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동(新生洞) - 새롭게 태어난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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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동(新生洞) - 새롭게 태어난 동네
  • 배성수
  • 승인 2012.02.1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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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배성수 /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인천공간탐사] 개항장 언저리 2


인천공원 언덕에서 바라본 똥섬

인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해방과 함께 새롭게 이름 붙여진 동네가 많다. 이 동네들은 대개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이전만 해도 그 곳을 가리키는 별다른 지명이 없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천광역시 중구 신생동이 그런 동네이다. 이웃 신흥동과 마찬가지로 한적한 해변일 뿐이었던 이 곳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인천이 개항을 하면서부터이다. 개항 당시 이곳은 인천도호부 다소면 선창리에 속한 부웅(浮雄)이라 불리던 지역이었는데, 여기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인 묘지에서 일본공원이 된 사연

신생동 중앙에 작은 언덕이 하나 있다. 지금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선 이 바위언덕 남쪽은 원래 바다에 면해 있었다. 1889년 인천감리서는 이곳에 조선인을 위한 묘지를 조성하려고 계획하였다. 이 계획이 땅 주인 이귀만(李貴萬)에게 흘러들었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땅을 무상으로 상납할 수밖에 없었던 이귀만은 일본인들에게 이 땅을 매도하였다. 1890년 6월 일본영사관은 여기에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 즉 일본공원을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다시 이를 매입하여 공유지로 만들었다. 당시 각국조계 내에는 이미 만국공원이 있었으나, 이는 말 그대로 개항장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원이었기 때문에 세를 확장해가는 일본인에게는 그들만을 위한 일본식 공원이 필요하였다. 

한편 공원 내에 신사를 건립하여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천조대신(天照大神) 신위를 옮겨온 일본인들은 기부금을 모아 나무와 꽃을 심는 등 본격적으로 공원을 가꾸어 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조성된 인천공원은 남쪽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와 봄철이면 만개한 벚꽃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본공원은 1914년 각국조계가 폐지되면서 그 이름을 ‘동공원’으로 바꾸었고 이때 만국공원 역시 ‘서공원’으로 되었다.

신사 옆에는 요정이 들어서고

인천신사에 배향된 천조대신은 일본 황실의 조상신으로서 일본인들의 숭배를 받아온 신이다. 수많은 일본의 신 중에서도 가장 상위의 신격(神格)을 가진 신으로 당시 일본영사관에서는 이 신의 신위를 인천으로 옮겨오는 한편 신사가 들어선 인천공원을 위락 장소로 운영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일본신사가 건립될 즈음 수명루(水明樓)와 명월루(明月樓)라는 고급요정이 신사 경내에서 개업하였다. 대개 어느 나라이건 신의 위패를 모신 곳은 성스러운 땅이라 하여 함부로 출입하기도 쉽지 않은데, 인천신사의 경우 그 경내에 술과 여자를 파는 요정이 들어선 것이다. 특히 수명루는 제일루라 불릴 정도로 인천 최고의 요정이었다. 1892년 당시 시인이자 조선신보사 기자로 활동하던 아오야마 고헤이[靑山好惠]는 “제물포의 빼어난 풍경은 일본공원에 있고, 일본공원의 기묘함은 수명루에 모여 있다(靑山好惠, 󰡔인천사정(仁川事情)󰡕, 1892)”라고 일본공원과 수명루에 대한 감상을 표현하였다. 당시 수명루는 청아한 정자, 맛있는 술과 음식, 아름다운 여자들과 눈부신 전망을 자랑했다고 하니, 인천 최고의 술집으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수명루는 청일전쟁이 끝난 후 팔판루(八阪樓)로 이름을 바꾸어 영업을 계속했고 1895년 명월루를 통합하여 운영하였다. 이 요정에는 대형 연회장이 있었기 때문에 인천에 입항하는 일본 함대의 환영연회를 독점하였으며, 초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이곳을 즐겨찾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시판루(矢阪樓)라고 이름을 바꾼 이 요정은 해방이 될 때까지 최고급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옮겨간 인천역

인천공원 자리에 들어선 인천여상 남쪽 인중로는 현재 수인선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다. 애초부터 여기에 철도가 놓였다면 신생동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1896년 미국인 J.R. 모오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고 이듬해 3월 우각현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인천역의 부지는 인천공원 서남쪽 해안이었고, 여기서 출발한 철로는 숭의사거리와 박문학교를 거쳐 주안 즈음에서 지금의 노선과 일치하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당시 계획된 인천역 부지의 땅은 세 명의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땅값을 터무니없이 높게 요구하는 바람에 공사 진행이 순조롭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금 인천역 일대 토지소유주가 무상으로 토지를 제공하겠다고 나서 인천역 위치가 조정되었던 것이다.

사라진 섬, 메워진 바다
 
인천공원 남쪽으로 작은 섬이 하나 있었다. ‘똥섬’이라 불리던 이 섬은 양 측에 있었던 원도(猿島), 사도(沙島)와 함께 지금은 사라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섬이다. 이 섬은 조선시대 수이도(愁伊島)라 불리던 섬으로 원도나 사도에 비해 크기가 작은 섬이어서 사람들은 똥섬, 즉 분도(糞島)라 부르기도 했다. 똥섬이 사라진 것은 인천공원 앞 해안을 매립하여 갑문식 도크(지금의 제1부두)가 건설되면서부터이다. 개항 당시부터 인천항이 갖고 있던, 치명적인 약점인 조수간만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건설된 갑문식 도크는 사도와 분도 안쪽 바다를 매립하여 그 안에 만들어졌다. 도크가 처음 건설될 무렵만 해도 사도와 분도 모두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입항하는 선박이 늘어나고 부두시설이 증가하면서 매립 범위가 점점 확대되었고 급기야 섬 자체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인천공원이 조성된 언덕은 애초에 바다 쪽으로 돌출된 언덕으로 서남쪽은 모두 바닷물이 들이치는 해변이었다. 인천에 유입되는 일본인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개항장 내 일본조계 지역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은 매립을 통해 그들의 새로운 땅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선 일본조계지 남쪽 해안을 매립한 뒤, 1905년 매립의 범위를 인천공원까지 확대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땅에는 빈정(濱町)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겨났고, 인천공원에서 번화가였던 본정까지를 궁정(宮町)이라 불렀으며, 일본사찰이 밀집해 있던 북쪽동네는 사정(寺町)으로 되었다.

새로 태어난 동네

해방이 되면서 일본식 지명, 다시 말해서 일제강점기에 새로 붙여진 지명은 모두 원래 이름을 되찾거나 새로운 우리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빈정 또는 궁정이라 불렀던 이곳도 신생동(新生洞)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행정동인 신포동 관할의 법정동일 뿐이지만 여전히 많은 인천 사람들은 이곳을 신생동이라 부르고 있다. 
 
처음 일본인들을 위한 공원과 신사, 요정이 만들어지고 일본인들에 의해 형성된 마을 신생동. 해방 후 일본식 이름과 문화를 청산하고 새롭게 태어나라는 의미로 이름 붙여진 신생동은 60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도 여전히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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