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선 - 세계 최초의 철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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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 세계 최초의 철갑선
  • 이창희
  • 승인 2012.06.15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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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거북선은 '인파이터' 역할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위 문구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개전 이듬해인 1593년 조정에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 장계에서 자신 있게 언급했듯이 거북선과 판옥선은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 중 하나였다.

거북선은 지붕 혹은 덮개 역할을 하는 개판이 갑판의 윗부분을 덮고 있는 특수한 구조를 가진 군함이다. 그 덕택에 갑판에 근무하는 승조원들과 전투요원들이 적의 공격에 직접 노출되지 않고 내부에서 안전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일본군들은 해전에서도 적의 배로 뛰어들어 칼과 창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을 선호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왜군들이 조선의 배로 뛰어들어 단병접전을 시도하지 못하게 막고, 조선의 장기인 활쏘기와 화약무기 사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었다. 그 같은 필요에 따라 기본 갑판 위에 갑판을 한 층 더 높인 군함이 판옥선이고, 갑판 위에 아예 덮개를 씌운 군함이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두꺼운 개판과 개판 위에 설치한 뾰족한 철침으로 적이 뛰어드는 것을 원천봉쇄할 수 있고, 적의 화살 공격은 물론이고 조총 사격도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이었던 판옥선은 1층 갑판에 있는 인원들만 보호할 수 있고 2층 상장갑판의 전투요원은 노출된 공간에서 전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북선은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실내에 보호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재질이 단단한 나무를 두껍게 사용해 배를 만드는 한선의 DNA를 그대로 계승한 군함이었다.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는 거북선의 외판 두께가 4치(약 12~13cm)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연구자들이 구경 9mm급 조총의 관통력을 시험한 결과를 보면 30m에서 두께 4.8cm의 전나무 판자를 관통했지만, 거리 50m에서는 두께 4.8cm의 전나무 판자를 관통하지 못했다. 조선 시대 군함은 전나무보다 더 단단한 소나무를 써서 주로 만들었다. 결국 조총으로 50m 이상 거리에서 두께 12~13cm의 거북선 외판을 관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군함에서 방패판 등 강도가 필요한 부분은 소나무보다 더 단단한 참나무를 이용했으므로 주요 부위의 방호력은 더욱 강력했을 개연성이 높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걸쳐 우리나라에서 널리 사용한 조총은 구경 13~16mm급이 많았는데, 김육(1580~1658)은 [잠곡유고]에서 “대포는 비록 3척(약 90cm) 두께의 방패라도 쉽게 뚫으나 (조총의) 철환은 1촌(약 3cm)도 뚫지 못한다”고 기록한 것도 참조가 된다.

물론 일본에서 구경 9mm급 이상의 조총도 널리 사용했지만 위와 같은 여러 기록을 본다면 어지간한 조총으로는 50m 이상 거리에서 거북선의 외판을 관통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이기도 했던 H. H.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도 1933년 영국왕립아시아학회 조선분과지에 발표한 그의 논문(Korea Boats and ships)에서 “거북선 개판의 두꺼운 나무판자만으로도 충분히 일본군의 조총 사격은 막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거북선은 판옥선과 달리 갑판 윗부분까지 완전히 덮개를 씌우고 있었으므로 방호력 측면에서 훨씬 강력했다. 덮개를 씌웠을 때의 또 다른 장점은 적이 아군의 움직임을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적이 아군에게 조준 사격을 하려 해도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순신은 조정에 승전 보고를 올리면서 이 같은 거북선의 특성에 대해 강조한다.

“이순신이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이런 방호력을 바탕으로 거북선은 최선봉에서 돌격선 역할을 수행했다. 거북선이 최초로 출전한 전투로 알려져 있는 사천해전의 상황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이순신 장군은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적선이 있는 곳으로 돌진케 하여 먼저 천자, 지자, 현자, 황자 등 여러 종류의 총통을 쏘게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970년대 제작한 민족기록화 시리즈 중 한산해전도. 거북선이 가장 앞서 적선에 돌격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에 5월 벌어진 1차 당포해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층루선 밑을 치고 들어가 용의 입으로 현자철환을 치쏘게 하고 또 천자, 지자 철환과 대장군전을 쏘아 그 배를 깨뜨리자, 뒤따르고 있던 여러 전선들도 철환과 화살을 교대로 쏘았다.”

마치 인파이터 스타일을 구사하는 권투선수처럼 거북선이 적의 기함 역할을 했던 층루선에 바짝 붙어 함포를 대량 발사했다는 이야기다. 거북선이 이처럼 초근거리로 접근해서 전투를 했다는 목격담은 일본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측 기록인 [고려선전기]는 1592년 7월10일 벌어진 안골포해전에서 거북선이 일본 배에 3~5칸(5.4~9m)까지 접근한 상태에서 총통으로 대형 화살형 발사체를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큰 배 중에 3척은 메꾸라 부네(장님배)인데, 철로 요해하고 있었다. 석화시·봉화시·안고식 화살촉 등을 쏘며 오후 6시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공격을 걸어와 망루로부터 복도, 방패까지 모조리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6촌에 달하는 견고한 나무기둥이며,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든든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화살로 5칸, 혹은 3칸 이내까지 접근해서 쏘았다.”

조선 수군은 어느 정도 적선과 떨어진 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승부는 가르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대포를 쏘아 적함을 맞추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해상에서 사거리가 100미터가 넘는 경우 명중 정확도에 한계가 있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쓰인 배가 거북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은 판옥선보다 강한 방호력을 바탕으로 적선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코앞에서 명중탄을 날려 보낼 능력이 있었다. 최선봉에서 인파이터처럼 돌격하는 거북선은 그 후방의 판옥선이 적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됐고, 적의 전투대형을 직접적으로 교란하는데도 그만이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가장 훌륭한 전투 파트너였던 셈이다.

이처럼 거북선이 탁월한 배라면 거북선의 모든 것에 대해 명쾌한 결론이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당장 거북선의 발명자를 놓고서도 다양한 견해가 있다. [태종실록]에는 1413년(태종 13년)에 한강에서 거북선과 가상 왜선이 해전 시범을 보였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2년 뒤인 1415년에도 ‘거북선이 수많은 적에 충돌해도 적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설명도 나온다.

하지만 태종대 이후 이순신 장군이 다시 거북선을 만들기까지 200여 년 동안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각종 함선의 보유량을 규정한 경국대전에도 거북선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당시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거북선의 발명자가 이순신 휘하의 군관이었던 나대용(1556 ~ 1612)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제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 기술자는 아니었으므로 임진왜란 이후에도 해골선 등 여러 가지 새로운 군함을 만든 나대용이 실질적 발명자라는 주장이다. 최근에는 거북선의 발명자가 이덕홍(1541 ~ 1596)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거북선 그림과 구조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이덕홍의 문집 [간재집]과 “이덕홍이 전쟁 직전에 류성룡에게 거북선 구상을 전달했고, 류성룡이 이를 다시 이순신에게 전달했다”는 안동 지역의 전설을 근거로 든다.

1970년에 완성한 아산 현충사 ‘십경도’ 중 거북선 제작 장면. 당시만 해도 거북선 연구가 부족해 노 구멍이 서양식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모두 사료적 근거가 불투명한 개인 문집이나 지방지, 전설에 근거하고 있는 주장이어서 신뢰도에 한계가 있다.

이순신의 장계나 조선후기의 모든 공식 기록에서 거북선을 이순신이 창제했다고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회에서 거북선이라는 법 규정 외의 새로운 군함을 만드는 것은 지휘관의 결단이 필요한 일인데, 그 같은 결단을 내린 사람은 결국 이순신 장군이란 점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개전 초반 이순신 장군이 보유했던 거북선은 3척이었다. 임진왜란 중 중국에 보낸 외교문서를 모아둔 [사대문궤]에는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5척으로 기록되어 있어 2척을 추가로 건조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최대 7~8척의 거북선을 보유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한동안 이 숫자가 유지되다가 1746년 편찬된 [속대전]에는 거북선 보유량이 14척,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에는 40척으로 늘어났다. 1808년에 편찬한 [만기요람]은 30척, 1817년에 편찬된 수군의 함선 목록인 [선안]에는 18척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 같은 거북선 숫자는 주력 군함인 판옥선의 보유량에 비하면 매우 적은 것이다. 1746년을 기준으로 거북선 보유량은 14척으로 판옥선 보유량은 117척에 비해 8분의 1에 불과했다. 기록상 가장 많은 거북선이 등장하는 1770년을 기준으로 따져도 판옥선 보유량은 83척으로 거북선 40척의 2배가 넘었다. 보유 척수로 보자면 판옥선이 조선 수군의 주력이고, 거북선은 돌격선이라는 특수한 역할을 맡은 군함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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