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청바지를 찢어 입는 시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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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청바지를 찢어 입는 시대지만…
  • 하석용
  • 승인 2011.11.28 15: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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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하석용 / 공존회의 대표 · 경제학 박사


"유행이란 현명한 자가 조소하면서도 그 명령에 따르는 폭군이다."
 
평생을 신랄한 풍자 속에서 살다가 간 앰브로즈 비어즈라는 미국인이 그가 지은 '악마의 사전'이라는 책에 남긴 유행에 대한 정의이다.
 
일생을 유행과 결별하고 사는 인간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제 집단 같은 예외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언어와 신앙에 대한 자세, 수행의 형식, 심지어 즐기던 음식과 예술의 영역까지를 추적하고 보면 그들이라고 유행과 결별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존재이고 무리에는 항상 무언가 공통된 흐름과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아마도 그 동력은 인간의 변덕과 권태에서 비롯한 것일 듯도 하고, 일정 부분은 한 순간도 만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이카루스적' 본성에서 연유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유행과 구분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발전'이라는 게 있다. 인간의 욕망에 기초하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둘은 강한 유사성을 갖는다. 실제로 예술사에서 드러나는 풍조의 변화가 유행인지 발전인지를 논하는 것은 실로 지난(至難)한 일이다. 인간의 표현과 감동의 영역 확대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칸딘스키의 '차가운 추상'은 분명 고전주의 회화보다 진보한 것이겠지만, 도저히 추상에서는 감동을 느낄 수 없고 인간은 언제고 다시 고전주의나 사실주의로 돌아갈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에게 그것은 방황하는 유행일 뿐이다. 어차피 어느 누구도 인류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모든 철학의 사조조차 굳이 유행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나는 솔직히 말을 타던 인류가 자동차를 타게 된 것을 발전이라고 해야 하는지, 그래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한 때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고민의 결과로, 목표로 삼을 만한 가치가 주어졌을 때 그러한 목표에 근사하게 다가가는 경우는 발전이라 하고, 그러한 목표 값을 설정하지 못한 경우라면 그저 현상 또는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다고 정리를 하였다. 
 
예를 들어 인간이 빠르게 이동하여야 하는 것을 가치 있는 목표로 설정하였다면 자동차의 발명은 발전적인 사건이지만, 그러한 목표 가치에 동의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한낱 현상일 뿐이거나 운송수단이라는 장난감의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발전이라는 말은 방향을 드러내는데 반해서 유행이나 현상이란 표현은 특정한 방향을 갖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어의(語義)에 따라 아주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나의 이러한 견해에 논리적인 무리가 없다면 이러한 시각은 상당히 많은 사고의 혼란을 정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발전과 이웃하는 언어인 진보라는 개념도 "목표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의무를 짐지게 될 것이고, "세상의 변화와 흐름을 읽고 적응해야 한다"라는 식상할 만큼 흔해빠진 세간의 충고가 옳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기준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잣대를 오늘날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는 SNS 현상에 들이대고 보면 그 실체가 다소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SNS라는 현상이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발전의 형태로 인식되려면 그 현상이 갖는 목표가 분명해야 하고 그러한 목표는 사회적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러한 사회적인 목표가치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지구상에 언제나 있어왔던 집단적 불만 표출 방법에 또 하나의 유행이 추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는 역사를 진행하는 동안 쉴 새 없이 집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여 왔고 그러한 불만을 결집하는 형식은 무척 다양하였다. 연판장이나 집단 상소, 대자보, 서신, 전화, 도서, 지하신문, 지하방송이 있었는가 하면 집단 의식화 교육 같은 방식들도 있었다. 목하, 아랍권의 오렌지 혁명에 SNS 역할이 지대하였다고 해서 마치 그것이 없었더라면 그러한 변화가 불가능했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측들이 적지 않지만, 적어도 역사는 그러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SNS가 없던 시절에도 인류는 지금보다 몇 배 더 치열한 혁명과 반란을 수행해 낸 역사적인 기록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짐작할 일이겠지만, 나는 이러한 도구의 변화를 이 사회 문제의 본질적인 변화로는 보지 않는다. 선동의 기술이 발달하거나 전파의 속도가 빨라진다고 해서 사회적인 문제의 본질이 달라질 이유는 없다. 언제나 문제의 본질은 불만의 내용에 있는 것이지 전파의 수단과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보여준, SNS에 결집된 불만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사회에 언제나 상존해 왔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불만들인가, 아니면 그로부터 진화한 집단적 공존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목표 지향적인 불만이었을까. 그것이 전자라면 우리는 이러한 결집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설사 그러한 결집의 에너지로 정권이 바뀌고 심지어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봤자, 그 다음에 들어앉게 될 사회 구조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질 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다시 실패한 혁명의 소란과 낭비를 남길 뿐이다.  
 
물론 나는 우리 사회의 현상이 후자이기를 원한다. 그러한 불만이 애국이나 애향의 목표를 갖기를 원하고 최소한 남과 행복을 공유하려는 도덕적인  목표를 갖기를 희망한다. 그럴 때에 불만은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되고 SNS는 비로소 발전의 도구로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답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후자 쪽으로 눈길이 가질 않는다. 특히 SNS라는, 산채에 똬리를 틀고 앉은 염치없는 '두목'들의 경박함과 무책임한 기회주의에 마음을 주어야 할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함께 살려고 하지 않으면 결코 혼자서도 살 수 없다는, 인식의 본질적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유행에 호들갑을 떨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세월이 가면 결국 모두 다 같아질 욕심들이 아닌가. 
 
지금은 청바지를 찢어 입어야 하는 시대이지만, 결국 세월이 가면 또 다시 안 찢은 옷을 입든지 아예 모두 벗어버리든지 어차피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밖에 없다. 나 또한 비어즈의 말처럼 이러한 유행에 얹혀살기는 하지만, 나는 오늘도 옷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인간들의 시대를 꿈꾼다.


요즘 유행하는 '부킹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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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ㅎ 2011-11-28 16:30:33
소셜네크워크서비스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 라는 것이 세상을 가른다는 것은
근대를 알리는 기차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돌아갔고 그에 따라 다른 세상이 ㅈ시작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요지이지 않을까요?
기차에 무엇이 실려있었느냐가 아니라 기차가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변했다는 것이죠. 진보니 발전이니 하는 것은 무의미한 말장난일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하지만
어떻게 이용해야 발전이냐 아니냐는 아니라고 봅니다.
밞명품을 잘 이용하자는 뜻이라면 맞지만 유행이냐 아니냐의 관점은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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