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럽기만 한 '무심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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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기만 한 '무심한 자유'
  • 정길수
  • 승인 2012.03.25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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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정길수 교수 / 경인여자대학 간호과


1981년. 등굣길 버스 안. 책가방이 무겁다. 보조 가방에 도시락 두 개가 든 가방까지 멘 어깨가 신음한다.

"앗", 눈이 번쩍 뜨인다. 운전 기사석 옆 공간에 빈자리가 있다. 남학생들 가방 서너 개가 놓여 있다. 기쁜 마음에 가방부터 내던지듯 내려놓고 본다. 어, 왜 그러지? 버스 안 남학생과 여학생들 중 몇 명이 나를 바라본다. 금세 사태를 파악한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있는 여학생 중 그 누구도 나처럼 버스 앞 남학생 책가방 전용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지 않는다.

어깨가 뻐근하게 아파도 우아하게 들고 있거나 운이 좋으면 앉아있는 사람에게 맡길 뿐.

어쨌거나 난 고3 내내 등굣길 버스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남학생 책가방 자리든 바닥이든 무거운 가방을 주저없이 내려놓았다.

2007년. 파리. 95번 버스 안. 며칠째 아침 8시 30분이면 어김없이 95번 버스를 탄다. "봉쥬". 반갑게 인사하는 버스 운전기사가 정겹다. 파리사람들은 낯설어도 서로 눈이 마주치면 아는 척 웃는다.

우리나라 버스와 다르게 유모차도 휠체어도 쉽게 오를 수 있는 버스. 노약자나 어린이가 타면 흔쾌히 자리를 양보하며 배려하는 사람들. 우리도 그렇지만 우리 배려와는 차이가 느껴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발적으로 호의를 베풀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며 행동 할 때가 많다. 내가 만난 파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한다.

남자든 여자든, 늙었든 젊었든 무거운 가방을 든 사람들은 주저없이 버스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버스 바닥이 아무리 더러워도 상관없다는 듯이. 내가 관찰한 범위에서는 대부분의 파리 사람이 그랬다.

음식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리에 앉으면 자기 의자 옆 바닥에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내려놓는다. 가방이 사람이 앉을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2011년. 5월31일.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우아한 이탈리아 음식점에 갔다. 나도 동료들도 식당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지 않았다. 각자 앉은 의자 뒤에 가방을 구겨 넣고 불편하게 앉거나 빈 옆자리 의자 위에 놓거나.

저녁 7시. 신촌 한겨레 교육문화센터. 오늘은 결석생이 제법 많다.

난 책가방을 내 옆자리 빈 의자위에 우아하게 모셨다.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앞에 앉은 운동복 차림 청년 발 아래 놓인 검정배낭이 내 시선을 끈다.

그 '무심한 자유'가 부럽다.

난 언제부터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지 않게 되었을까?

무거운 가방 때문에 불편한 내 몸이 먼저인가?

아니면, 행여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을까 애지중지하는 가방이 먼저인가?

가방은 그저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건일 뿐인데, 왜 가방이 내 몸보다 귀한 존재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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