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자'를 존중하는 착한 소비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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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자'를 존중하는 착한 소비자로…
  • 최재성
  • 승인 2012.02.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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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최재성 / 인천녹색소비자연대 상임이사


"사랑합니다. 고객님~"
 
114에서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무척 당황했다. 
 
대형마트의 '무빙워크'를 타고 매장으로 내려가는데 층마다 서 있는 여직원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한다. 마주 보며 인사를 해야 하나? 아니면 무시하고 모른 척 해야 하나?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불만으로 콜센터에 전화할 때 상대방은 한없이 친절한데, 내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고, 화를 주체하지 '않는' 내 모습에 놀랄 때가 많다. 마음 한 구석에 '내 화를 받아주는 게 이 사람의 일이야'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손님은 왕이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손님에게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식이다. 그러나 상식도 보편적 기준의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손님이 왕'이라는 상식이 인간의 보편적 기준을 넘어서고 있어 문제다.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친절을 강요당하며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노동을 '감정노동'이라 하며 이러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감정노동자'라 한다. 산업구조가 고도화하고 유통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대규모 기업들은 서비스를 우선적으로 판매한다. 그리고 기업가는 노동자를 고용하면서 그의 노동과 기술뿐 아니라 인성도 구매한다. 그리하여 특히 서비스 분야 노동자에게서 고객을 위해 자아를 희생해야 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감정노동은 유통업, 은행업, 보험업, 관광 및 레저 산업 같은 서비스 분야 직업에서 주로 나타났지만 점차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이제는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감정노동은 단순 업무로 취급되어 이에 종사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노동계층의 하위 분야이며, 특히 여성의 비율이 높다.

감정노동자들의 임무는 고객들이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며 상품 및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객들이 감정노동자에게 기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특정한 얼굴 표정과 육체적 표현을 만들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을 관리해야 한다. 감정노동자들의 연기가 위선적이거나 가식적일 경우 고객들은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에 숙련된 감정노동자들은 내면 연기를 하게 된다. 백화점에서 무례한 고객을 만났을 때 판매원은 그 고객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내려 애쓰고 스스로 미안한 감정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될수록 감정노동자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자아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감정노동의 문제는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있었던  (사)녹색소비자연대 전국협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의 25.7%는 가족 중 감정노동자가 있었으며, 20.3%는 감정노동자에게 이유도 없이 화풀이를 해 본 경험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57.7%가 지나친 친절과 인사가 불편하다고 응답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과 제공 받는 사람 모두에게 불편한 감정노동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감정노동과 관련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의사도, 약사도, 학교 선생님도 자신의 감정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으며, 직장 안에서 상사와 부하를 대할 때 써야 하는 '인성의 가면'이 있다.

일반적인 인간관계에도 감정노동의 논리는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고객에게 친한 척 해야 하는 판매원의 윤리가 일상생활 처세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만나자마자 형님, 동생하는 사람들, '우리 끝까지 함께 가는 거야'라고 서슴없이 말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서로를 믿지 않는 문화가 점점 더 확산되는 이면에는 일시적인 계약으로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화폐 중심의 거래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가면을 쓴 인간관계가 확산되면 될수록 우리사회는 상호 불신과 자기 소외가 보편화할 수밖에 없다.

감정노동의 문제는 구조적이고 거대한 기반을 갖추고 있지만 해결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눈앞의 작은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소비자의 의식 전환이 중요하다.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며 파괴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행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소비자로서 권리와 이익도 중요하지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는 '착한 소비자', '윤리적인 소비자'가 되자.

노동자에게 과도한 친절을 강요하는 기업들의 의식에도 전환이 필요하다. 과도한 친절이 오히려 소비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며, 고객과의 관계에서 감정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혼자만의 휴식공간과 시간, 치료 대책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분쟁이 발생했을 때 소비자와 노동자 모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인 정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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