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여성은 여전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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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여성은 여전히 씁쓸하다
  • 이영주
  • 승인 2012.02.06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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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이영주 / 인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선거철은 선거철인가 보다. 시내의 어지간한 사거리마다 후보자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힌 대형 현수막이 걸린다. 당들은 앞다투어 전당대회와 총선승리결의대회를 연다. 어떤 당은 비록 비웃음을 사는 데 그치긴 했으나 국민들에게 환골탈태의 쇄신을 보여주고자 당명을 바꾸기까지 했다.

여성운동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내게도 거세진 않지만 선거바람이 불어온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들에게 여성정책공약에 대한 질문을 근래 들어 자주 받는다. 어제는 민주통합당 청년비례 경선에 출마하기로 한 온라인 친구로부터 그간 이슈가 되었던 여성정책에 대해 브리핑을 해줄 수 있겠냐고 메시지가 왔다.

그가 출마하는 정당에 대한 지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번 민주통합당의 청년비례 공개 경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지금껏 가시화되지 못했던 2030세대의 정치적 목소리가 이번 경선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날 수 있다면 그것도 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딱히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할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역대 대선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정책공약은 단 한 번도 당락을 좌지우지할 만한 이슈를 불러일으킨 적이 없었다. 단지 절반의 여성 유권자를 의식해 ‘우리 당도 여성정책 있다’는 면피용 정책이 대다수였다. 아예 여성정책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정당도 더러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간 나온, 얼마 안 되는 각 후보들의 여성정책공약자료집 중 개중 나은 것을 소개하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여성정책공약이라는 각론으로 새끈한 건텐츠를 만드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여성의 삶의 질에 하등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국민의 절반이 여성이라면, 정부의 재정정책, 산업정책, 사법정책, 교육정책, 복지정책 전반에 여성의 존재에 대한, 여성들이 현재 처한 삶의 처지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래놓고 여성을 위한 공약입네 하고 몇 가지를 이벤트처럼 내놓는 것이 여성들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언제까지 여성을 들러리로 세울 건가?

솔직히 선거란 제도는 여성들 없이는 진행될 수 없는 제도다. 지금이야 예비선거운동 기간이니 조용한 편이지만, 본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각 정당의 상징 색깔 티셔츠를 입고 후보자를 알리는 이들도 여성, 아파트의 라인별 득표 현황까지 꼼꼼히 파악하는 사람들도 여성이다. 선거구 자체가 삶터를 근거로 구성돼 있고, 그 삶터에서 일상을 보내는 이는 여성들이기 때문에 아마도 선거구제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이 양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기에 선거가 시작되면 어느 정당이고 가릴 것 없이 지금까지 동네에서 허드렛일이나 시켜먹던(!) 여성들을 불러 모으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게 모은 여성들을 골목마다 내보내져 바람잡이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끝이다. 한마디로 쓸모없어진 물건은 용도 폐기되는 것이다. 물론 선거 과정에도 그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녀들은 선거운동본부의 남성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철저한 들러리로 이용된 후 용무가 끝나면 폐기된다. 다시 또 동네 허드렛일이나 하는 사람, 정치와 같이 중요한 일은 남자들에게 맡기고 집에서 애나 볼 사람으로 전락한다.

몇 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 패턴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정책공약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기야 성희롱 발언을 일삼는 사람이, 여종업원이면 가슴 정도야 아무렇게나 주물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제 앞에 있는 이가 기자든 누구든 손아래 여자면 볼을 꼬집으며 귀여워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국회의원이고 여전히 국회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 나라의 ‘정치’에 과연 여성이 들어갈 자리가 있긴 한가? 설사 특별한(?) 몇 명의 여성이 국회의원이 된다고 달라지긴 할 것인가?

정치에서 여성을 들러리로 세우는 관행은 특별히 이상한(?) 남성들을 국회의원으로 뽑았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의 지위가 많이 높아졌다고들(도대체 누가?) 하는 지금 이 사회가 여성을 들러리로 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몇몇 정치인 남성들은 어쩌면 가장 보편적이고 평범한 대한민국 대표 남성들이다. 여성을 결코 정치적 존재로 인지하지 않고, 중요한 일을 하는 남성을 보조하거나 그들의 감정을 위안하는 역할로 두는 것은 비단 문제의 남성 정치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여성을 위한 이벤트는 필요 없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여성정책공약은 결코 선거 승패를 가를 만한 이슈가 되지 못할 것이다. 설혹 (그럴 리는 없겠지만) 눈길을 사로잡는 카피가 나와서 화제가 된다 해도 그것이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미약할 것이다. 밝은 내일을 그려야 할 선거를 앞두고 이렇게 부정적인 단언을 하는 것이 마음 편치 않은 일이긴 하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다만, 혹여라도 나와 같은 여성운동단체 활동가들에게 선거와 관련해 조언을 구하려는 예비 정치인이 있다면 이것 하나는 당부하고 싶다. ‘여성’이란 단어가 붙지 않은 ‘모두’를 위한 정책공약을 고민할 때, 여성의 존재와 삶의 처지를 생각해 달라고. 또한 선거운동을 하면서 여성을 단순한 선거운동의 바람잡이가 아니라 정치적 주체로 인지해 달라고. 진정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절반의 표를 의식한 새끈한 이벤트가 아니라, 정치의 주체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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