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상태바
아버지와 아들
  • 유은하
  • 승인 2012.01.15 1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칼럼] 유은하 / 화도마리공부방



우리 가족은 모두 4명이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들 둘이다. 큰 아이는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할 예정이며 작은 아이는 그 무섭다는 고 3이 된다.

아들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참 다르다.

큰 아이는 일찍 철이 들었고 장차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데, 논리적이며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다. 20세가 넘으면 성인이기에 독립해야 한다면서 알바를 하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 4년 동안 자신의 학비와 생활비를 책임졌다. 직업선택뿐만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에 비해 작은 아이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산다. 공부에 대한 압박감도 없고 대학 진학에 대한 간절함도 없으며 하루종일 공만 차고 그저 친구가 가장 좋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큰 아이는 자기 일을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작은 아이는 마음이 따듯하고 감성이 풍부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이어서 때로 아무 생각없이 사는 한심한 청소년으로 비추어질 때는 걱정된다.

얼마 전에 남편은 가수 장기하가 부르는 '별일 없이 산다'라는 곡을 들은 후 이거야 말로 작은 아들을 위한 노래라고 하면서 절대로 엄마에게 기죽지 말고 별일 없이 잘 살라고 한다. 나는 작은 아들에 대한 걱정이 많고 남편은 큰 아이에 대한 걱정이 많다.

큰 아이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한다. S대 대학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말에 시험을 보았지만 낙방했다. 내가 은근히 붙을 것을 기대했다가 다소 당황하니 큰 아이가 말했다.

"이번에는 당연히 떨어진 겁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붙습니다. 아주 열심히 할 거니까요"

오만할 정도로 대단한 자신감을 내비추었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큰 아이 성장과정을 비추어보았을 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였고 결과는 항상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큰 아이가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일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낼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남편은 큰 아이가 대학원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S대 대학원 영문과는 학계로 진출하는 데에 적당하지 작가가 되는 길과는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되려면 많은 경험을 하는 게 더 바람직하므로 굳이 대학원을 갈 필요가 있는가 아들에게 반문한다. 지금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으므로 아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남편이 생각하는 새로운 시대를 추상적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데, 국가 간 민족 간 세대 간 계층 간 갈등을 종식하고 통합을 이루어내면서 지금보다 몇 차원 진화하고 상승하는 시대일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아들이 그러한 시대를 맞이하는 일꾼이 되기를 바란다. 때문에 기존 시대에서 기득권을 누렸던 직업과 철학적 가치들은 낡은 것이 될 것이라 판단한다. 아들이 낡은 시대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남편은 큰 아이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youth! be ambitious

수많은 청년실업자 존재는 수많은 청년 1인 기업가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앞으로 시대는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환경이다.
낡은 시대의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인가, 새로운 시대의 첫 사람이 될 것인가?

젊음이라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드러내다. 저지르다. 표출하다.'이다.
낡은 시대의 안온함을 구걸하지 말고, 거치른 들판으로 나아가라.
너도 낡은 학문을 하려하지 않기를 바란다.
저물어가는 제국의 언어를 왜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해 한 번쯤 의문을 던져보기 바란다.
꼭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근본적 물음을 한번 스스로에게 던져보라는 것이다.
습관된 나를 넘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나의 가족과 이웃, 이 세상을 위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남들이 보면 의아해 할 일이다. S대 대학원 영문과를 가겠다고 하며 강력한 전투력을 보이는 아들에게 지지하고 뒷받침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가지 말 것을 강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말했다.

"제가 가장 잘하는 것이 아버지가 말하는 저물어가는 제국의 언어잖아요. 저는 영어를 공부해서 교수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겁니다."

메시지를 받은 소감은 어떠냐고 물었다.

"아빠 사자가 절벽에서 새끼 사자를 떨어트리는 것 같은데요."
 
2012년 1월 초 가족여행을 통해서 남편과 큰 아이는 오랫동안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간의 논쟁은 팽팽한 긴장감까지 조성되기도 하였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아들은 아들대로 굽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입장을 매우 존중하였고 계속 심사숙고할 것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 시대에 새 사람의 할 일에 대한 남편의 주장이 아들에게는 추상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았다. 아들은 상대의 주장에서 논거가 부족하면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충분한 논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남편은 아들에게 절절한 부정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다.

1. 15세 이전에 형성된 트라우마는 모두 부모의 업이고 책임이다.
2. 이제야 그 업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니 이를 어찌할꼬. 부끄럽고 책임이 막중하구나.
3. 부탁이다. 그리고 명령이고 싶구나 다시 1년만 기르게 해다오. 그 1년간 아무 소리 말고 나 하자는 대로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내 업을 청산하고 너의 트라우마를 없앨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구나.
4. 부모가 자식에게 굴레지은 것은 다른 사람과 자식을 비교하여 열등감 또는 우월감을 조성하게 한 일. 부정적인 언행을 한 일. 부부싸움을 하여 파괴적인 에너지를 생기게 한 일. 부모의 욕심으로 자식의 일상과 진로를 좌지우지하려고 한 일. 부모의 참 된 모습을 찾지 않고 그냥 습관적으로 산 일.
5. 부모의 부모 모시는 일에 능갈기력(자신의 힘을 다 하지 않은 일)하지 않은 일
6. 앞으로의 세상은 젊음의 것. 마음껏 저지르기를 바란다.

아직 남편과 아들 간에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소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소통은 무엇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상대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이해는 아는데 인정하기 어렵다는 말을 자주한다. 그렇다면 소통은 없게 된다. 다른 이의 생각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소통이 된다. 이 태양 아래 '홀로 옳음'이 없기 때문이다. 틀린 것은 없다. 단지 다를 뿐이다. 내가 옳다면 상대도 옳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옳음과 너의 옳음이 만나 새로운 옳음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 의견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그러면 '소통'은 이루어진다.

소통하는 부자관계, 그것이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일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