칠한 키에 얼굴도 잘생겨서 런던 사교계에서 꽤나 유명했던 롤스는 1902년에 외국 차를 수입해 파는 자동차 판매 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그는 늘 ‘왜 영국에서는 프랑스만큼 좋은 차를 만들지 못할까?’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롤스는 에드먼드라는 사람의 소개로 로이스를 만나게 되었다. 롤스는 로이스가 만들었다는 차 이야기를 듣고 당장 로이스의 자동차 공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 차는 다른 차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롤스는 대단히 실망했지만, 에드먼드의 권유로 못 이기는체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시동을 켜는 순간, 롤스는 깜짝 놀랐다. 로이스가 만든 차는 이제껏 한 번도 타 보지 못한 완벽한 차였던 것이다. 롤스는 그 길로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차에서 뛰어내려 로이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동차 기술자입니다. 이 차는 내가 타 본 것중에 가장 훌륭한 차입니다.”

로이스가 공을 들여 개발한 차는 프랑스 자동차보다 스피드나 힘, 승차감이 훨씬 뛰어났다, 이렇게 해서 롤스와 로이스는 손을 잡고 롤스로이스라는 자동차 회사를 세웠다.

그 후, 롤스는 로이스가 만든 차를 몰고 자동차 경주마다 모조리 출전했다. 물론 일등은 언제나 롤스의 차지였다. 또한 롤스는 귀족이나 직급 높은 군인, 부자들이 모이는 파티에 부지런히 참석해서는 자신의 차를 열렬히 선전하고 다녔다. 사교계의 왕이었던 롤스의 말에 귀족들과 부자들은 귀를 기울였고, 롤스로이스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했다.

자동차 판매의 천재였던 롤스는 롤스로이스 회사를 잘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그는 모험심이 강해 자동차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보다 빠르고 스릴 넘치는 비행기 붐이 일기 시작하자, 롤스는 비행기에 빠져들었고, 도버 해협을 최초로 왕복 비행하여 이행기 조종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1910년 프랑스에서 열린 비행 대회에 출전했던 롤스는 서른네 살의 아까운 나이로 죽고 말았다. 도버 해협을 건너다가 비행기 고장으로 추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불후의 명작 '은빛 유령'

1906년에는 불후의 명작 ‘실버 고스트’가 탄생했다.

런던 모터쇼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 차는, 6기통 7,000cc급에 60마력의 강력한 엔진으로 시속 125km를 내는 고급차였다. 또한 실버 고스트는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상관없이 스피드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어를 바꾸기가 간편해 운전에 서투른 초보자라도 다루기 쉬웠다.

1927년까지 20년 동안 모두 8,420대가 생산된 실버 고스트는 롤스로이스를 세계 최고의 훌륭한 차로 만들어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1907년형 실버 고스트는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차이다. 이 차는 영국의 런던 시내 한복판에 있는 헤로즈 경매상에서 한 달 동안 전시 된 후 경매에 부쳐졌는데, 우리 돈으로 자그마치 18억 6천3백만 원에 팔렸다. 이는 1961년에 18억 4천만 원에 팔린 1961년형 페라리 250GTi

베를리네타 콤페티치오네의 기록을 깬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실버 고스트, 즉 은빛 유령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 차의 차체가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고, 헤드라이트, 범퍼 등에 은 도금을 해서 이 차가 달릴 때면 마치 은빛 유령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버 고스트는 탄생 하자마자 엄격한 테스트를 받았다. 런던에서 출발한 실버 고스트는 전국을 돌아 글래스고우라는 곳까지 무려 22,994km의 거리(서울과 부산 간을 마흔 여섯 번 정도 왔다갔다하는 엄청난 거리)를 달렸다. 그 동안 단 한번 멈췄을 뿐, 실버 고스트는 그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렸다. 단 한번 멈추었던 것도 진동 때문에 연료 탱크의 마개가 저절로 잠겼기 때문이었다. 이 테스트가 끝나고 나서 실버 고스트를 점검했는데, 들어간 총 수리비용은 겨우 2파운드 2실링 7펜스였다. 그것은 롤스로이스의 수많은 전설 가운데 1호가 되었다.

롤스로이스의 차들

현재 롤스로이스가 생각하고 있는 차의 종류로는 실버 스피리트, 실버 스퍼, 코니쉬, 벤틀리, 컨티넨탈 R 등이 있다.

팬텀 시리즈

1935년부터 내놓기 시작한 팬텀 시리즈에서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만든 수직형 라디에이터 그릴이 처음으로 선보였다. 수직형 라디에이터 그릴은 그릴 머리의 RR 표시와 함께 롤스로이스의 상징으로 이어 내려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1936년 탄생한 팬텀 3은 비행기 엔진을 달았고, V형 12기통 엔진에 배기량은 7,340cc에 달했다. 최고 시속은 150km였고, 차 무게도 2.7t이 넘었다. 로이스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차로, 당시의 차중에서 최고의 걸작품이었으나 제 2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1939년까지 717대밖에 생산하지 못했다.

실버 시리즈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 만든 실버 레이드는 1947년부터 1959년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6기통에 배기량이 4,257cc이며, 디자인도 깔끔했고, 성능도 아주 뛰어났다.

이 실버 레이드의 성공으로 실버 시리즈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실버 돈(1949~1955), 실버 클라우드 1 ‧ 2 ‧ 3(1955~1962), 실버 섀도우 1 ‧ 2(1965~1980)와 1980년 이후의 실버 스피리트와 실버 스퍼가 그것이다.

실버 스피리트는 롤스로이스가 자신있게 내세우는 최고의 자동차로 ‘달리는 응접실’이라고 불리는 명차로, 시속 190km로 달려도 안전하고 편안하다. 최고 시속은 204k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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