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이 기억한 1000번의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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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이 기억한 1000번의 수요일
  • 이영주
  • 승인 2011.12.06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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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이영주 /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948차 수요시위(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제공)
 

"일본정부의 공식사죄, 법적배상!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명예와 인권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소속 회원들이 매주 수요일 낮 12시, 1992년부터 지금까지 한 주도 쉬지 않고 외친 구호이다. 수요일이면 주한일본대사관 앞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난과 인권을 상징하는 보라와 노란 나비들이 넘실거렸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동의하는 어린 학생부터 허리 굽은 노인까지 그 자리에 함께 했다.

오는 12월 14일이면 수요시위가 1000회차를 맞는다. 1000이라는 숫자가 가늠이나 되는가? 일주일에 한 번씩 1000차. 1000주면 자그마치 20년이다. 20년이면 사람이 갓난아기에서 성인으로 자랄 세월이다. 그 세월, 20년 동안 매주,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바람이 외쳐졌다면, 하늘도 감복해 허무맹랑한 소원이라도 들어줄 정성 아닌가.

더구나 이 외침은 밑도 끝도 없는 허무맹랑한 요구도 아니다. 전쟁을 일으킨 자가 분명히 있고, 그들이 전쟁에 여성을 성적인 노예로 강제로 끌고 간 역사적 사실이 있다. 가해자가 분명하고 피해자가 분명히 존재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가해자인 일본정부에 공식사죄와 그에 따른 법적배상을 요구하는 지당한 외침이 20년 동안 1000번이나 일본대사관 앞에서 울려 퍼졌음에도, 여전히 일본정부는 침묵하고 있다. 아니, 그냥 침묵이 아니라 총리가 바뀔 때마다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모집에 동원된 것"이라는 망발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심지어 한국의 유명한 지식인, 정치인들조차 일본 정치인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외운다.

1000회차가 너무 적은가? 20년이 너무 짧은가? 그 세월 동안 용기를 내어 역사를 증언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어느덧 팔순, 구순을 넘겨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계시는데? 이제 겨우 66분의 할머니들밖에 남아 계시지 않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얼마나 오래 외쳐야 하는가?

국가에 의한 폭력에 너무나 관대한 우리

왜 20년 동안 1000번의 외침이 이렇게 허공의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이 말하듯 국력의 문제인가? 에이, 만날 정부에서 말하듯 한국은 선진국의 보증수표 OECD씩이나 가입한 국가이고 G20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국격을 가진 나라 아니었던가? 그 정도 국격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니었던가?

솔직히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만 있었어도 어떤 식으로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매우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현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고, 지난 달 일본총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향력 있는 소위 보수논객들은 일본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다 옮기기 바쁘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일본정부가 허리 굽은 할머니들이 1000번을 외친들 귓등으로나 듣겠는가.

이렇게 한국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는 '국가적 폭력에 대처하는 우리의 미온적인 자세'의 역사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국가적 폭력은 개인 간의 감정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공식적으로 매우 철저하게 해결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폭력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단순히 "일본놈은 나쁜 놈"이라는 식의 반일감정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독일과 유럽사회가 나찌에 대한 재판과 처벌을 철저히 한 것은 단순히 "나치는, 히틀러는 나쁜 놈"이어서가 아니라, 무자비한 폭력이 국가를 통해 저질러질 때 얼마나 큰 비극의 역사, 광기의 역사가 펼쳐지는지 뼈아프게 깨닫고 반성했기 때문이다. 국가적 폭력은 그 영향력이 개인의 폭력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국가적 폭력에 대해 제대로 처벌한 역사가 없다. 4.19든 5.18이든 1987년 6월항쟁이든 교과서에 기록된 (물론 그 기록마저 삭제될 위험에 처해 있는 요즘이지만) 굵직굵직한 민주화운동은 국가에 의한 폭력이 시발점이었다.

교과서에 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되긴 했으나, 폭력의 가해자였던 국가기관과 그 책임자가 공식적으로 처벌된 예는 사실 거의 없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학살자로 지목되었던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여론에 떠밀려 재판정에 서긴 했으나, 현재 재산이 29만원밖에 없어 벌금도 못 내시면서도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 대선 후보들이 알아서 인사 조아리는 자리에서 여전히 지내고 계시고.

식민지시대 친일세력이 해방 이후 과거 청산 없이 고스란히 집권세력이 되었고, 그렇게 세워진 국가가 국민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할 때마다 항쟁이 일어났지만 결국 유야무야 처벌 없는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국가적 폭력에 너무나 관대한 우리가 일본의 국가적 폭력인 태평양전쟁에 관대하고, 그 전쟁 중에 벌인 여성에 대한 성착취였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그저 윗대가리들은 다 그래, 라거나 일본놈 나쁜 놈 식의 감정을 배설하는 것으로 국가적 폭력에 눈감는 것이 습속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유럽사회가 독일 나치 부역자들을 단호하게 처벌했다고 해서 독일과 다른 유럽국가와의 관계가 어그러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철저히 과거와 결별하려는 국가적 차원의 움직임이 있었기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독일이라는 한 나라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나치라는 한 세력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광기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자기반성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일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해서 과거는 과거로 묻어두어야 한다는 식자들은 국가적 폭력에 대한 반성 없는 관계설정이 가져올 암울한 미래가 과연 미래지향적인지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은 한국정부 스스로 자기반성의 기회를 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본의 폭력에 대해 눈 감아 주는 '국가적 폭력에 대한 관대함'은, 한국정부가 베트남에 가서 저지른 전쟁폭력에 대해서도 침묵할 배포를, 국민들의 작은 반발에도 큰 폭력으로 답할 용기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전쟁, 여성, 인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몇몇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에 새겨진 진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내지 못한 은폐된 진실이다. 이 진실을 드러내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비극의 역사는 다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모든 전쟁이 숱한 이유와 근거를 들이대며 자신의 정당함을 설파해왔다. 그러나 그 어떤 전쟁도 전쟁 전에 내걸었던 이유와 근거만큼의 행복도 평화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 미국이 전 세계에 정당성을 선포하며 벌인 테러와의 전쟁이 전 세계에서 테러를 사라지게 했는가? 아니, 오히려 보복에 보복을 더한 살육의 고리를 더욱 더 단단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9.11참사로 슬픔에 빠진 국민정서를 이용해 벌였던 그 전쟁은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희생자로 바쳤을 뿐이다.

전쟁은 이미 그 자체로 국가적으로 공인된 살육과 폭력이 난무하는 장이다. 여기서 약자들은 철저한 희생자가 된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희생을 치르는 이들이 여성인 것은, 참전하지 않고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가난한 계급의 청년인 것은, 전 세계 공통의 사실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일본정부가 스스로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법적으로 배상하는 것은, 국가적 폭력인 전쟁에 대해 국가적 차원에서 반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범국가인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그 누구도 어떠한 명분으로라도 전쟁이라는 국가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자기반성에 기초한 약속이다.

전쟁을 묻어두어야 할 과거가 아닌 살려내야 할 기억으로 끄집어내는 것, 전쟁 안에서 발생한 여성에 대한 폭력에 대해 철저히 사죄하는 것, 가해자가 가해자임을 피해자가 피해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피해자들의 인권을 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평화지향적인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방법이다.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만드는 길이다.

1000회의 외침, 평화를 세운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1000차 수요시위를 통해 과거를 끄집어냈기 때문에 그나마 우리는 다른 미래를 그려볼 기회가 있다.

1000차 수요시위가 열리는 12월 14일, 매주 수요시위가 열린 일본대사관 앞 길에 평화비가 세워진다. 평화비는 소녀의 형상으로 세워질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군에게 끌려가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그리고 소녀상 아래로는 그 소녀가 '생존'해서 아픈 과거를 증언하며 살아온 세월만큼이 쌓인 할머니의 그림자가 새겨질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20년 동안, 1000회 동안 기억해주신 역사를, 이제 우리가 평화의 미래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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