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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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문대'
  • 이창희
  • 승인 2012.07.12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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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화병 모양을 본뜬 첨성대의 美

경주 첨성대는 세계문화유산이다. 첨성대는  천문학을 관찰하던 장소로서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다.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국가의 큰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는 첨성대 건립의 좋은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첨성대는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국보 제31호이다. 첨성대는 1350년이 지나고도 옛날의 그 모습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자랑스런 과학 유산이다. 첨성대의 건립은 신라의 천문학 발전을 상징한다.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신라의 천문학을 관장하는 국가 천문기관의 중심적 시설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터이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360여 개의 돌을 정성들여 쌓아 만든 첨성대는 높이가 9미터 정도로 병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 갈수록 가늘어지는 원통형 또는 병 모양을 하고 있는 첨성대는 잘 살펴보면 위에 4각형 돌이 놓여 있고 아래 부분도 4각형 돌 단이 있다.

또 그 한가운데에 남쪽을 향한 창이 하나 있는데, 그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각기 1미터쯤이다. 창 아래와 위를 모두 12단씩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창은 3단에 걸쳐 있으니까 첨성대는 모두 276단의 돌을 쌓아 만든 셈이다. 첨성대는 옛날 별의 운행을 비롯하여 일식, 월식 등 천문을 관찰한 외에도 길흉을 점쳤다고 하는데, 농사일에도 도움을 준 흔적이 보인다고 하였다.

첨성대는 천체의 움직임과 하늘의 변화를 관측하고 별자리를 관찰하던 천문 관측대이다. 첨성대는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위에 술병모양의 원통부가 올려지고 맨 위에 정자형의 정상부가 얹혀진 모습이다. 남동쪽으로 난 창을 중심으로 아래쪽은 막돌로 채워져 있고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사람이 가운데로 해서 올라가게 되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바깥쪽에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는 도자기 모양이며, 바깥 벽면은 돌로 쌓아올려 성벽을 떠올리게 한다. 곡선과 직선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첨성대 돌의 총 개수가 365개인 것, 돌을 쌓은 단수가 27단인 것 등을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고 볼 수 있다. 6.25 당시 탱크가 경주 시가지를 지날 때 허술한 초가들이 탱크의 진동에 여지없이 무너질 때도 첨성대만은 끄떡 없었다고 한다. 첨성대는 천문대로 그 가치가 높으며, 당시의 높은 과학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첨성대가 제단이었다는 학설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한 사내아이가 집을 나와 헤매다가 첨성대의 신비한 빛 속으로 빨려들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지대석과 기단은 4각형으로 8석과 12석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27단의 아래가 넓은 원통형 주체부가 있다. 여기에 쓰인 돌은 362개이고, 1단의 높이는 약 30㎝이다. 제13단에서 제15단에 걸쳐 남쪽으로 면한 곳에 조그마한 출입구가 나 있는데, 그 아랫부분 양쪽에 사다리를 걸었으리라고 추정되는 흔적이 있다.

내부는 제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제19, 20단과 제25, 26단 두 곳에 정자형으로 길고 큰 돌이 걸쳐져 있다. 그 양쪽 끝이 바깥으로 내밀고 있으며, 꼭대기에도 정자석 2단이 놓여 있다. 제27단 내부의 반원에는 판석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판목을 놓았을 것으로 보이는 자리가 있다.

꼭대기 정자석 위에도 관측에 필요한 어떤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동북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으나 석조부분만은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데, 매우 희귀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첨성대 건립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선덕왕 지기삼사」조에 「별기운시왕대연석축첨성대」라고만 나와 있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선덕왕 재위 시(632~646)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 첨성대가 과연 천문대였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와다'였다.

그는 1910년〈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혼천의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1917년 〈조선고대관측기록 조사보고〉에서 같은 내용을 주장했다. 우리나라 학자인 홍이섭도 〈조선과학사〉에서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는 현존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문대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또한 첨성대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한 홍사준은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 내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첨성대가 개천설에 의거하여 백제인이 세운 신라 천문대라고 보았다. 박동현 교수도 첨성대가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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