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길(道) 아닌 길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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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길(道) 아닌 길이 있을까
  • 김학균
  • 승인 2012.04.17 16: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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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김학균 / 시인


개항 이후 인천 모습

예언가와 다름없는 문인들에게는 몇 날 몇 년의 세월을 바라보는 위력이 있다. 박인환의 시(詩) <인천항>을 음미해 보면 그 정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없이 닮아간다. 라고 했던 것은 분단체제의 슬픈 불행을 예견한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로 쓴 인천 시 속에 인천을 묘사한 그런 작품이 수없이 많다.

한 시대의 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시를 찾아 읽어 보면, 또 다른 의미에서 숨길 수 없는 역사의 가닥들을 온 몸으로 접하는 희열이 있다. 소외의 무거움도 가볍게 하고 상처의 잔혹함도 치유할 수 있는 살가운 시(詩) 맛이 있다. 

인천의 심장통 미두취인소(후로 한국은행, 현 국민은행 터)와 식산은행(후로 산업은행 터, 현재 주차장)을 끼고 앉았던 '미야마찌'. 6.25 전쟁과 분단, 그리고 전후의 궁핍한 생활이 만든 성장 소설의 주무대인 곳. 바람 부는 쪽으로 바람과 함께 넘어지며 피흘리는 '에레나'들이 하루를 살기 위해 없는 웃음을 만들어 몸 밖으로 표출해야만 했던 우리들의 '순이'가 있었던 영욕의 땅.

왜정시대 아이꼬(愛子)는 해방을 맞으며 에레나로 바뀌며 또다른 양공주, 양딸라, 양색시, 양갈보, 유엔마담 등으로 불리며 다국적 군에게 웃음을 섞어 술을 팔고 몸을 던졌었던 순이 누나들. 갈색으로 물들인 머리와 높은 구두 하이힐이 어색한 걸음걸이에 짙은 화장을 한 에레나가 되어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노부모를 공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 출세할 것을 기다리며 온 몸으로 울었던 우리 순이들이 흘린 눈물자욱이 남아 있는 해안동. 그곳은 흘러가는 개인의 가(街)가 아니라 집단적 기억이자 우리의 아픈 표상이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계 속에 지워버리고 싶은 상흔. 시간이 흘러 그 상흔은 고통으로 인정된다.

통행금지 싸이렌이 울리는 시간, 분주히 서두르는 행렬들 사이사이 에레나 곁에 팔짱을 낀 코쟁이들이 있다면 성공(?)한 하루이건만, 쓸쓸히 길위에 족적을 놓아야 하는 또 다른 순이는 응봉산을 바라보며 관동과 중앙동을 걸어 홍예문쪽으로 내일을 기약하며 걸어간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귀신을 몰아내는 듯 어둠으로….

이 시대 많은 에레나들. 일본 적산가옥 현관 쪽으로 붙은 방 하나를 얻어 간단한 가재도구가 전부였으며 재산목록 1호라면 아무래도 쿠션이 좋은 침대, 그리고 화장대가 전부였다. 그리 넓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방, 전세금 낼 돈도 없었던 하루벌이(?) 신세, 다 사글세로 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의 옛 기억 속에 익숙한 '넉스 비누', 그리고 '쪼꼬렛',  '츄잉껌' 아니면 '립스틱' 등으로 댓가(?)를 받은 그들의 발길은 신포시장, 중앙시장, 양키시장으로 향하였다. 돈을 받았다면 현재 유통되는 달러가 아닌 군표를 환전하기 위한 발길. 그 시절 외화벌이는 그들이 했다는 말도 있었다.

치옥의 언니 매기는 흑인 병사의 아이까지 낳고 미국으로 갈 희망에 목숨을 걸고 기다렸지만, 미군 지프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누워 있었다. 술 취한 흑인 병사에 의해 죽임을 당한 매기 언니의 슬픔이 녹아 있는 오정회의 <중국인거리>. 소설 속 주인공은 수없이 많았다. 정말 미국에 가는 사람도 있긴 있었나 보다. 중앙동 '범흥공사'(현재도 있음)에서는 이주에 필요한 서류작성이 간간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선우휘 원작의 <깃발 없는 기수> 속 하룻밤 이야기는 추억의 엽서랄까. 잊을 수 없고, 이범선의 <오발탄>, 오영수의 <안나의 유서> 등 여러 문학작품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가수 안다성의 노래 <에레나가 된 순이>의 모습을 잊었냐고.
 
내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들보다도 더 미운 그들, 나는 왜 그들에게 껌을 달라고 외쳤을까. 얼굴을 들 수 없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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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천분 2012-04-18 15:21:16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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