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선, 두 번째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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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 두 번째 안녕
  • 배성수
  • 승인 2012.05.0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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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배성수 /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과장

 
수인선 디젤열차


한때 인천 남쪽 해안을 따라 달렸던 '꼬마기차'가 있었다. 레일 사이 간격이 일반 철로의 절반인 762mm밖에 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그 위를 달리던 기차의 크기도 작아야 했기 때문에 '꼬마기차'라는 별명이 붙었다. 비록 조그마한 꼬마기차였지만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학교와 직장에 가기 위해 직접 기른 야채며 과일을 팔려고 많은 사람이 이 기차를 이용했다.

첫 번째 만남, 경제수탈의 수단으로

1937년 8월 7일 인천항역에서 수원역까지 52km의 거리에 17개 정차역을 둔 수인선이 정식운행을 개시했다. 철로는 표준궤의 궤간 간격 1,435mm의 절반 정도인 762mm의 협궤철로로 부설되었고, 인천항역에서 수원역까지 1시간40분 만에 주파했다고 한다. 수인선은 경동철도주식회사에서 부설한 사설철도로, 이 회사는 이미 1930년 부설된 수원-여주 간 수여선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주와 이천 등 경기 내륙지역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경부선과 연결시키기 위해 건설된 수여선을 인천항까지 이으려는 목적에서 부설된 수인선은 인천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한반도 내륙으로 수송하는 역할도 담당하게 되었다.

수인선 부설목적은 경제수탈에 있었다. 일제의 중국침략 야욕이 본격화되었던 1930년대 조선에서의 식민지 수탈을 고도화하여 본토의 경제문제와 전쟁 물자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인 철도망의 확충이 시급했으며, 수인선 부설목적도 이러한 일제의 경제수탈과 맥을 같이한다.

기능의 변화, 화물운송에서 여객수송으로

해방 이후 수인선 기능에도 변화가 일어나 화물 운송보다는 여객 수송이 더욱 활발해졌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경기 내륙지역 미곡을 인천항까지 실어 나를 필요가 더 이상 없어졌기 때문이다. 남동, 소래, 군자 등지의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운송은 계속되었으나, 그마저도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의 대규모 염전 개발로 인해 생산량과 운송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비해 수인선을 이용하는 여객의 수는 증가되었다.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변변한 교육시설이 없는 시흥, 안산, 화성지역 통학생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논현동과 연수동 등 주변부 지역에서 수인선을 이용하여 시내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화물차를 객차로 개조하여 운행하기도 했고, 한 여름에는 창문이 없어 무더운 화물차 지붕에 올라가는 학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한편 군자∙달월 등지의 시골아낙들이 직접 기른 야채며 과일을 도회지에 팔기 위해 수인선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차가 들어올 때면 송도역이나 남인천역 광장으로 '반짝 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이렇듯 해방 이후 수인선은 화물운송이라는 주목적은 상실되어 갔지만, 주변부 여객을 수송하는 또 다른 임무가 부여되면서 그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첫 번째 헤어짐, 수인선 주변 공간의 변화

1960년대 국가주도 경제개발정책으로 인해 도로망이 확충되면서 수인선의 기능은 점차 위축되어갔다. 역의 존폐가 거듭되는가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역무원이 없는 간이역 비중이 높아지는 등 수인선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더욱이 인천의 경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수인선 주변 공간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1973년 7월 인천 내항이 확장되면서 남인천역에서 송도역까지 5km구간이 폐쇄되었고, 송도역이 수인선의 종착역으로 되었다.

수인선의 쇠퇴는 1977년 국도 42호선 포장을 계기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도로여건이 대폭 개선되면서 화물과 여객운송의 기능이 대거 도로교통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객차와 화차가 혼합된 증기기관차를 디젤기관차로 교체하면서 화물 수송이 전면 중단되었다.

1980년대 남동염전을 폐쇄하고 그 자리에 남동공단을 조성하기 시작하였고, 그와 함께 연수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실시되면서 수인선 운행에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1990년대 들어 송도역에서 소래역까지의 구간이 잠정 폐쇄되고 소래역에서 송도역까지 셔틀버스로 승객을 실어날랐다. 1988년에는 수도권전철 안산선이 개통되면서 한대앞역에서 안산역까지는 수인선과 전철이 함께 다니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1994년 소래역에서 한대앞역까지 폐선되었고 1년 뒤인 1995년 12월 31일 수인선은 개통 이후 숨 가쁘게 달려왔던 긴 운행을 멈추게 되었다.

두 번째 만남, 그리고 헤어짐

이제 두 달 뒤면 새롭게 달리는 수인선을 만나게 될 예정이다. 1차로 개통될 송도역과 오이도역 사이에는 달월, 소래, 남동, 송도역 등 기존 역을 포함하여 모두 9개 역이 들어선다. 폐선될 당시 하루 3번 왕복하던 운행횟수도 10분~15분 간격으로 하루 160편이 운행된다고 한다. '꼬마기차'를 이용해 학교로, 일터로 향했던 그 시절 사람들처럼 이제 새로운 수인선 전동열차를 이용해 사람들은 다시 학교로, 일터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꼬마기차'가 다니던 협궤철로 수인선을 서서히 잊어갈 것이다.

지금 철로변 사람들은 수인선과 또 한번의 만남과 헤어짐, 즉 두 번째 안녕을 준비하고 있다.


협궤객차 내부

동아일보 1937년 8월7일자


수인선 증기기관차

수인선 신 송도역 공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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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표 2012-05-05 08:11:33
어렷을쩍 엄마와 같이 수여선 타고 하루종일 털커덕 털커덕 대면서 이천을 다니러 갔던
시절이 까마득히 기억이 나는군요 다시 전철이 생기게되니 세상 오래 살았다는 실감이 남니다
어쨋던 개똥밭에 굴러도 오래 사는것이 장땡 아닌가 싶습니다 하 하 행복의소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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