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을 바라보는 남녀의 시각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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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을 바라보는 남녀의 시각차
  • 장재연
  • 승인 2012.05.2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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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장재연 / 소설가



시인 정현종은 <부엌을 기리는 노래>(1995)라는 시에서 부엌을 '여자들의 권력 원천'이라 했고 '利他의 샘'이라고 표현했다. 가족을 위해 밥을 짓는 여성의 행위를 높이 평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겠지만, 이는 부엌이 철저하게 여성의 노동력만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공간이라는 곳을 확인시킨다.

문정희 시인 역시 <작은 부엌 노래>(1991)라는 작품에서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라고 읊은 바 있다. 이처럼 부엌은 인간, 즉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중요한 공간이지만 부엌을 바라보는 남성과 여성의 시각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를테면 문정희 시인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 소리 치고/한 사람은 종신 동침 계약자/외눈박이 하녀로/부엌에 서서'라는 표현처럼 여성은 싫으나 좋으나 노동행위 주체로 당연히 부엌에 있어야 하는 존재여야 했던 것이다.

소설작품에서도 김채원은 '밥상 차리기'의 주체적 각성을 시도한 <겨울의 환>(1989)을 쓴 바 있다. 신혼 첫날부터 음식이 맞지 않아 화를 내는 남편 때문에 작품 속 '그녀'는 늘 떳떳한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결혼 6년 만에 홀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문득 부엌바닥의 찐득한 때가 새카맣게 달라붙은 자신의 버선발을 내려다보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그 버선바닥처럼 더럽게 구겨져 있다고 느끼고 장례가 끝난 후 짐을 싼다. 그녀에게 결혼 생활은 남의 인생을 살아주기 위해 멀리 헤매는 것으로 생각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운명 속으로 돌아온 듯한 안도감을 느끼면서 저녁밥 짓는 시간을 가장 아늑하고 보람되게 느끼며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느끼게 해준 '당신'을 만나게 되면서 그녀는 '누군가를 위해 따듯한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것'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다.

이 작품은 관습과 강요에 의한 부엌일은 노동이 되겠지만 스스로 노동의 주체가 되고자 했을 때는 노동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듯한 밥상과 기다리는 마음이야 말로 진실한 여성성이고 그 여성성이 할머니를 위시해 선조들이 전해준 마지막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조금 길게 돌아왔어도 어쨌든 부엌은 여성의 노동 공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위의 작품들은 1990년대까지를 표현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부엌을 여성의 노동 공간이 아니라 욕망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 작품이 등장하게 된다.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2002)에서 작가는 음식 만드는 과정과 성행위를 엮어가며 얘기를 끌어가고 있는데,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요리하는 주체가 여성이 아닌 두 남성, 즉 남편과 또 다른 남자(옛 애인)이다. 그들의 요리 행위는 여성과는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즉, 여성이 노동의 주체로서 요리를 했다면 남성은 욕망의 주체로서 요리를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동안 타자화되어온 여성의 성정체성에 해방감을 주고, 더 나아가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부터 성적 욕망의 주체로 나아간다는 과감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공간으로 부엌이 활용되었다.

2007년 김애란의 <칼자국>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부엌이 아닌 엄마의 부엌이 등장한다. 엄마의 부엌은 여성의 부엌과 다를 것 없지만 아내의 부엌이라기보다 억척스러운 엄마의 역할을 해내야 하는 데에서 다름이 있다. 엄마의 딸(자식)은 엄마의 손가락에 깊게 베인 칼자국과 엄마가 다룬 음식에 난 칼자국들로 심장과 간, 창자와 콩팥이 무럭무럭 자라 아이에서 소녀로, 소녀에서 어른으로 커간 것이다. '특수 스댕' 칼을 25년 동안 쓰고 있는 엄마는 나쁘다기보다는 난감한 남편으로 인해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빚을 내 국수집을 차리고 손에 물마를 날 없이 요리와 서빙, 계산과 청소, 설거지를 혼자 다하며 번 돈이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그류~'(그래유~) 때문에 날아가는 일을 종종 겪는다. 엄마의 부엌에서는 아버지가 나이 많은 때밀이와 커플링을 끼고 바람을 피울 때에도 밥 짓는 일만은 거르지 않는다.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 음식의 간을 보다 부엌에서 쓰러져 죽는다. 남의 일처럼 엄마의 죽음을 맞이한 임신한 딸은 며칠 아무 것도 먹지 못하다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인해 엄마의 부엌을 찾는다. 그곳에서 딸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얼굴을 적시고 엄마의 목소리도 듣게 된다. 괜찮다고, 아파도 괜찮고 느껴도 괜찮다고, 괜찮으니까 크게 울고 자도 된다고.

딸은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심장이, 콩팥이, 창자가 아프고 아린 것을 느낀다. 갈증을 느껴 물을 찾다가 딸은 어머니가 쓰던 칼을 보고 비로소 식욕을 느껴 시렁에 굴러다니던 사과를 잘라 먹는다. 칼자국이 난 사과 조각은 아마도 우주의 운석처럼 돌고 돌아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로 갈 터이다. 그리하여 심장과 간, 콩팥과 창자가 되어 자라날 것이다.

김경욱의 <아버지의 부엌>(2010)에서는 자식의 몸을 살리는 어머니 대신 자식의 꿈을 죽인 아버지가 등장한다. 자신이 생각한 출세와 성공을 아들을 통해 얻고 싶어 하는 아버지는 세계적 요리사가 되겠다는 아들의 꿈을 묵살한다. 아니, 처벌한다. 아들은 일등을 하면 원하는 선물을 사주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에 일등을 해보이지만 갖고 싶어 하는 '미미의 부엌' 대신 기관총을 선물 받는다. 아들은 기관총을 팔고 동생의 저금통을 몰래 털어 기어이 미미의 부엌을 갖게 되지만 며칠 후 미미의 부엌은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자신은 집 앞 전봇대에 묶인 몸이 되어 수모를 겪는다. 그때부터 아들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다. 특별한 꿈이나 소망 없이 자신의 재능까지 헛되이 날리며 살아온 아들은 결혼해서 자식까지 두었지만 이미 그의 인생은 궤도가 달라져버렸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적인 삶 대신 그저 그렇게 사는 맥없는 인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처자식과 함께 아버지의 집을 방문한 아들은 좁아터지고 더러운 아버지의 부엌에서 아버지 역시 그렇게 늙고 찌들어 갔음을 느낀다.

작품의 말미에서 아버지는 자식 내외와 손주와 함께 미술관에 갔다가 길을 잃고 어떤 설치미술 작품에 앉아 졸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실물크기로 만든 '미미의 부엌'이다. 아버지를 찾아다니던 아들은 아버지가 앉아 있는 미미의 식탁 위에 들고 있던 귤과 삶은 계란과 생수를 내려놓는다. 난생 처음 아버지를 위해 차리는 식사인 셈이다. 아들은 어쩌면 미미의 부엌을 갖고 싶었던 그 옛날에 이처럼 아버지를 위해 식탁을 차리려던 꿈을 가졌던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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