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짜기와 독선'은 이기심의 다른 표현
상태바
'편짜기와 독선'은 이기심의 다른 표현
  • 유은하
  • 승인 2011.11.27 15: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칼럼] 유은하 / 화도마리공부방



며칠 전 학부모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에게 재수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해서 전화했습니다."

전화기 저쪽에서 언짢은 속내를 참으며 정중하게 항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말인가? 정신이 아득한 상태에서 문득 몇 시간 전 일이 떠올랐다.

계속 내 맘을 불편하게 했던 3학년 남자아이가 있었다. 누가 야단치지 않아도 스스로 잘못한 일이 있으면 야단 맞을까봐 공부방 주위를 빙빙 돌면서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였던 아이다. 한동안 공부방에 나오지 않아 할머니를 만나 만약 억지로 공부방에 오는 것이라면, 주말에 오는 아빠와 의논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해달라고 했던 차였다.  

그러던 중 아이가 우연히 공부방에 왔는데, 태권도 학원에서 집에 데려다 주지 않고 습관대로 공부방에 데려다 준 바람에 아이가 뜻하지 않게 공부방에 온 것이다. 아이는 들어오자마자 어색한 표정과 화가 난 표정을 동시에 지으면서 말하였다.

"아이, 태권도 학원에서 공부방에 데려다 주었어요 그래서 오게 되었어요." 하며 마치 오지 않아야 할 곳에 오게 되었다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그날 따라 아이들이 평소에 '재수 있네 없네' 하면서 서로 미운 말을 쓰면서 친구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조심하자고 했던 시간을 가졌었다. 

"아이고, 오늘 너 재수 없구나. 오기 싫었는데 태권도학원에서 억지로 여기에 데려다 주었으니 재수없네."라고 말해버렸다. 그것도 하이톤으로. 아이들한테는 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고 방금 전에 말해놓고는 내가 먼저 말해버린 것이다. 

아이는 내가 저를 재수없다고 말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빠에게 전화를 한 것 같다. 그러니 아이 아빠는 항의를 하게 된 것이다.

당황한 나는 그날 일의 자초지종을 말하느라 아빠의 말을 계속 끊으면서 내 입장만 전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런 일은 절대 없노라고 애가 오해한 것이라고. 아이 아빠는 설명을 듣고 상황은 이해하였으나 자신의 입장만 전달하는 나에게 화가 났다. 

"10살짜리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날 지가 도착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조심해주세요.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하면 서로 웃으며 끝날 일인데, 왜 선생님 입장만 말씀하십니까?" 

처음에 나는 매우 속상하고 섭섭했지만 이내 사과하였다. 아이가 그렇게 상처받았을 거라고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좀 더 사려깊지 못했다고. 아이에게도 곧바로 전화해서 마음을 풀어주고 그렇게 생각하게 한 건 오로지 내 잘못임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독선! 그날 나는 독선적이었다.

내가 그런 맘을 품은 적이 없고 그런 적이 없으니, 상대가 오해한 것이라고 나의 입장만 옳은 것임을 줄곧 뱉어낸 것이다.

'독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누구나 다 알고, 그 독선을 행하는 사람만 모르는 독선도 있다.

게다가 나는 다른 이들에게 그날 상황은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당신들도 그날 그 자리에 있었지 않았느냐고, 애가 오해하니 너무 속상하다고 동조자를 얻어내는 편짜기까지 하였다. 편짜기도 독선이다.

편짜기와 독선은 결국 이기심의 다른 표현이다. 이기심은 때로는 감정으로, 때로는 논리로, 또 어떤 때는 이익으로 탈을 쓰는 것이다. 

내게 깊게 드러나 있는 독선으로 인해 내내 마음이 지옥이다. 어찌 이 하늘 아래 홀로 옳음이 존재한단 말인가?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다'라는 직업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고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이들이 어떤 모습을 드러내도 그들에게 한결 같은 마음을 지닌 자연스런 어른이 아니라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배울 수가 없다.

금새 이러저러하면 안 된다고 해놓고 내가 먼저 잘못된 방식을 취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가르친다는 것이 대수학 같은 게 아니라고, 공식을 적용하고 준비된 해답을 얻는 문제가 아니라고, 그것은 공허한 말장난일 뿐이라고 하면서 내게만 관용을 베푸는 그것은 얼마나 무지한 행동인가.

참다운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일방적인 가르침은 독선을 낳는다. 교사는 아이 옆에서 배워야 한다. 태양은 아무에게도 그 빛을 '주는' 게 아니지만, 그러나 모두가 가장 자연스럽고 쉽게 그 빛을 받는다. 삶에서, 생활에서 절연된 것은 무엇이든지 가르칠 힘을 상실한다. 교육을 삶과 삶의 문제에서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죽은 것이다. 가르치는 일은 실제 생활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

아이들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푸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야 한다. 아이들이 실제로 살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교사라고 일컬어지는 특별한 범주에 속해 있어서는 안 되며, 실제 세계에서 보통 생활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 아이들을 지도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아이들의 생활을 지성적으로 이끌어야 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삶과 일의 과정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세상은 두려운 어떤 존재일 수 있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을 해서는 안 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으니 성장할수록 세상은 두렵다. 세상이 두렵지 않게 인식되려면 참다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참다운 교육은 '두려움 없음'이다.

'두려움 없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다른 존재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랑이를 두려움이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호랑이는 다른 동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지 모르지만 총을 겁낸다. 그리고 호랑이는 다른 생물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참다운 '두려움 없음'은 노예처럼 타자에게 복종하는 것도 아니고, 타자를 노예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두려움 없음'을 위한 유일하게 충분한 기초는 자기인식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