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희소성의 원칙'에서 벗어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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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희소성의 원칙'에서 벗어날 때
  • 최재성
  • 승인 2012.06.2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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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칼럼] 최재성 / 인천녹색소비자연대 이사


대학에서 쓰는 경제학원론 교과서 첫 머리에 '희소성의 원칙'이 있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데 그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자원은 유한(희소)하다'는 내용이다. 이 희소성의 원칙이 우리가 배우는 주류경제학의 전제다. 무한한 인간의 욕망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효율적 자원배분'이 경제학의 목표다.

자원을 배분하는 여러 가지 방식 중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제도는 '시장'이다. 국가가 계획하거나 예측하지 않아도, 지시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인간의 욕망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곳으로 알아서 자원이 배분되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인 쌀과 기름과 고무와 전기 등이 소비자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식당으로, 소비자가 선택하는 신발회사로 알아서 배분되는 것이다.

이러한 희소성의 원칙에 의해 운영되는 시장경제는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와 삶의 편리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풍요와 편리가 바로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소외, 환경파괴, 국가 안팎의 양극화와 대규모 전쟁 등이 그 부산물로 따라 붙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끝없는 경쟁 속에서 긴장과 상대적 패배감, 박탈감, 자기비하일 것이다.

기업이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가급적 희소성이 있는 상품을 만들어 팔아야 한다. 그런데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 팔다 보면, 어느새 희소성은 사라진다. 그러면 기업은 희소성을 가진 또 다른 상품을 만들어 팔게 된다. 1970년대 부자집에만 있던 전화기와 텔레비전을 이제 노숙자도 들고 다니는 세상이 되고, 부유함의 상징이었던 자동차가 집집마다 있는 현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중세시대라면 귀족들이나 가질 수 있는 물건들이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제일 아래 계층 사람에게까지 흘러 내려오는 것은 어찌 보면 자본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바로 이 장점의 이면에 우리가 시시때때로 느끼는 열등감과 빈곤감이 자리잡고 있다.

'희소성의 원칙'에 근거하는 한 우리는 가져도 만족을 모른다.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남보다 더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가져도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희소성의 원칙'은 타당한가? 우리 인간을 무한정한 욕망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는 것에 의심의 여지는 없을까? 인간의 욕망이 무한한 것인지 유한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인간의 '필요'가 유한하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또한 욕망을 모두 만족시키기에는 자원이 턱없이 모자라지만,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자원은 아직 충분하다. 우리가 사는 지구 위에서 1/3의 사람들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지만, 지구상 식량의 총량은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는 수준이다.

'희소성의 원칙'이 가지는 또 다른 문제는 '희소성'이 항상 부자들의 편이라는 것이다. 한정된 재화는 그 재화가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안고 질주해야 하나? 현재의 풍요와 편리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떠나서 소비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하고, 소비를 통해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정되는 세상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다.

이제 지긋지긋한 '희소성의 원칙'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지구를 사랑하고, 환경을 생각하고, 먼 나라와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웃을 생각하며 서로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자는 이야기가 낯설고 멀게만 느껴진다면 그냥 나 자신의 행복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희소성의 원칙'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사회의 모든 체제와 인간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중요한 변화는 변화를 원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장자가 말했다.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요 물위지이연(物謂之而然)이라고. (길은 사람들이 걸어 다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된 것이다.)

남이 사니까 나도 사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사고, 자극적인 광고나 상술에 넘어가 나도 모르게 사는 소비행태를 벗어나 필요한 만큼 소비하며, 이웃과 함께 나누고, 환경을 생각하는 생활이 점점 확산된다면 20-30년 후 경제학 교과서는 인간과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기록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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