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니를 디자인한 '카스타일링'의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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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니를 디자인한 '카스타일링'의 거장
  • 박병일
  • 승인 2012.05.0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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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일 명장의 자동차 이야기]


현대가 최초의 국산 고유모델인 포니(1974년)와 엑셀(1985년)의 신화를 창조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조르제토 쥬지아로(Giorgetto Giugiaro, 1938~)는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현재 자동차 디자인 전문업체인 이탈 디자인(Ital Design)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쥬지아로는 그동안 50여종이 넘는 자동차를 디자인해 그중 폴크스바겐골프, 피아트의 팬더와 우노, 란치아의 델타, 현대의 포니, 도요다의 카롤라 등 30여 종은 놀라운 판매기록을 올려 이탈리아 국민으로부터 살아 있는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미국에서 엑셀 판매를 위한 TV선전에도 쥬지아로의 이름을 이용할 만큼 그는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미국 GM의 부사장이라는 영광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자동차왕국을 건설하려다가 70년대에 불어닥쳤던 석유파동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자 마약밀매 사건에 걸려들어 꿈을 허공에 날렸던 야망의 사나이 존 드로리언이 만든 DMC12도 쥬지아로의 디자인이다.  이 차는 많이 팔리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상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백 튜더 퓨처’(Back to the Future)라는 공상 영화에 등장해 더욱 유명해졌다.

쥬지아로는 자동차 디자인 외에도 산업제품 디자인 회사인 ‘쥬지아로디자인’도 갖고 있다.   그는 이 회사를 통해 카메라(니콘), 시계(세이코),오토바이용 헬맷, 자전거, 운동화, 남성 캐주얼 등 승용차 디자인 외에도 오토바이, 버스, 배까지 디자인하고 있어 그는 세계 산업디자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쥬지아로는 1938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시 남쪽에 있는 가레시오라는 작은 마을에 살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가인 할아버지와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예술적 기질이 풍부했고, 14세 때 토리노에 있던 예술학교에 입학해 낮에는 디자인을 밤에는 설계를 배웠다.

17세 되던 1955년에 국립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한 쥬지아로는 스승이며 1940년대 유명한 자동차 디자이너였던 단테 지아코사(Dante Giacosa)의 소개로 피아트자동차 디자인부에 입사했다.  피아트에서 4년간의 카 디자이너 생활에서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자 좀더 만족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다가 1959년에 열렸던 토리노 모터쇼에서 유명한 자동차 디자이너였던 누치오 베르토네를 만났다.

그로부터 며칠 후 쥬지아로는 작품 몇 점을 가지고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해 베르토네를 찾아갔다.  작품 평가를 부탁받은 베르토네는 쥬지아로의 디자인을 보고 놀랐다.  “이 작품들은 도저히 당신같은 젊은 사람이 만들었다고 믿기가 힘들다. 누가 당신을 도와 주었는가”라며 쥬지아로의 실력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쥬지아로는 “그럼 시험 과제를 하나 주면 당장에 이 자리에서 그려 보이겠습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베르토네는 새로 디자인할 알파로메오 스프린터의 설계도면을 내주었다.  그 자리에서 새 알파로메오의 디자인을 받아 본 베르토네는 쥬지아로를 베르토네 디자인회사의 시작모델 제작부장으로 전격 채용해 버린다.

즉시 쥬지아로의 디자인으로 새 알파로메오차를 개발하기 시작해 4년후인 1963년 알파로메오 테스투도라는 이름으로 그의 첫 작품이 태어나 인기를 끌어 상당히 팔려나간다.  쥬지아로는 이때부터 유럽에 서서히 알려 졌고, 베르토네는 쥬지아로를 매우 신임한다.

그 후 군에 입대해 있는 동안에 디자인한 또 다른 알파로메오의 스포츠카 줄리아 GT는 한 군데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채택되어 12만대 이상 팔려나가 알파로메오사의 베스트셀러카가 된다.

베르토네 밑에서 6년간 일하면서 프로의 자질을 가꾸었고, 그의 디자인이 계속 자동차로 변해 나오는 것을 보고 커다란 만족감과 자부심을 가진다.  쥬지아로는 자동차 매커니즘에 약했다.  실용성 있는 디자인을 하기 위해 주말에는 회사에 혼자 나와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하며 차의 기술면에도 실력을 다져 나간다.

쥬지아로는 1965년 베르토네를 떠나 기아 디자인(Ghia Design)사의 총 책임자로 자리를 옮긴 후 1967년 토리노 모터쇼에 이탈리아의 마세라티등 4개 작품을 출품해 그의 실력과 이름을 더 한층 높힌다.

이때쯤 독립하기에 충분한 자신을 얻은 쥬지아로는 유능한 엔지니어였던 알도 만토바니(Aldo Mantovani)를 기술부분 총책임자로 한 자신의 이탈 디자인(Ital Design)회사를 1967년 2월에 세운다.

완전히 독립한 쥬지아로가 이탈디자인에서 처음 받은 주문은 알파로메오였다.  알파로메오사가 제시한 조건은 1000cc 배기량 엔진에 앞바퀴 구동식의 소형차였다.  이 차는 설계서부터 디자인, 제품기획,기술등 모든 문제를 쥬지아로가 해결해야 하는 100% 주문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전륜구동차였다.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해낸 이 차는 그 후 생산되어 대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그런대로 팔려나가 실패작은 아니었다.  

쥬지아로를 세계적인 명 디자이너로 출세시켜 준 작품이 바로 폴크스바겐골프였다.  폴크스바겐사의 쿠르트로츠(Kurtlotz) 사장이 1969년에 열렸던 토리노 모터쇼에 왔다가 기자들이 뽑은 6개의 우수작품 중에서 4개가 쥬지아로의 작품인 것을 알고 옛날 딱정벌레형이 아닌 새로운 폴크스바겐의 디자인을 그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이렇게 새 시대의 폴크스바겐 디자인을 맡은 쥬지아로와 이탈디자인팀은 옛날 것과 전혀 다른 앞바퀴 굴림형 2박스카를 만들어 준다.  이 새로운 폴크스바겐은 1974년부터 생산되어 1985년 까지 무려 7백만대가 판매되는 경이적인 기록을 올려 폴크스바겐사의 전통을 다시 이어준다.

쥬지아로는 이어 피아트에게 판다라는 소형차를 디자인해 주어 침체에 허덕이던 피아트를 구하는데 크게 공헌한다.  이 두 차종의 명성은 쥬지아로에게 산업 디자인계의 최고 영예인 영국의 골든 콤파스(Golden Compass)상을 안겨준다.  이어 매년말에 뽑는 ‘그해의 최우수차’로 1980년에 란치아 델타가, 1981년에는 피아트의 오노가, 1985년에는 도요다의 카롤라가 선정되어 쥬지아로는 베스트카 디자인 메이커로 확고한 자리를 굳힌다.

1984년 7월 쥬지아로는 영국의 전통깊은 명문 예술대학인 황실 예술대학 (Royal College of Arts)으로부터 명예 예술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대학의 100년 역사 중에서 이 학위를 받은 사람은 세 사람밖에 없었다.  폴크스바겐 비트롤 설계한 천재 설계가였던 독일의 페르디난트 포르쉐, 스포츠카 메이커인 로터스의 창업자인 영국의 콜린 채프먼, 슈튜데 베이커를 디자인해 명성을 얻은 미국의 레이몬드 레위에 이어 쥬지아로는 네번째의 영광을 안았다.

이런 명성과 업적을 갖고 있는 쥬지아로에게 디자인을 부탁하기 위해 현대자동차가 찾은 것은 1973년 토리노 모터쇼에서였다.  한국 정부는 70년대 초부터 국내 자동차메이커들에게 외제 조립공업을 탈피하기 위하여 한국산 고유모델을 1975년까지 개발할 것을 강력히 권장했다.

이 정책에 따라 현대 자동차가 고유모델 개발에 앞장을 섰고 가장 중요한 외형 디자인을 자체의 능력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어서 폴크스바겐 골프로 명성을 얻고 있던 신예 디자이너 쥬지아로를 만났던 것이다.

이즈음 필자도 카 디자인에서 미련을 못 떨치고 있던 때였는데 포니의 개발을 맡았던 부장과 친분이 있던 터라 쥬지아로에게 용역을 주기 전에 나에게 디자인 스케치를 부탁해 10여장 그려 주었던 일로 잠시나마 희망에 부풀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쥬지아로는 현대의 고유모델 디자인을 위해 이 해 가을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인상을 씻을 수 있었던 것은 울산의 현대 조선소에서 만들고 있던 23만톤급의 유조선 때문이었다.  쥬지아로도 처음 보는 이 거대한 선박을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저력이 있다면 자동차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믿었다.

현대와 120여만 달러의 디자인 용역계약을 맺은 쥬지아로는 1년 후인 74년 미쓰비시의 엔진과 구동부품을 이용한 1200cc와 1400cc 급 2박스 스타일의 4도어 포니와 스포츠카 스타일의 2도어 포니쿠페를 토리노 모터소에 출품했다.

포니쿠페는 당시 국민경제나 시장경향에 비추어 시기상조라 판단해 일단 생산을 보류하기로 하고 1975년부터 4도어 포니만 생산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대망의 한국 고유모델이 탄생된 것이다.  포니는 나오자마자 인기를 끌어 몇 달 안가서 국내 최고 판매기록을 올려 현대자동차를 한국 최대 자동차 메이커의 자리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현대는 쥬지아로와 계속 손을 잡고 포니Ⅱ와 스텔라를, 85년에는 국내 최초로 앞바퀴 굴림형인 엑셀을 개발했다.  세계 최대의 시장인 미국에 1986년 엑셀이 무난히 상륙해 그해에 16만대라는 경이적인 수출기록을 올려 엑셀의 신화를 만들었다.   이어서 쥬지아로는 쏘나타 개발에도 참여해 현대자동차가 이룬 업적에 영향을 크게 끼쳤다.

쥬지아로의 디자인은 현실성에 기본을 둔 미래적인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환상적인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세대나 국적에 상관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움과 실용성 때문에 세계의 자동차회사들이 대량 생산을 위한 차 디자인을 계속 주문하고 있다.

쥬지아로는 ‘산업디자이너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매력적이면서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는 디자인 철학을 철저히 지키며 강조하고 있다.  그는 폴크스바겐 골프로 앞바퀴 굴림2박스 해치백 스타일을 유행시켜 70년대 이후 경제형 대중차의 기본을 만들었다.

그는 자동차 디자인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오직 예리한 예술적인 감각과 자동차에서 얻은 매력을 잘 조화시켜 개척한 실력이 전부이다.  쥬지아로는 자동차 스케치만 보고도 그 차를 만들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시간과 돈 그리고 노동력이 필요한가를 그 자리에서 알아낸다.

이탈리아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산업디자인이 뛰어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옛날부터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와 풍성한 자연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좋은 취미와 아름다운 멋을 추구해왔다.  이런 조건들이 뛰어난 디자이너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배출한 이유이다.  이 때문에 세계 자동차 디자인 분야를 주름작고 있는 피닌파리나(Pininfarina), 베르토네(Bertone)와 같은 거장을 비롯해서 쥬지아로 그리고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하는 루이지 콜라니(Luigi Colani) 같은 유명한 산업디자이너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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