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편 공야장(公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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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편 공야장(公冶長)
  • 이우재
  • 승인 2010.03.0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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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편 공야장(公冶長)

1,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縲絏之中 非其罪也. 以其子妻之.
  子謂南容 邦有道不廢 邦無道免於刑戮. 以其兄之子妻之.
  공자께서 공야장에 대해 말씀하시길 “사위를 삼을 만하다. 비록 옥중에 있었던 적이 있으나 그의 죄가 아니었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딸을 그에게 출가시켰다.
  공자께서 남용에 대해 말씀하시길 “나라에 도가 있으면 쓰일 것이요, 나라에 도가 없더라도 형벌은 면할 것이다.”라고 하시며, 형의 딸을 그에게 출가시켰다.

  <해설> 공야장(公冶長)은 공자의 제자로 성은 공야(公冶), 이름은 장(長), 자는 자장(子長)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제나라 사람이라고 한다. 루(縲)는 검은 포승, 설(絏)은 묶는 것으로, 옥중에서 죄인을 검은 포승줄로 묶는 것이니, 감옥에 갇힌 것이다. 공야장이 감옥에 갇힌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는 『논석(論釋)』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공야장은 새의 소리를 알아듣는 기이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가 위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새들이 사람의 시체가 있다고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한 노파가 어린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것을 보고 그 자식의 시체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가, 급기야 살인범으로 몰려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가 정말 새소리를 알아 듣는다는 것이 확인되어 옥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황간의 시대까지 전해 내려온 모양이다.
  공자는 공야장이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자신의 사위로 맞았다. 공자가 공야장에 대해 얼마나 두터운 믿음을 갖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공야장에 대한 공자의 사랑이다.
  남용(南容)은 공자의 제자로 성은 남궁(南宮), 이름은 도(縚)라고도 하고, 괄(适)이라고도 한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는 남궁괄(南宮括)로 되어 있다. 방(邦)은 제후의 나라다. 불폐(不廢)는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니 쓰임을 당한다는 뜻이다.
  이상은 공자가 사위를 구한 것을 말하고 있다. 혹자는 공자가 공야장에게는 자신의 딸을, 남용에게는 형의 딸을 출가시킨 것에 대해, 공자가 공야장보다 남용을 높이 평가해 형의 딸을 그에게 출가시켰다고도 말하고 있으나, 지나친 추측인 듯 싶다.  

  <참고> 남용의 혼인에 대해서는 선진 5에 남용이 백규의 시를 몇 번이고 되풀이 외우고 있음에 공자가 형의 딸을 그에게 출가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 , 나라에 도가 없으면 … (邦有道 …, 邦無道 … ) 하는 표현은 논어 안에 자주 보이는 것들이다. 주로 군자는 나라에 도가 있고 없음에 따라 각기 처신을 달리 해야 한다는 표현들이다. 공야장 20, 태백 13, 헌문 1, 헌문 4, 위령공 6을 참고하기 바란다.

2, 子謂子賤 君子哉若人. 魯無君子者 斯焉取斯.
  공자께서 자천에 대해 말씀하시길 “군자로구나, 이 사람은! 노나라에 군자가 없다면 이 사람이 어찌 이런 군자다운 덕을 지닐 수 있겠는가?”

  <해설> 자천(子賤)은 공자의 제자로 성은 복(宓), 이름은 부제(不齊)이며 자천은 자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49세 젊다고 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찰현(察賢)」편에, 그가 선보(單父, 지금의 산동성 單현)의 읍재(邑宰)가 되었으나 거문고만 뜯으면서 당(堂)에서 내려오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선보는 잘 다스려졌다. 반면 무마기(巫馬期)는 선보의 읍재가 되어 불철주야로 노력하였다. 물론 선보는 잘 다스려졌다. 무마기가 그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가 말하길 “나는 사람에게 맡겼고, 당신은 (자신의) 힘에 맡겼습니다. 힘에 맡기면 수고롭고, 사람에게 맡기면 편안한 법입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斯焉取斯에서 앞의 사(斯)는 이 사람 즉 자천을 가리키고, 뒤의 것은 이러한 덕(德)을 가리킨다.
  자천의 덕이 자천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뭇 선배, 동료, 그리고 스승의 감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훌륭한 스승과 선배, 동료를 만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리라. 다행히 노나라에 군자가 많아 자천은 그들의 도움을 얻어 군자의 덕을 쌓을 수 있었다.
 
3, 子貢問曰 賜也何如. 子曰 女器也. 曰 何器也. 曰 瑚璉也.
  자공이 묻기를 “저는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그릇이다.”
  “어떤 그릇입니까?”
  “호련이니라.”

  <해설> 사(賜)는 자공이다. 호련(瑚璉)은 종묘의 제사 때 기장을 담아 신에게 바치는 그릇이다. 화려하게 장식한 귀중한 그릇이다.
  위정 12에서 공자는 군자는 한 가지 용도로만 쓰이는 그릇이 되어서는 안된다(君子不器)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자공을 호련이라는 그릇에 비유하고 있다. 호련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불분명하다. 주자(朱子)는 자공이 비록 그릇이 아님(不器)에는 못미치지만, 그릇 중에서는 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공자가 자공을 칭찬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或曰 雍也 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옹은 비록 어질지만 말재주가 없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말재주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말재주로 사람을 대하면, 자주 사람에게 미움을 살 것입니다. 옹이 어진가는 알 수 없지만, 말재주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해설> 옹(雍)은 공자의 제자로 성은 염(冉), 자는 중궁(仲弓)이고 옹(雍)은 이름이다. 공자의 제자 중 안연과 함께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德行 顔淵閔子騫冉伯牛仲弓―선진 2). 구급(口給)은 말재주이다.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며, 말은 항상 삼가고 조심하라는 공자의 평소의 가르침 그대로이다. 옹이 어진지 여부는 모르겠다고 하고 있지만, 그 말재주가 없는 것, 즉 말을 삼가는 것으로 볼 때, 능히 어진 자의 반열에 들 자격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5, 子使漆雕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
  공자께서 칠조개로 하여금 벼슬에 나아가게 하셨다.
  칠조개가 대답하기를 “저는 아직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기뻐하셨다.

  <해설> 칠조개(漆雕開)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칠조(漆雕), 이름은 개(開), 또는 계(啓), 자(字)는 자약(自若)이다. 
  공자가 벼슬을 권한 것은 칠조개가 그만한 학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조개가 자신이 없다고 한 것은 스스로 겸양한 것이니, 그 겸양함이 공자를 기쁘게 하였다.
  황간의 『논어의소』는 未能信을 아직 임금이나 백성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6, 子曰 道不行 乘桴浮於海. 從我者 其由與. 子路聞之喜. 子曰 由也 好勇過我 無所取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나아갈까. 나를 따를 자는 유일 것이다.”
  자로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는 용기를 좋아하는 것은 나보다 나으나, 뗏목을 만들 재목을 구할 데가 없구나.”

  <해설> 부(桴)는 뗏목이다. 유(由)는 자로의 이름이다. 無所取材는 고주의 정현에 의하면 無所取於桴材로 뗏목을 만들 재목을 구할 데가 없다는 뜻이다. 신주의 정자(程子)는 재(材)를 재(裁)로 풀이하여 “사리를 분별할 줄 모르는구나!”라고 해석한다.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아가겠다는 것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공자의 한탄이다. 그런데도 자로는 공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를 따를 자는 유라는 말에 즐거워하였다. 이에 공자가 그 용기는 가상하나, 재목이 없어 뗏목을 만들 수 없으니 어떻게 바다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면서 자로를 기롱(譏弄)한 것이다. 유명한 공자의 부해지탄(浮海之歎)이 이것이다.

  <참고> 자한 13에서도 공자는 구이(九夷)의 땅에 가 살고 싶다며, 세상을 떠나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7, 孟武伯問 子路仁乎. 子曰 不知也. 又問. 子曰 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求也 何如. 子曰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赤也 何如. 子曰 赤也 束帶立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맹무백이 묻기를 “자로는 어진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모르겠습니다.”
  맹무백이 재차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는 천승의 나라에서 그 군사를 다스리게 할 수는 있으나, 어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구는 어떻습니까?”
  “구는 천 호의 읍과 백승의 가문을 맡아 관리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습니다.”
  “적은 어떠합니까?”
  “적은 조복(朝服)을 입고 조정에 나아가 빈객을 접대하게 할 수는 있으나, 어진지는 모르겠습니다.”

  <해설> 국(國)은 제후의 나라, 부(賦)는 군사이다. 옛날에는 전부(田賦)에 따라 병사를 징발하였기 때문에 군사를 부(賦)라고 불렀다. 구(求)는 염유이다. 천실(千室)은 호구(戶口) 수가 천이라는 말이다. 백승(百乘)은 말 네 마리가 끄는 전차 백 대를 가지고 있다는 말로 대부(大夫)를 뜻한다. 재(宰)는 대부의 가신이다. 적(赤)은 공자의 제자로 성은 공서(公西), 자는 자화(子華)로, 적은 이름이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42살 어리다고 한다. 속대(束帶)는 조복(朝服)을 입는 것이다.
  맹무백이 공자의 제자 중 관리로 쓸 만한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자로는 어진 사람이냐고 빗대어 물었다. 재차 물은 것은 공자가 자신의 진의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아 그런 것이다. 맹무백의 진의를 깨달은 공자는 그들이 어진가(仁) 여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자로는 군사 부문에, 염유는 행정에, 공서적은 외교에 재능이 있다고 간접적으로 추천하고 있다. 인(仁)은 공문(孔門)에서 최고로 치는 덕목이다. 이 세 사람이 각각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으나, 아직 최고의 경지인 인(仁)에는 이르지 못한 까닭에, 공자가 그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공자는 그들이 관리로서의 능력은 충분하다고 추천하고 있다. 우회적인 질문에 역시 우회적으로 답하면서도 성의를 다하는 참으로 음미할 만한 문답이다.

  <참고> 선진 25에 자로, 염유, 공서화가 증석과 함께 공자를 모시고 있다가, 각자 자신의 소망을 말한 내용이 있다. 거기에서 이 세 사람이 밝힌 소망도 여기에서 공자가 말하고 있는 내용과 대략 일치한다.
 
8, 子謂子貢曰 女與回也孰愈. 對曰 賜也 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
  공자께서 자공에 대해 이르시기를 “너와 안회는 누가 나으냐?”
  자공이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압니다만, 저는 하나를 듣고 고작 둘을 알 뿐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미치지 못하노라. 너 뿐만 아니라 나도 미치지 못하노라.”

  <해설> 유(愈)는 승(勝)으로 나은 것이다.
  자공은 안회보다 한 살 아래라고 전해지며, 안회는 덕행에, 자공은 언어에 뛰어났다고 한다(선진 2). 또 안회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고, 자공은 공자보다 낫다는 평이 있었을 정도로(叔孫武叔語大夫於朝曰 子貢賢於仲尼―자장 23)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니 자연 양자간에 경쟁 의식 또한 있었으리라.
  그것을 의식한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자공이 안회보다 못하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였다. 이에 공자가 자신도 안회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공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이다. 사제 간의 진솔함과 훈훈한 인정이 느껴지는 대화이다.
  주자는 吾與女弗如也의 여(與)를 허(許)로 읽어 “내가 너의 미치지 못함을 인정한다”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공자는 제자들에게 그렇게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9, 宰予晝寢. 子曰 朽木不可雕也 糞土之牆不可杇也. 於予與何誅. 子曰 始吾於人也 聽其言而信其行. 今吾於人也 聽其言而觀其行. 於予與改是.
  재여가 낮잠을 잤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흙담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으니, 너를 꾸짖은들 무엇하랴.”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사람을 대함에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그 행실을 믿었으나, 지금은 그 말을 듣고도 그 행실을 살펴본다. 재여 때문에 이렇게 바뀌었다.”

  <해설> 주침(晝寢)은 낮잠을 자는 것이다. 후목(朽木)은 썩은 나무, 조(雕)는 조각(彫刻)하는 것, 분토(糞土)는 흙이 부슬부슬하게 썩은 것, 오(杇)는 흙손질하는 것이다.
  재여의 게으름에 대한 공자의 꾸중이다. 그러나 단순히 낮잠을 잔 것 때문에 꾸짖은 것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송(宋)의 유창(劉敞)은 『칠경소전(七經小傳)』에서 주침(晝寢)을 대낮에 내실에서 여자와 함께 지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본의 오규소라이(荻生徂徠)도 같은 설(說)을 취한다. 또 남북조 시대의 양(梁)의 무제(武帝)나 『논어필해(論語筆解)』를 쓴 당(唐)의 한유(韓愈) 같은 이는 주(晝)를 화(畫)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서, 침실에 분수에 맞지 않는 호사스러운 벽화를 그린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청(淸)의 유보남(劉宝楠)의 『논어정의』도 같은 입장이다.
  재여는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다(선진 2). 그러나 그 말이 행실과 어긋남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공자로부터 재여 때문에 말을 듣고도 그 행실을 살펴보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아무튼 재여는 논어에서 공자로부터 가장 비판을 많이 받고 있는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참고> 재여에 대한 공자의 비판은 팔일 21, 옹야 24, 양화 21에도 보인다. 

10, 子曰 吾未見剛者. 或對曰 申棖. 子曰 棖也慾 焉得剛.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아직 굳건한 자를 보지 못 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답하기를 “신정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정은 욕심이 있는 데, 어찌 굳건할 수 있겠느냐?”

  <해설> 강(剛)은 굳고 강하여 굴하지 않는 것이다. 신정(申棖)은 노나라 사람으로 주자는 공자의 제자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욕(慾)은 정욕(情慾)이 많은 것이다.
  사사로운 욕심이 있는 자는 그 욕심에 얽매이기 때문에 굳건할 수 없다.

11, 子貢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子曰 賜也非爾所及也.
  자공이 말하길 “남이 나에게 가하는 것을 제가 원하지 않는 일을, 저도 남에게 가하는 바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야, 그것은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해설>  안연 2, 위령공 23에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말이 있다. 또 옹야 28에서는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우며, 자기가 두루 통하고 싶으면 남도 두루 통하게 하라(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고 말하고 있다.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차이는 있지만 모두 같은 말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남과 나의 차이는 없다.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推己) 서(恕)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령공 23에서 공자는 한마디 말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느냐라는 자공의 질문에 “서(恕)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왜 자공이 미칠 바가 아니라고 했을까? 주자의 해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과 己所不欲 勿施於人의 차이는 바로 무(無)와 물(勿)의 차이다. 무(無)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요(自然而然), 물(勿)은 금지하는 것이다(禁止之謂).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은 수양이 깊어져 의식적으로 행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즉 인(仁)이요, 己所不欲 勿施於人은 의식적으로 그런 것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즉 서(恕)이다. 무(無)와 물(勿)은 바로 인(仁)과 서(恕)의 차이이다. 자공은 아직 인(仁)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참고> 안연 2, 위령공 23, 옹야 28

12,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자공이 말하길 “선생님께서 문장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들을 수 있었지만, 성품과 천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들을 수 없었다.”

  <해설> 문장(文章)은 인간 세상의 문물(文物)에 관한 것, 즉 예악전적(禮樂典籍)이다. 성(性)은 인간의 타고난 성품, 천도(天道)는 하늘의 도리다. 공자의 관심이 인간 세상의 문물 제도와 같은 구체적인 것에 있었지, 인간의 타고난 성품이나 하늘의 도리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실증적 학풍이 유행했던 청의 학자들이 주자를 비롯한 송유(宋儒)의 성리학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즐겨 인용한 말이다.
  그러나 송(宋)의 정자(程子)는 자공이 여태껏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듣지 못하고 있다가 이 때에 비로소 듣게 되어 그것을 찬미한 말이라고 주자의 신주(新注)에서 주장하고 있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보다는 항상 구체적인 실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공자의 평소 언행에 비추어 볼 때 정자의 해석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황간의 『논어의소』에 인용되어 있는 태사숙명(太史叔明)의 해설은 좀 색다르다. 그에 의하면 문장(文章)은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들이다. 공자가 지은 책들은 후대에도 다시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지만, 공자가 성과 천도에 대해 직접 육성(肉聲)으로 한 말은 후대에 다시 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참고> 인간의 성품에 대해서는 양화 2에서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다.
 
13, 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가르침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해설> 누구의 말인지는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아무튼 자로가 가르침을 받으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음을 나타낸 말이다.
  청(淸)의 포신언(包愼言)의 『논어온고록(論語溫故錄)』, 황식삼(黃式三)의 『논어후안』은 문(聞)을 성문(聲聞), 즉 남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듣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자로가 남이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까 항상 삼가고 조심했다는 뜻이다.

  <참고> 안연 12에서도 자로의 실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4, 子貢問曰 孔文子 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
  자공이 묻기를 “공문자는 어찌하여 문이라는 시호가 주어졌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영민하면서도 배우기를 좋아하고, 또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문이라고 한 것이다.”

  <해설> 공문자(孔文子)는 위(衛)나라의 대부로 성은 공(孔), 이름은 어(圉)이며, 문(文)은 시호이다. 문(文)이라는 시호는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시호 중 최고의 것 가운데 하나로, 도덕이 높거나, 학문에 뛰어난 업적이 있는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공어에게는 문(文)이라는 시호에 어울리지 않는 좋지 못한 행적이 있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1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위(衛)의 태숙질(大叔疾)은 송(宋)나라 자조(子朝)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함께 따라온 처제 쪽을 더 총애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어는 태숙질에게 그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태숙질은 공어의 딸과 결혼하고 난 후에도, 예전의 처제를 잊지 못하여, 그녀에게 따로 집을 지어 주어 살게 하였다. 공어는 노하여 태숙질을 공격하려고 마음먹고, 그것을 공자와 상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떠났다. 후에 태숙질은 방탕한 짓을 계속하다가 송나라로 달아나 버렸고, 공어는 자신의 딸을 태숙질의 동생인 유(遺)와 결혼시켰다.
  이런 공어의 행적을 문제시한 자공이 그가 어찌하여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그가 문이라는 시호를 받을 만한 이유를 들고 있다. 영민한 사람은 대개 학문을 게을리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남의 윗자리에 앉은 사람은 대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법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그로 하여금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꺼리지 않게 한 것이다. 공어는 진정 학문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공자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시시비비를 구분하고 있다. 공어가 비록 행실에 문제는 있었으나, 그가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그의 학문에 대한 자세 때문이지, 다른 것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산의 해석은 정반대이다. 다산에 의하면 敏而好學 不恥下問은 공문자와는 무관한 내용으로, 시호를 붙일 때의 원칙을 말한 것이다. 공어는 원래 악인으로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이나, 공자가 위나라에 머물러 있는 관계로 직접 비방할 수 없어, 영민하면서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만이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는 법이라고 말하면서, 간접적으로 공어에게 문(文)이라는 시호가 어울리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15,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공자께서 자산에 대해 이르시기를 “군자의 풍모가 넷이 있었으니, 그 몸가짐은 공손하였고, 윗사람을 섬길 때는 공경하였으며, 백성을 부양함에 은혜를 베풀었고, 백성을 부림에는 의로웠도다.”

  <해설> 자산(子産)은 정(鄭)나라의 대부로 공손교(公孫僑)이다. 공자보다 한 세대 이전의 뛰어난 정치가이며, 정나라의 재상으로서 정나라의 내정과 외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백성을 부릴 때 의로웠다는 것은 백성을 부릴 때 공정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참고> 헌문 10에도 공자의 자산에 대한 인물평이 있다.
 
16,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안평중은 남과 사귐이 훌륭하도다. 오래 사귀어도 경의를 잃지 않는구나.”

  <해설> 안평중(晏平仲)은 제나라의 대부로 성은 안(安), 이름은 영(嬰)이다. 공자보다 약간 앞선 시대의 정치가로 제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남과 사귐이 오래되면 그 친밀함이 공경함을 이겨 예(禮)를 소홀히 하기 쉽다. 예를 소홀히 하면 마침내 벗과 소원해지고 만다. 남과 사귐이 오래되어도 경의를 잃지 않는 것이 올바른 교제이다.

17, 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장문중이 점치는 데 쓰는 큰 거북을 집에서 기르면서, 그 기둥머리는 산처럼 만들고, 동자기둥에는 마름 무늬를 새겼으니, 그 아는 것이 어떠했겠는가?”

  <해설> 장문중(臧文仲)은 노나라의 대부 장손(臧孫)씨로, 이름은 신(辰)이며, 문(文)은 시호(諡號), 중(仲)은 자(字)이다. 『춘추좌씨전』 양공 24년에 노(魯)의 숙손표(叔孫豹)가 진(晋)나라에 가 “장문중은 이미 죽었지만 그의 말은 세상에 서 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노나라에서는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던 것 같다. 
  거(居)는 가두어 기르는 것이다. 채(蔡)는 점치는 데 쓰는 큰 거북으로 한 나라의 임금만이 가질 수 있다. 山節藻梲은 거북을 기르는 집의 기둥머리(節)를 산처럼 만들고(山節), 동자 기둥(梲)에 마름무늬(藻)를 새기는 것(藻梲)으로, 천자의 사당 장식이다.
  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은 하되 멀리하는 것이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옹야 20). 장문중이 귀신에게 현혹되어 점치는 데 쓰는 거북을 집에서 길렀을 뿐만 아니라, 예(禮)마저 참람하였으니, 그런 장문중에 대해 공자의 평판이 좋을 리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참고> 위령공 13에도 장문중에 대한 비판의 말이 있다.

18, 子張問曰 令尹子文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 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棄而違之. 之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子曰 淸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
  자장이 묻기를 “초나라의 영윤이었던 자문은 세 번이나 영윤이 되었으나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이나 물러나면서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신임 영윤에게 전임 영윤으로서 자기가 맡았던 정사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성실한 사람이다.”
  “어진 사람입니까?”
  “잘 모르겠으나, 어찌 어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최자가 제나라 임금을 시해하자, 진문자는 말이 십승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다른 나라에 도착했습니다만, ‘여기도 우리 나라 대부 최자와 같다.’라고 하며 그곳을 떠났습니다. 또 다른 나라에 갔습니다만, ‘여기도 우리 대부 최자와 같다.’라고 하며 또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맑은 사람이다.”
  “어진 사람입니까?”
  “글세 잘 모르겠으나, 어찌 어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해설> 영윤(令尹)은 초(楚)나라의 벼슬 이름으로, 재상이다. 자문(子文)은 초나라의 대부로 성은 투(鬪), 이름은 곡어도(穀於菟)이며 춘추 시대 초기의 인물이다.
  자문이 영윤 벼슬을 세 번 하고 세 번 물러나면서도 좋고 싫음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나라 일에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묵묵히 자기 직책을 다한 것이다. 물러나면서 자기가 하던 일을 신임 영윤에게 알려준 것도 자기 할 바에 충실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실한 사람(忠)이라고 한 것이다. 未知 焉得仁은 판단을 유보한 것이다. 자문이 비록 성실한 사람이기는 하나, 그것만 갖고는 어진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며 어울려 살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인(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나타난 것만 갖고는 자문이 어진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다.
  최자(崔子)는 제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저(杼)이다. 제나라 임금은 장공(莊公)이다. BC 548년 장공이 최자의 처와 간통하자, 최자가 노해 장공을 시해하였다. 진문자(陳文子)는 제나라의 대부로 성은 진(陳), 이름은 수무(須無)이다. 십승(十乘)은 말 40필이다. 위(違)는 거(去)로 떠나는 것이다. 猶吾大夫崔子也는 가는 나라마다 최자와 같이 대부들이 임금을 능멸하고 있었음을 가리킨 말이다. 진문자가 자신의 재산을 다 버린 채 제나라를 떠나고, 또 가는 나라마다 대부들이 임금을 능멸하는 것을 보자, 다시 그 나라를 떠나간 것은 그 더러움을 함께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이 맑은(淸) 사람의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만 갖고는 어진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황간(皇侃)의 『논어의소』에서 진(晋)의 이충(李充)은 未知의 지(知)를 안다라는 동사로 읽지 않고 지(智), 즉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명사로 읽고 있다. 즉 未知 焉得仁을 “지혜로운 사람조차 못되는 데, 어찌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충은 그 근거로 자문(子文)이 새 영윤으로 천거한 자옥(子玉)이 무능하여 성복(城濮)에서 진(晋)나라와 싸워 크게 패한 것을 들고 있다. 자문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어리석은 사람을 새 영윤으로 천거했을 리 없다. 게다가 전쟁에 패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였으니 어찌 어진 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진문자에 대해서는 영무자(甯武子)의 어리석음과 거백옥(蘧伯玉)의 물러남만 같지 않으니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몸만 깨끗이 할 줄 알지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하지 않았으니 더더욱 어진 자라고 일컬을 수 없다는 것이다.

19, 季文子 三思而後行. 子聞之曰 再斯可矣.
  계문자는 세 번 생각한 후 행동하였다. 공자께서 그것을 듣고 말씀하시길 “두 번이면 족하다.”

  <해설> 계문자(季文子)는 노나라의 대부 계손씨이며, 이름은 행보(行父), 문은 시호이다. 공자 이전의 정치가로 노의 선공(宣公), 성공(成公), 양공(襄公) 시대에 재상을 지냈다. 성격이 신중하여 앞날의 일까지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으로, 문공 6년 진후(晋候)의 병문안을 갈 때, 장례 준비까지 갖추어 떠났다는 일화가 『춘추좌씨전』 문공 6년에 전해진다.
  공자는 계문자의 세 번 생각함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두 번이면 족하다고 한 것이다. 너무 생각이 많으면 의혹이 생기고, 결단을 내리기 어려워진다. 군자의 행동은 결단(決斷)을 중히 여긴다. 결단하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뜻으로 꼭 두 번만 생각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다산은 명(明)의 이지(李贄)의 『분서(焚書)』를 인용하여 이와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다산에 의하면 당시 계문자가 세 번 생각한 후 행동하였다는 말이 전해 내려 왔으나 공자는 이를 믿지 않았다. 공자는 그가 두 번만 생각한 후 행동하였다고 하여도 오히려 가(可)하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어찌 세 번을 생각할 수 있었겠느냐고 하면서 당시 세인의 말을 부정한 것이다.
 
20, 子曰 甯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우직하였으니, 그 지혜로움은 따라갈 수 있으나, 그 우직함은 따라갈 수 없도다.”

  <해설> 영무자(甯武子)는 위(衛)나라의 대부로 성은 영(甯), 이름은 유(兪), 무(武)는 시호이다. 위(衛)나라 성공(成公)을 섬긴 사람으로, 진(晋)과 초(楚)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 끼인 위나라를 보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위의 성공(成公)이 나라를 잃고 그 목숨마저 위협당할 때, 영무자는 성공을 위해 끝까지 성실하게 보필하였다. 이것이 나라에 도가 없을 때 우직한 것으로, 아무나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위나라의 난이 평정되어 성공이 귀국하게 되자, 영무자는 자취를 감추어 천수를 다하였다. 이것이 나라에 도가 있을 때 지혜로운 것이나, 남들도 능히 따라할 수 있는 것이다. 다산의 『논어고금주』에 의거했다.

  <참고> 邦有道 …, 邦無道 …하는 표현은 공야장 1, 태백 13, 헌문 1, 헌문 4, 위령공 6에도 보인다.

21, 子在陳曰 歸與 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 不知所以裁之.
  공자께서 진나라에 계실 때 말씀하시길 “돌아가자, 돌아가! 우리의 젊은 무리들이 뜻이 높고, 문장은 찬란하지만, 바르게 마름질할 줄을 모르는구나.”

  <해설> 진(陳)은 지금의 하남성 남부 회양(淮陽)현 일대에 있던 작은 나라다. 吾黨之小子는 고향인 노나라에 남기고 온 제자들을 가리킨다. 광간(狂簡)은 광견(狂狷)으로 뜻이 높고 고집이 센 것이다. 비연(斐然)은 문장이 화려한 것이고, 성장(成章)은 글이 조리 정연한 것이다. 재(裁)는 바르게 재단(裁斷)하는 것이다. 
  공자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무려 13여 년간이나 천하를 주유(周遊)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고향인 노나라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면서 말년을 보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다. 이 장은 바로 그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는 13여 년의 주유 생활 중 진나라를 두 번 방문한다. 사마천은 이 말을 두 군데 다 기록하고 있으나, 내용 상 마지막 방문 때의 말로 보는 것이 옳으리라. 공자가 주유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간 것은 공자 나이 68세 때인 BC 484년의 일이다. 공자에게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쓰라린 일이었는지 몰라도,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가 쓰여지는 순간이었다.

22, 子曰 伯夷叔齊 不念舊惡. 怨是用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백이숙제는 남의 지난날의 잘못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남으로부터 원망받는 일이 드물었다.”

  <해설> 백이숙제(伯夷叔齊)는 은나라 말기 고죽국(孤竹國)의 임금의 아들로 백이(伯夷)가 형, 숙제(叔齊)가 동생이다. 부왕이 죽으면서 동생인 숙제가 뒤를 잇기를 바랬다. 그러나 숙제는 형인 백이에게 양보하였고, 백이는 아비의 뜻을 따라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 마침내 형제가 나라를 버리고 주(周)나라에 몸을 의탁했다. 그러나 주 무왕(武王)이 무력으로 은나라를 토벌하려 하자, 백이숙제는 무왕이 탄 말고삐를 잡고 이를 만류하였다. 끝내 은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천하를 지배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옛부터 의인(義人), 현인(賢人)의 대명사처럼 추앙받아 왔으며, 사마천의 『사기(史記)』 「열전(列傳)」의 첫머리를 장식한 인물이다.
  절개가 곧은 사람은 대개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러나 백이숙제는 그처럼 절개가 곧으면서도 남의 지난날의 잘못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도 그들을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자의 신주는 “남의 지난날의 잘못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성품이 맑은 자(淸者)의 도량(度量)이다.”라는 정자(程子)의 말을 부기하고 있다. 즉 백이숙제가 성품이 맑기 때문에 그러한 도량을 가졌다는 뜻이다.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포용하는 넉넉함이 있다면, 바로 인자(仁者)의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공자는 백이숙제를 인(仁)을 구해 인(仁)을 얻은 사람(술이 14)이라고 한다.
  한편 청의 모기령(毛奇齡)은 『사서개착(四書改錯)』에서 구악(舊惡)을 숙원(夙怨), 즉 지난날의 원한이라고 풀이한다.
   
  <참고> 술이 14, 계씨 12, 미자 8에도 백이숙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23, 子曰 孰謂微生高直. 或乞醯焉 乞諸其鄰而與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누가 미생고를 가리켜 곧다고 하느냐?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려달라고 하니까, 이웃집에 가서 빌려다 주더라.”

  <해설> 미생고(微生高)는 노나라 사람으로 성이 미생(微生), 고(高)는 이름이다.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혜(醯)는 식초다.
  시시비비(是是非非)가 분명한 사람을 곧다고 한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미생고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하지 않고, 남에게서 빌려다 주었으니, 명성을 얻기 위해 꾸민 것이다. 따라서 곧지 않은 것이다.
  
24, 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교묘히 입에 발린 소리만 내세우고, 얼굴에는 아첨만 가득하며, 공손함이 지나친 것을 좌구명이 수치로 여겼거니와 나 또한 수치로 여긴다. 마음 속에 원망을 숨기고,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좌구명이 수치로 여겼거니와 나 또한 수치로 여긴다.”

  <해설> 좌구명(左丘明)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공자의 선배라고도 하고, 후배라고도 한다. 맹인으로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썼다고 전해지는 좌구명과의 동일인 여부에 대해서도 확인할 길이 없다. 구(丘)는 공자가 자신을 가리킨 것이다.
  巧言令色足恭, 匿怨而友其人 모두 가식으로 남을 대하는 것이니, 성품이 곧은 자가 수치로 여기는 바이다.

  <참고> 교언영색(巧言令色)은 학이 3, 양화 17에도 보인다.
 
25, 顔淵季路侍. 子曰 盍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顔淵曰 願 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小者懷之.   
  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각자 자기가 뜻하는 바를 말해 보지 않겠느냐?”
  자로가 말하길 “수레와 말과 옷과 털로 된 외투를 벗과 함께 사용하다가, 비록 그것이 낡아진다고 하여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안연이 말하길 “원컨대 내가 잘한 일을 자랑하지 않으며, 남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로가 말하길 “원컨대 선생님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늙은 사람은 편안하게 해주고, 벗은 믿도록 하며, 어린아이는 품어 주겠노라.”

  <해설> 계로(季路)는 자로(子路)다. 시(侍)는 스승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합(盍)은 하불(何不)을 줄인 것으로 어찌 …하지 않느냐의 뜻이다. 車馬衣輕裘는 원래 車馬衣裘로 경(輕)이란 글자가 없었으나, 후인들이 옹야 3의 乘肥馬衣輕裘에서 착각하여 잘못 첨가한 것이라고 청(淸)의 완원(阮元)이 『논어교감기(論語校勘記)』에서 밝히고 있다. 폐(敝)는 닳아 해어지는 것이다. 벌(伐)은 과(誇)로 자랑하는 것이요, 시로(施勞)는 수고로운 일을 남에게 시키는 것이다. 
  안연과 자로는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이다. 안연은 그 뛰어난 학덕으로, 자로는 제자 중 최연장자로서, 그리고 그 곧고 용감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공자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공자가 모처럼 사랑하는 제자들과 한가로이 대담할 기회가 생겨, 각자의 포부를 물으니, 제자들이 그 동안 품어왔던 바를 말하였다. 그러나 그 포부가 의외로 소박하였다.
  자로는 벗과의 사귐을 말하였다. 벗과 재물을 사용함에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으니, 곧 벗과의 우애(友愛)를 중시한 것이다. 자로다운 이야기이다.
  안연은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으면서 남을 수고롭게 하지도 않겠다는 것이니, 즉 자신의 배운 바를 지켜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묵묵히 자기 수양에 몰두하는 안연다운 말이다.
  성격이 활달한 자로가 이제 선생님의 뜻을 물었다. 공자의 대답 또한 소박하였다. 늙은이는 효제(孝弟)로써 편안케 하고, 벗은 신의(信義)로써 믿게 하며, 어린아이는 자혜(慈惠)로써 품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뜻한 바는 매우 깊으니, 즉 천하 만물이 각기 그 순리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서 말하는 대동(大同)의 세상, 즉 이상적인 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세상이 아닐까?
  신주(新注)에서 정자(程子)는 이 대화에 대해 언급하기를, 공자는 인(仁)에 편안해 하며, 안연은 인(仁)을 떠나지 않으려 하고, 자로는 인(仁)을 구하려 한 것(夫子安仁, 顔淵不違仁, 子路求仁)이라고 하였다.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말이다.  
  한편 주자는 「無施勞」의 시(施)를 과장하는 것, 로(勞)를 공로(功勞)로 읽어 “공로를 과장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해석한다.

26, 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 而內自訟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이제 그만인가? 잘못을 깨닫고 속으로 자신을 꾸짖는 자를 보지 못하겠으니.”

  <해설> 已矣乎는 끝내 보지 못할까 두려워 한탄한 말이다. 송(訟)은 책(責)으로 꾸짖는 것이다.
  잘못을 범하더라도 속으로 자신을 꾸짖을 수 있다면, 허물을 고치고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면 허물이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不貳過―옹야 2). 그렇지 못하면 매번 그 자리에 머무를 뿐이다. 자신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자가 없음을 한탄한 말이다.
  다산은 송(訟)을 재판에서 다투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즉 잘못이 있으면 마음 속에서 천명(天命)과 인욕(人欲)이 다투게 되는데, 그때 그 시비(是非)를 분별하고 자신을 극복하여 잘못을 고치는 것이다.

27,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열 집 정도의 작은 마을에도 충성과 신의가 나와 같은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나,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해설> 양화 2에서 공자는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은 큰 차이가 없으나,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고 말하고 있다(性相近也 習相遠也). 타고난 성품이 아무리 훌륭하여도 학문을 통해 갈고 닦지 않으면 인(仁)을 이룰 수 없다. 부지런히 학문을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언(焉)을 위의 구(句)에 연결시키지 않고 아래 구에 연결하여 必有忠信如丘者 焉不如丘之好學也로 읽는 사람도 있다. 형병(邢昺)의 『논어주소』에 인용된 진(晉)의 위관(衛瓘), 『경독고이(經讀考異)』를 쓴 청(淸)의 무억(武億) 등으로, 그들에 의하면 “충성과 신의가 나와 같은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어찌 나만큼 학문을 좋아하지 않겠는가?”가 된다.

  <참고> 술이 2, 18에서도 공자는 자신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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