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진 '새나라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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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새나라 차'
  • 박병일
  • 승인 2012.04.27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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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일 명장의 자동차 이야기]


  “지난밤 워커힐의 개관식이 시끌벅쩍하게 열렸다며?”
  “그래. 그 무언가 미국서 고릴라같이 생긴 깜둥이 나팔쟁이 루이 암스트롱인가 뭔가 하는 가수가 밴드를 데리고 와서 축하노래까지 불렀는데, 아 글쎄 걔들한테 자그만치 8만 달러를 주었다네.”
  “무어, 8만 달러? 아니 지금 달러가 모자라 국가재건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그런 놈들에게 그 귀한 달러를 그렇게나 많이 주었어?”
  “그건 그렇고, 지금 워커힐 건설부정사건 때문에 떠들썩하지 않은가.”
  “그래, 게다가 빠징고기계 부정도입이며 증권파동까지 겹쳐 국민들로부터 의혹을 사고 있지.”
  “그뿐인가! 이번에는 또 다른 게 하나 더 걸려들었다는 소문이야.”
  “또 다른 거? 그러면 그 외에도 의혹사건이 더 있다는 건가?”
  “그렇다네. 다른 게 아니고 지금 인기가 충천하고 있는 새나라차 말일세.  국내 기업인이 아닌 재일교포에게 새나라자동차회사 설립특혜를 주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차들을 면세로 도입해다 고가로 판다고 말썽이 나고 있다네.”
  “그래 어쩐지, 국내자동차공업을 보호 육성한다고 해놓고 작년 봄 느닷없이 일제차를 400여 대나 왕창 들여다 팔더라니.“
 
 5.16혁명으로 새로운 정부인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 곧 이어 나온 일본미인 새나라차는 1962년 세모를 넘기면서 부족한 외화를 뭉텅이로 가져다 주고 면세로 도입했던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에게 차츰 의혹을 사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 하여 워커힐건설부정사건, 빠찡고부정도입 그리고 증권파동사건이 연쇄적으로 터져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자 수사기관이 조사를 시작했다.
 
 새나라차 도입에 대한 의혹이 깊어지면서 당시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부각되어 정부를 당황케 하는가 하면 국내자동차 기업인들이 새나라특혜에 대한 비난과 추궁이 거세지자 사장이던 재일교포 박노정 씨는 1963년 7월 25일 과 27일자 산업경제신문에다가 두 번에 걸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해명을 해 국내기업인들의 감정을 더 건드려 놓고 말았다.
 
  “나에게도 할 말이 있다. 본인은 오직 조국의 자동차 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희생적인 투자를 하였는데 국내 일부 인사들 중에서 새나라차를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간주하여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해명하는 바이다. 종래 우리나라에서 운행하고 있던 자동차들은 대부분이 군용폐차를 이용해 만든 고물차로서 연료의 소모가 지나치게 많아 연간 외화의 낭비가 대단히 큰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중낭비를 줄이기 위해 새나라자동차로 바꾼다면 연료 소모는 그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연간 180여 만 달러라는 막대한 외화와 석유를 절약할 수 있다…. 국내 자동차공업은 본인에게 맡기고 타업자들은 개스사업, 건축사업, 비행기공장이나 경영하여 이나라 재건에 이바지하는 것이 좋겠다….“
  
 박노정의 이러한 안히무인격 해명에 국내자동차 공업인들이 크게 반발하여 항의 성명을 다음과 같이 냈다.
 
  “소형승용차 2천400여 대를 면세로 수입하여 판매한 것이 국가재건과 이 나라 경제발전을 위해 큰 공을 세운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국민들이 낭비와 사치를 하도록 유도한 것에 지나지 않는 처사이다. 이뿐만 아니라 군소 운수업자에게 차를 바꾸고 폐차하게 만들어 막심한 출혈을 강요하였고, 자동차제조 부품업 및 정비업자들에게는 구형자동차의 감소로 불경기를 면치 못하게 한 처사이다. 우리나라 경제개발에 가장 필요한 것은 상류층을 위한 승용차 도입이 아니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화물자동차와 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대형버스라는 것을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외화 240여만 달러로 장차 자동차 국산화를 위한 장비나 시설을 도입했다면 바람직하지만, 완제품과 반제품 등의 일제승용차와 이들 차량의 부속품 도입에만 사용했으니 이는 자동차를 면세로 들여다가 고가로 판매하는 장사꾼으로서 자동차 국산화분제는 생각하지 않는 처사가 분명하다. 따라서 박노정씨는 안하무인격 폭언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
 
  5.16혁명정부는 국내 자동차공업을 육성하기로 했으나 당시 한국의 자동차기술이 미숙해서 우선 외국으로부터 완성된 차를 수입하는 것이 자동차의 부족을 빨리 메꾸고, 군용폐차부속품을 이용해 만든 잡조립품인 택시 승용차를 외제순정품 자동차로 대체하면 제조기술 개발에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가장 가깝고 자동차기술이 동양에서 제일 앞서고 있는 일본으로부터 차를 들여오려 했으나 한일 간 국교정상화가 되지 않아 정식 교섭이 어렵게 되자 중계역할을 할 수 있는 앞잡이 인물을 일본에서 찾았다.
 
  이때 나타난 사람이 야스다에이지라는 일본이름으로 일곱 개 기업체를 가지고 있던 재일교포 사업가이던 박조정 씨였다.  마침 닛산자동차 사장과 친숙하다는 박씨를 앞세워 닛산의 소형 승용차인 블루버드 1200(Blue Bird 1200)을 2천여 대나 완제품과 반제품 형식으로 수입하기로 계약하고 박조정 씨는 형식상 새나라자동차의 사장이 되었다.
 
 닛산자동차는 한국의 혁명정부 때문에 굴러들어온 떡을 힘 안들이고 받아 먹는 행운을 얻었다. 그것도 외상이 아닌 현금거래라 닛산에서는 이 기회에 한국에서 터를 잡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추파를 던졌다.

  즉 서울 도심지에 25층짜리 자동차회관을 건립하겠다는 풍문을 흘렸고, 국교정상화가 되면 일본문화센터로 바꾸어 쓰겠다고 허풍을 떨었다.  이렇게 하여 박노정 씨를 통해 들여온 블루버드 1200은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팔았다.

  얼마 후 새나라는 면세도입에 고가 판매 그리고 외화낭비 때문에 4대 의혹 사건의 하나가 되어 곧 정치문제로 비화되자 이를 변명하기 위해 국내 일간지에다가 해명서를 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새나라자동차의 이익배당이 돌아오지 않자 감정을 품은 박씨가 사회각계에 진정서를 내면서 새나라 도입의 비밀 정보가 흘러나간 것이 화근이 되어 중앙정보부의 미움을 사고 체포당할 뻔했으나 용하게 미리 이 사실을 알고는 일본으로 도망해 버렸다.
 
  그후 1970년 박씨는 미국에서 부동산 투기사업을 하기 위해 로스엔젤리스로 이주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을 움직여 남북한의 무역창구 역할로 남한의 재벌인 J씨와 K씨의 평양방문을 주선했다고 소문이 났던 금강산무역의 사장이라는 재미교포여인 박경윤이 박노정의 둘째 부인이었다.
 
 박씨는 미국으로 이주한 후 박경윤을 만나 그녀의 해박한 영어와 일어 그리고 부동산지식에 매료되어 비서겸 정부로 고용했다가 급기야는 둘째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박노정은 1987년 로스엔젤리스에서 죽을 때까지 한국에는 한 번도 들어오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결국 새나라차는 제3공화국 초에 일어났던 4대 사건의 하나로 휘말려 얼룩진 일본미인이 되어 버렸고, 공장문을 연지 1년도 못되는 1963년 7월까지 총 2천770여 대를 만들어 내고는 문을 닫아 단명의 자동차로 끝장이 났다.
 
  그후 육군본부 초대 병기감이었던 소병기 준장이 예편되어 새나라자동차의 제2대 사장으로 1964년 취임하고 새나라 재건을 위하여 많은 힘을 썼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외화사정이 악화되어 일본으로부터 더 이상 자동차를 들여올 수 없어 새나라자동차는 64년 완전히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1년후인 1965년 8월 이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공장은 부산에서 합승미니버스를 만들어 유명해진 신진자동차공업사로 넘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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