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자의 깊은 뜻
상태바
어떤 기자의 깊은 뜻
  • 박병일
  • 승인 2012.06.01 10: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병일 명장의 자동차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동차인 ‘시발(始發)을 만든 최무성 씨가 80고령을 넘어섰는데 지금도 미국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며 건재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원래 신문기자 출신으로 그가 자동차인으로 변신하여 ‘시발’차를 탄생시키기 위해 쏟았던 정열, 그리고 화려했던 ‘시발’차의 데뷔,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새나라’라는 최초의 수입차에 밀려 허무하게 그의 원대했던 꿈이 사라져 버렸던 쓰라린 과거를 가진 한국자동차의 첫 개척자였다.

  “형님, 해방되어 자주독립을 하였으니 형님께서도 다시 신문기자로 돌아가셔야지요.”

  “글쎄, 신문기자는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일본놈들한테서 고생당한 것 생각하면 지긋지긋해서 말이야.  이 기회에 다른 것을 해보고 싶구나.”

  “어떤 일을 하시려구요?”

  “신문기자나 정치꾼과는 완전히 다른, 무어랄까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은데 적당한 것이 잘 안 떠오른다.”

  “그러시다면 멀리서 찾지 마시고, 자동차정비공장 한번 해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마침 막내 아우 순성이가 경성공업사에서 엔진반장으로 있으니 정비공장 운영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우리나라에도 자동차가 많이 필요한 시대가 올 것 같구요.  제 생각에는 이 사업이 전도가 유망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거 괜찮겠구나. 낙후된 우리 경제를 일으키는 데는 자동차가 절대로 필요할 게야.  앞으로 우리 손으로 자동차도 만들어야지. 그러자면 정비업부터 시작하여 기술을 축적하는 것이 첫걸음이겠지.”

  최무성 씨는 1906년 서울 종로에 있는 가회동의 부잣집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신중학교를 다니던 중 2학년 때 반일운동에 가담했다가 퇴교당했다.  국내에서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혀 학업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자 학부출신의 엘리뜨였던 맏누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아까사까중학교와 일본 전수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귀국 후 경성전기 주식회사(한전)에 입사했으나 항일정신이 강했던 최무성 씨는 반일데모를 주동했다는 혐의로 일경에 잡혀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풀려난 후 당시 동아일보 여기자로 활약하던 누님의 도움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며 언론가였던 여운형 선생이 1930년대 후반에 사장으로 있던 민족신문인 조선중앙일보 사회부에 들어가 기자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중앙일보 재직 중 그는 일종의 항일운동인 독서회사건과 반제동맹사건에 가담한 것이 탄로가 나 걸핏하면 일경에게 잡혀가 수모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1937년 11월 조선중앙일보가 강제로 폐간되면서 직장을 잃었으나 일본의 최후 발악으로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다.  강제징용을 피해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던 것이다.

  국산차 1호인 ‘시발’ 탄생에 큰 역할을 했던 두 동생 중 둘째인 혜성씨는 예능에 소질이 있어 해방 전에는 ‘파시’라는 영화에 출연까지 했던 연예인이었으며, 사교술뿐 아니라 자동차 운전술도 뛰어났었다.

  그뿐 아니라 아직 생존해 활약하고 있는 원로 작곡가 황문평 씨와 ‘라이라’ 라는 가극단에서 해방될 때까지 활약했었다.

  막내 아우인 순성씨는 해방 전부터 서울에서 가장 컸던 자동차정비업체인 경성공업사에서 엔진반장까지 하던 자동차 정비기술자였다.

  1946년 8월 이들 3형제는 서울 을지로 2가 지금의 중소기업은행 본점자리에다 ‘국제공업사’라는 정비공장을 차렸다.  맏형 무성 씨가 사장, 둘째인 혜성 씨가 부사장 겸 섭외담당을, 막내인 순성 씨가 기술과 공장장직을 맡았다.

  국제공업사는 당시 서울바닥에 굴러다니던 도요다, 닛산, 시보레, 크라이슬러 등 상류사회의 고물승용차들을 끌어들여 막내의 뛰어난 기술로 수리해 주자 잘한다는 소문이 나 곧 유명해졌고, 우리나라로 진주해 왔던 미군이 쓰다 불하한 고물차를 새로 꾸며 팔아 수입도 짭짤하게 올렸다.
 
  그러다가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자 형제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전쟁통에 망가진 미군 지프차와 스리쿼터라는 3/4톤 짜리 트럭 등을 수리도 해주고 폐차 부속품들을 모아 차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여 자동차의 길을 놓지 않았다. 정전이 되어 서울로 다시 올라왔을 때는 공장과 시설이 몽땅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