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 속에 눈물만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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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 속에 눈물만이 떨어진다
  • 하석용
  • 승인 2012.04.02 19:2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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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하석용 / 공존회의 대표 · 경제학 박사


이젠 내가 얼마나 많은 투표를 해보았는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리고 그 많은 투표를 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었는지는 이제 생각하기도 싫다. 항상 최선으로 의미 있는 투표를 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했고 그런 결과에 따라 선택을 계속했지만, 지금에 와서 나는 내가 내 선택 덕분에 행복해졌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교활한 언어로 지난 많은 내 선택이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분식(粉飾)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한 저항과 선택들이 모여 오늘의 역사를 만든 것이라는, 일견 그럴 듯하게 보이는 설명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아무 의미 없는 허접한 각성인지에 대해서도 이미 사고의 정리를 끝낸 상황이다. 이제 그런 시간을 낭비하는 논쟁에는 가담할 아무 이유도, 의지도 갖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는 원론적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미련함에 스스로 억울할 뿐이다.
 
지난 이 지면에서도 밝힌 바 있거니와 선거는 본질적으로 전쟁이다. 그러나 이 전쟁의 특징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여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함께 살아남기 위한, 그것도 더욱 잘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라는 운명적인 모순을 갖는다는 점에서 무력적인 전쟁과 다르다. 이 사회는 이 전쟁을 통하여 더욱 성숙하고 세련되어가야 하며 더욱 풍요로워져야 한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 사회의 구성원은 선거를 거듭할수록 좀 더 행복해져야만 한다.
 
그런데, 그런가? 우리가 선거를 반복하면서 누적시킨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은 조직폭력배나 모리배 수준의 정당체계와 치유 불가능한 지경의 편 가르기, 건전한 상식과 지성의 압살과 독선의 극단화, 정치를 빙자한 무법천지와 파렴치의 확산, 생산적 권위의 무한파괴, 사회적 인재 양성 통로의 차단, 국민 간의 이간질, 교활한 요설(饒舌)의 양산과 뻔뻔한 책임회피, 무한 질주하는 권력에의 추구, 마침내 이런 문화를 자식들의 세대에까지 이입하고 그렇게 해서 이 사회의 미래를 파괴하기까지…. 그것들이 아닌가?

이 나라는 현재 국태민안(國泰民安)한 상황이 아니다. 중앙이나 지방할 것 없이 재정은 온통 거덜이 나고 있고 그나마 이 나라 경제를 끌어오던 몇몇 대기업과 중공업 장치산업의 국제 경쟁력은 이제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상태다. BRICs의 추격은 전 방위적이어서 대책을 마련한다는 것 자체가 힘겹고, 미국과 유럽 등 우리 전통적인 고객들은 그들 스스로 미래가 불확실하다. 해외건설 부문조차 우리 건설사 간 과당 경쟁으로 속빈 강정이 되어 가고 있고 좀처럼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동‧서해의 무력경쟁 파고는 날로 높아져만 가고 현재 남‧북 간 바람직한 관계에 대하여는 정답이 예측불가인 상황이다.
 
당연하게도 이번 선거에서 국민들은 정당과 후보자들에게 이 나라 산업구조의 전환과 조정에 관한 답을 물어야 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생 방법을 물어야 한다. 자원과 식량에 대한 대책과 이 나라 기업을 가장 괴롭히는 노동과 환율의 문제에 대한 해법이, 이 기회에 적어도 토론을 시작이라도 하여야 한다. 중앙과 지방의 조화와 분권의 원칙이 논의되어야 하고 세계의 미래를 전망하는 국방의 방략과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내기 위한 교육의 방향에 대해 치열하게 질의와 답변이 이루어져야 한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의 문제를 다루더라도 최소한 이러한 국가적인 전망을 기초로 논리가 연역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국가적으로, 지역적으로 도대체 무엇을 해서 오래도록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지혜의 겨루기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없다. 그런 내용들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온통 바꾸고 심판한다는 이야기뿐이다. 어이없는 이야기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는 말인가. 대한민국의 어느 정당도 어느 정치인도 오늘 이 사회와 이 정치가 이렇게 되는 데에 이미 한 때 크게 죄지었던 패거리이고 인사들이 아닌가. 이제 역사와 함께 흘러가버렸어야 하는 자신들은 끊임없이 부활하면서 무엇을 바꾼다는 말인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만날 전 정권을 심판이나 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이 나라에 성립했던 정권치고 지난 정권을 심판하지 않은 정권이 없었지만, 정말 그런 심판을 통해 이 나라는 건강해지고 유능해졌다는 말인가. 원래 민주주의는 심판을 위해 존재하는 이념이란 말인가? 
 
지겹고 역겨운 이야기이지만 보수도 좋고 진보라도 좋다. 국민들을 이간질하는 데에만 골몰하지 말고 어떻게 이 국민들을 통합할 것이며 어떻게 이 국민들을 풍요롭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인지에 대해 정직하고 사실적이며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라. 당신들에게 그렇게 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성실하게 설득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반성하거니와 그럴 능력이 없는 것 같다면 조용히 물러설 줄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들이 하는 거짓말이 거짓말인줄도 모를 만큼, 최소한의 인격조차 준비되지 않은 집단들이 만들게 될 대한민국이 다음 시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게 무엇일 것인가.
 
어느 집단 어느 누구의 말이라 할지라도 "내 말만 들으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있다"라는 이야기가 모두 허무할 뿐이라는 것은 21세기의 오늘에 이미 전 세계적으로 검증이 끝난 이야기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 땅에서도 모두 실전을 통해 실력의 밑천과 탐욕의 본심이 드러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여전히 "내말만 들어라" 인가.

물론 이 모든 현상은 학습효과 하나 누적시키지 못하는 이 나라 국민과 시민들의 성향과 능력의 한계에서 비롯한다는 논리적 귀결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내 독선의 승리를 위해서는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는 관심도 없고 국민들의 분열만을 철저하게 조작하고 이용하는 이 나라 정치권의 파렴치를 용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들이 의도하는 대로 50:50이라는 가장 봉합이 어려운 최악의 분열 구조 속에 빠져버린 사회, 그리고 그 사회가 강요하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식의 양자택일 앞에서 나는 무력하다. 
 
용서할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남은 선택은 무엇일까. 주역이 가르치는 대로, 공자가 가르친 대로 그저 숨 쉬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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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요 2012-04-03 16:05:23
"누가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는 말인가. 대한민국의 어느 정당도 어느 정치인도 오늘 이 사회와 이 정치가 이렇게 되는 데에 이미 한 때 크게 죄지었던 패거리이고 인사들이 아닌가" 옳습니다. 또다른 대안은 없는지요? 그저, 시간만 지나가길 바라면 되는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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