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꽃과 같은 동네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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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꽃과 같은 동네였으나…'
  • 김도연
  • 승인 2010.03.06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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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⑥ 중구 신흥동

취재 : 김도연 기자

중구 신흥동(新興洞)에는 오래된 문화유적지나 주목할 만한 관광 상품이 별로 없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에게는 특별할 것이 없는 동네로 인식되기 쉬운 곳이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신흥동 안에는 개항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시기에, 인천의 대표적 역사가 상당하게 들어 있는 곳이다.
 
인천시사에 따르면 신흥동은 구한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의 일부로 개항 이후에 생긴 마을이다. 개항 초기만 해도 시 외곽 지역이어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 청일전쟁 당시 사망한 일본군의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신흥동 일대에는 개항 이후 일본군 공동묘지가 위치했다.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이름도 없던 이곳에 1903년 '화개'(花開)동이 생긴다. '꽃이 핀다'는 뜻의 '화개'라는 이름에서 짐작 할 수 있듯이 과거 이 동네에는 사창가가 있었다.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에 들어오는 일본인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그들을 따라 들어온 몸을 파는 일본인 여성들이 이 주변에 자리를 잡고 생활했던 탓이다.
 
실제로 나이 지긋한 동네의 한 어르신은 "일제 때에는 지금의 시장이 있던 지역에 소위 말하는 '유곽'이 많았다"고 증언한다. 그래서 이곳은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빠가동'으로 오르내렸다. 이 말은 '화개'와 유곽이 묘하게 접목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사창가는 그 후 일제 총독부가 공식 인정한 '공창'으로 됐다가 광복 직후에 폐지된다.
 
지금의 신흥동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광복 이후부터다. 글자 그대로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한다'는 뜻이다.

현재 3.52㎢ 면적에 6천900 세대 1만6천533 명이 거주하고 있다. 법정동으로는 신흥동1가, 신흥동2가, 신흥동3가, 선화동이 있다.
 
신흥동에는 불과 27년 전만 해도 신선동이란 곳이 있었다. 1983년 생겼다가 15년 뒤인 1998년 신흥동으로 통합되면서 없어졌다.

지금은 과거 신선동사무소로 쓰였다는 건물만 남아 과거 이 지역에 신선동이란 곳이 있었다는 것만을 말해준다. 신선동사무소로 쓰였던 건물은 현재 신흥동 주민자치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신흥동 주민센터는 원래 지금의 건물이 아니었다.  신 청사로 이사를 온 것은 1993년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현 위치에서 신흥초등학교 방향으로 200여 m 정도 떨어진 빌라촌 지역에 있었다.

화랑4길 길가에 위치한 옛 주민센터 건물은 지금은 철문을 닫아걸고 사람의 발길을 막고 있다.

이곳이 불과 17년 전만 하더라도 동네 주민들이 각종 민원서류를 떼기 위해 수없이 드나들던 주민센터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인근 지역 주민들일 뿐이다.

중구청이 이 옛 주민센터 건물을 리모델링해 도서관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니, 다시 한 번 주민들로 북적일 날이 올 듯하다.
 
'화개동'이란 이름을 만든 '사창업'은 신흥동 일대 역사를 소개할 때 빠질 수 없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유곽으로 형성된 사창업은 해방 이후 지금의 독갑다리 부근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소위 말하는 '옐로우 하우스'로 이동한다.

실제로 신흥시장 앞쪽 신흥로터리 부근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 직전까지도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사택들이 꽤 많았다고 한다.
  신흥시장에서 수십 년 석유집을 운영하는 박남석(65) 씨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지금의 국제경양식 앞쪽하고 구 파출소 건물 앞쪽으로 일본인 집들이 많았다"며 "그 일본인 집들의 지붕이 동(銅)으로 돼 있어 동네 친구 녀석들이 몰래 동판을 잘라다가 엿을 바꿔 먹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의 거주지가 있던 신흥시장 일원.

그 당시 유곽은 해방 이후까지 운영되다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일제히 정리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사창 산업은 독갑다리 인근, 지금의 숭의공구상가 부근으로 옮겨간다.

신흥시장 앞에서 30년 넘게 꽃 직매장을 하고 있는 정정자(56·여) 씨는 "여기에 터를 잡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는 '중요한 손님접대는 독갑다리 색시집에서 한다'는 말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로 유명했다"고 말했다.
 
사창업 이전 후 신흥시장 일대에는 술집들이 밀집했다고 한다.

인하대병원 뒤쪽에서 출입국관리사무소 일원에 이르는 신흥 3동 일대는 예전에는 상당 부분 바다였다. 1910년대에 창고 터로 일부가 매립됐고, 1960년대에 대규모로 또 매립돼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지금도 부두가 있지만 매립 이전에도 작은 부두가 있어서 이 일대는 부두 노동자들의 삶이 묻어나는 곳이다.

예전에 작은 부두가 있었던 자리.
 
꽃 직매장 정 사장은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6시 땡 하면 부두에서 자전거 부대가 일제히 빠져나와 시장으로 그 행렬이 이어졌다"며 "그들이 시장 일원 술집에 모여들어 각 술집 앞에는 자전거가 수 십대씩 세워져 있었다"고 기억했다. 부두 노동자들이 일을 마치고 나면 신흥시장 일원 술집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신흥시장은 여느 재래시장보다 장사가 훨씬 잘 되는 곳이어서 '부흥기'였다고 한다.
 
신흥시장은 인천에서 아주 오래된 재래시장 가운데 한 곳이다. 신흥동을 이야기하면서 신흥시장을 빼놓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을 먹는 것과 같다. 신흥동 지역 흥망과 성쇄를 이끈 것이 신흥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규모는 작지만 아주 오래된 신흥시장.

신흥시장은 1953년부터 상설화를 맞았다. 지금도 시장 중심부 아케이드 안쪽 몇몇 점포들은 40년 이상 꾸준히 영업을 해 오고 있다.

신흥시장상인회 신용환 회장은 "상인 중에는 65세 이상 된 사장님들이 전체 회원의 25%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오랫동안 시장과 함께 지낸 분들이 많다"며 신흥시장의 오랜 전통을 강조한다.
 
주요 품목들은 축산품과 야채 등이다. 다른 재래시장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시장 중심 골목도 수십 미터에 불과하다. 한 때는 상인회 소속 회원 점포가 30여 곳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중앙 골목 이외에 시장 주변 상인들이 함께해 65개 점포가 들어서 있다.
 
신흥시장의 부흥기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두 노동자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그리고 현 인천시보건환경연구원 자리에 인천의료원이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시장은 활기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7년 인천의료원이 동구로 이전하면서부터 점점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2001년에는 인근 지역에 대형마트까지 들어서면서 신흥시장도 다른 여느 재래시장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요즘 신흥시장은 스스로 활성화화기 위해 노력 중이다. 공영주차장을 마련하고 새로운 구간에 아케이드를 설치해 현대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상인회도 시장주변의 모든 점포들에 대해 회원 가입을 유도해 현재 회원수를 100여 명으로 확대했다.
 
신 회장은 "현재 100여 곳의 점포들이 함께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더 늘려나갈 예정이다"라며 "앞으로 시장 안은 물론 주변 점포들까지 모두 참여해 예전의 성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역의 재래시장이 활기차게 운영되는 모습을 갖출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흥시장과 함께 신흥동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이 바로 '수인곡물시장'이다.

수인곡물시장은 지금은 없어진 수인선 열차의 종착역 수인역으로 조성된 재래시장이다.

이름 그대로 곡물만을 판매하는 특성화한 시장으로, 국내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곡물류를 판매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 곳 역시 수인역이 없어지고 인접한 농협 공판장마저 없어지면서 쇄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어 자구책 마련이 필요하다.
 
옛 구도심 권에 속하는 신흥동에는 인천을 대표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새얼문화재단(신흥동3가 7-241)이다.

1975년에 설립해 인천지역 학술·문화 활동 등에 전념해온 새얼문화재단은 1975년 근로자 자녀들을 위한 장학회로 시작해 1983년 지역사회와 문화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새얼문화재단으로 확대 개편됐다.
 
새얼문화재단의 설립목적을 한 번 보자. 

'나라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영재를 육성하고, 학술과 문화 진흥을 위해 새로운 문화의 창조와 활동을 지원하며, 나라와 환 황해권의 중심인 인천지역의 특성을 연구 개발하여 미래에 대한 과제를 주도적으로 풀어 나가고, 우리고장에 대한 사랑과 환경개선을 통하여 삶의 질을 높여 품위 있는 사회와 생활을 주도하는 데 기여한다.'

새얼문화재단의 초창기 아침대화 모습. 
 
이러한 재단의 취지에 찬동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주축으로 후원회를 구성해 운영한다. 장학사업, 아침대화, 백일장, 국악 등 음악행사, 계간잡지 황해문화 발간, 역사기행, 새얼문화상 시상, 학술활동 지원 등의 사업이 활발하다.
 
중구 신흥동은 마치 꽃과 같다. 한 때는 만개해 그 아름다움을 뽐냈지만, 지금은 시들고 꽃잎이 떨어져 조금은 초라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다시 햇볕을 받고 물을 머금으면 다시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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