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서화가' 검여 유희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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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서화가' 검여 유희강 선생
  • 이창희
  • 승인 2012.05.24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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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추사 김정희 이후 '최고 서예가'

 검여 유희강 선생(1911~1976)은  인천시 서구 시천동 57번지에서 태어났다. ‘추사 김정희 선생 이래 최고의 서예가’로 불리는 거장이다. 수년 전 연 그의 특별전에는 해·행서와 전·예서, 대자서 등의 글씨와 사군자와 문인화, 전각, 관련 자료 등 260여점이 선보였다. 198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유작전 이래 23년 만이다.

유희강은 흔히 ‘추사 이래 최고의 서예가’로도 불리지만, 그의 생애와 다양한 작품 면면을 들여다보고 나면 서예가라는 호칭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큐레이터는 “전시 초점은 20세기 근현대 서예사에서 검여의 위치와 근현대 예술사에서 검여의 위치와 성격을 조명하는 데 있다”면서 “서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드물지만 21세기에 맞게 새롭게 검여를 바라보자는 것이 취지”라고 설명했다.

유희강은 미술과 서예를 하나로 일치시키려 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시·서·화 일치가 모든 문인의 지향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 특별할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활동했던 20세기를 떠올리면 그의 성취는 남다른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미술사에서 20세기는 미술과 서예가 본격적으로 분리되는 시기로 파악된다. 과거 글씨와 그림을 통칭하는 서화라는 용어는 미술로 대체됐다. 유희강은 한학과 신학문, 인상파 등 근대 서양회화와 고증학 등 이질적인 동서양 학문과 예술을 열심히 배웠다.
 


 

 

 

 

 

 

 

 

 

 

 

 

 

 

 

 

 

 

 

 

 

 

 

특히 유희강은 고증학 정신에 입각해 이를 글씨를 통해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추사가 중국 한나라의 예서를 받아들여 추사체를 완성했다면, 유희강은 육조시대 해서를 중심으로 서체를 완성했다. 그의 글씨는 회화적인 공간구성이 뛰어나면서도 육중하고 두꺼우면서도 거친 갈필을 특징으로 한다.

중풍에 걸린 58세 이후 왼손으로 쓴 묵희 작품들도 눈길을 끈다. 먹장난이라는 뜻처럼 서법에 얽매이지 않고 갑골문과 종정문 등 고대 문자를 회화적으로 재구성해 현대적인 맛이 느껴진다. 

검여는 전통서예와 동서양 미술을 가로지른 최후의 대가다. 청년 시절 중국에서 10년 간 유학하며 서예와 금석학뿐만 아니라 근대 서양화를 연구하고, 한때 유화도 그렸던 그는 이를 바탕으로 글씨와 그림을 하나로 꿰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완성했다. 육조시대 해서를 중심으로 다양한 서체를 익히고 실험해서 이룩한 그의 글씨는 강한 골기와 거친 갈필에서 나오는 웅건하고 분방한 기운과 더불어 회화적 조형감각이 남다르다.

검여는 ‘칼처럼(검여) 날카롭고, 돌처럼 단단하면서도, 박처럼 둥근’ 글씨를 쓰싶어 했다. 이는 곧 그의 작품 특징이자 삶의 자세이기도 했다. 특히 58세에 중풍으로 쓰러져 몸 오른쪽을 못 쓰게 되자 왼손으로 붓을 잡고 고된 노력 끝에 왼손 글씨와 그림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일은 유명하다. 이 왼손 작업 시기의 대표작인 <계축묵희>는 글씨와 그림, 전통과 현대를 관통한 검여 예술의 절경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경인아라뱃길 공사로 인해 유희강 선생 생가터가 사라졌다고 하니 하루빨리 복원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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