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금관 - 세계 최고의 금세공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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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 - 세계 최고의 금세공 기술
  • 이창희
  • 승인 2012.06.14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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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선조들의 美가 현세를 뛰어넘는다

한국의 문화유산 가운데에는 세계에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게 적지 않다. 그 중에서 신라 금관은 대표적이다. 이 금관은 어떤 유물 전시회에 내놓아도 찬란하기 이를 데 없어 조명을 한 몸에 받는다. 그런데 지금은 신라 금관의 존재가 상식처럼 되어 있지만 1921년 경주에서 금관이 우연히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런 엄청난 왕관이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금관이 발견된 곳은 경주의 대릉원 바로 옆(노서동)인데, 주민이 집터를 파다가 우연히 금관을 비롯해 수많은 유물을 발견하게 된다. 일제 당국은 이때 4일 만에 발굴 작업을 끝내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중요한 발굴을 어떻게 4일 만에 끝낼 생각을 했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어떻든 그 뒤로 이 무덤은 금관이 발견된 곳이라고 해서 ‘금관총’이라 불리게 된다.

금관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모양은(사진에서 보이는 금관 오른쪽) 부분은 사슴뿔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관총 금관 발굴 이후에 이처럼 화려한 금관들이 서봉총이나 천마총 등지에서 5개가 넘게 발굴된다. 그런데 이 신라 금관은 그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정밀한 세공 기술이나 숫자 면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실크로드 문명 교섭사의 권위자인 정수일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고대의 금관 가운데 반 이상이 신라 것이라고 한다. 이 금관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표면에 때가 많았는데 그것을 닦아내자 곧 1,500년 전의 찬란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우리가 현재 보는 그대로 모습이다. 그래서 금관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아니 금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이렇게 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금관이 주목을 받은 것은 재료보다 그 화려한 모습과 세공 기술 때문이었다. 우리 금관은 전 세계 어떤 금관과 비교해 보아도 그 화려함이나 기술에서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금관이 지역적으로는 신라에만, 시기적으로는 5세기부터 7세기까지만 나타났다는 데 있다. 말할 수 없이 화려한 금관이 이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신라가 중국의 문물을 대거 받아들이는 7세기 중엽 이후로는 더 이상 이런 금관이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가야 같은 지역에서도 금관 혹은 금동관이 발견되지만 완성도 면에서 볼 때 이 금관들을 따라오기는 힘들다.

금관은 외관과 내관으로 되어 있는데 그 자세한 양식은 복잡하니 생략하고 큰 줄기만 보기로 하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외관인데, 외관의 정면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대로 나무 가지처럼 생긴 것이 있다. 이것을 출(出)자형 장식이라고도 하는데 이 나무 가지는 3단 혹은 4단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옆면은 사슴의 뿔처럼 생긴 것으로 장식해 놓았다. 이 장식들 위에는 굽은 옥이나 둥근 금딱지를 붙여 놓았다. 아울러 둥근 머리띠 양쪽에는 금으로 만든 사슬 두 개가 달려 있다. 이 금관들이 그 화려함의 정도는 각각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 모습은 대체로 이와 같다. 그리고 이 외관 안에는 세모꼴로 된 모자가 있고 두 갈래로 되어 있는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을 꼽기도 한다. 이것이 내관이다. 이 정도면 대강 금관 모양이 그려진다

문제는 이 양식의 기원이다. 도대체 이렇게 독특한 양식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주류 의견은 이 금관이 시베리아 샤먼들의 관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왕관에 있는 장식들을 든다. 우선 앞부분에 있는 나무 장식은 인간계와 신계를 연결하는 신목을 본뜬 것이라는 것이다. 이 나무의 가지는 3단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되면 가지가 7개가 된다. 이것은 당시 샤먼들이 생각하는 7층의 하늘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왕관 옆 부분에 있는 장식은 사슴뿔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사슴 역시 하늘과 지상을 왕래할 수 있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 유명한 루돌프를 생각하면 되겠다. 루돌프도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산타의 썰매를 끌지 않았는가? 증거는 또 있다. 내관에 있는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이 그것이다. 새 역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이다. 옛 기록을 보면 장례를 할 때 큰 새의 깃털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깃털이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준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의견에 반박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의 주된 주장은 왜 엄연한 국가의 수장인 신라왕이 아직 유목 사회에 머물러 있는 시베리아 무당의 관을 쓰느냐는 것이다. 아울러 시대적으로도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왕 비교하려면 같은 시대 것으로 해야지 왜 5~6 세기의 신라 왕관과 18~19세기의 시베리아 샤먼의 관을 비교하느냐는 것이다.

그럼 이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왕관의 장식들을 어떻게 해석할까? 우선 나무 장식은 시베리아의 신목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조인 김알지가 내려온 나무의 가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같은 맥락에서 보면 관의 옆에 있는 장식도 사슴 뿔이 아니라 나무가지가 된다. 그리고 금관에 붙어 있는 동그란 딱지들은 나뭇잎을 이미지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주장은 공연히 시베리아로 가지 말고 신라 안에서 해석하자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설 가운데 아직 어떤 설이 맞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대세는 전자의 설에 기울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금관을 둘러싸고 양분되는 설이 또 하나 있다. 금관을 실제로 썼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 사용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단지 무덤의 부장품으로만 썼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우선 금관에 걸려 있는 옥이나 금딱지가 무거워 왕관이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른 게 금인데 그것으로 만든 얇은 금판이 버티기에는 너무 무겁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을 직접 썼다면 머리가 닿는 부분에 비단이나 가죽 같은 것을 댄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근거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학자들은 왕들이 이 금관을 항상 썼던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 금관에는 특수한 공법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바로 서는 데에 문제가 없다고 한다. 금관에 있는 금판의 가장자리를 보면 작은 홈이 촘촘하게 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금판이 힘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기술이라고 한다. 그 홈이 금판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꽤 세련된 기술이라고 한다. 어떻든 화려한 외관에 내관까지 쓰고 나면 그 모습은 대단히 장엄할 것이다. 여기에 금제 허리띠까지 하면 왕으로서의 권위가 제대로 설 것이다. 따라서 이 금관을 쓰고 바쁘게 돌아다니지는 않았을지라도 국왕의 권위를 크게 떨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관을 썼을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의견이다.

어떤 의견이 맞던 신라 금관이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왕관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 금관을 버리고 7세기 이후에 한국 왕들은 중국식 면류관을 쓰게 되는데 이 면류관보다 우리의 금관이 미적으로나 디자인적으로 월등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정부는 하루빨리 "국립금세공전문박물관"을 건립하여 우리나라 모든 금관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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