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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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궐'
  • 이창희
  • 승인 2012.07.24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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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수풍물] 창덕궁은 왜 세계문화유산일까?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이며, 세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다는 프랑스 미슐랭가이드 잡지사에서도 한국 최고 명소라고 평가한 곳이다. 어떤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는 한국에 오면 반드시 창덕궁에 가는데, 그 이유는 창덕궁에 가야 한국을 흠씬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덕궁은 어떤 면에서 한국적이라는 것일까? 그것은 창덕궁이 동북아시아의 궁궐 가운데 보기 드물게 친자연적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창덕궁은 한국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보통 궁궐은 장엄하게 짓기 위해 평평한 땅에 대칭으로 짓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자금성 같은 중국 궁궐이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식으로 지은 궁궐이 있다.그곳이  경복궁이다. 그러나 경복궁도 전적으로 중국식은 아니다. 서울의 정 중앙이 아니라 서북쪽에 산을 기대어 지은 점이 그렇다.

그러나 평평한 땅에 대칭으로 지은 점은 중국의 법도를 따랐다. 그런데 조선 사람들은 경복궁만 중국식을 따르고 두 번째 궁인 창덕궁부터는 조선식대로 지었다. 옛 한국인들은 건축을 할 때 자연을 가능한 한 변형시키지 않고 그 안에 건물을 살짝 '얹혀 놓는' 것처럼 짓는 것을 좋아했다.

부석사를 본 어떤 서양 건축가는 "절 건물이 마치 자연 안에 안긴 것 같다"고 하면서 자연을 운용하는 한국인들의 능력을 찬탄했다. 창덕궁은 바로 이런 생각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그 한국적인 가치가 인정되어 1997년에 세계유산에 지정되었다. 한국의 궁궐 가운데 세계유산이 된 것은 창덕궁이 유일하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차이는 창덕궁은 경복궁 다음에 위치하는 궁이기 때문에 이궁(離宮) 혹은 별궁이라고 불렀다. 혹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고도 했다. 재미있는 점은 경복궁은 정도전을 위시한 신하들이 설계했다면, 창덕궁은 왕(태종)의 의도에 따라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복궁은 임금이 효율적으로 일하기에만 편하게 설계되었다. 왕의 처소인 강녕전 바로 앞에 국무회의실인 사정전이 있고 그 앞에는 근정전이 있다. 이것은 일하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살기에는 아주 답답한 구조이다. 마음 놓고 쉴 데가 없다. 흡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좁은 지역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만 해야만 한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왕 가운데 세종을 빼고는 모두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경복궁과 다르게 창덕궁은 왕이 쉴 수 있는 정원 영역을 많이 만들었다. 또한 창덕궁은 왕의 근무 공간인 외전(인정전이나 선정전 등이 있는 지역)을 왼쪽 밑으로 몰아놓고 왕이 쉴 수 있는 정원 영역(후원)을 아주 넓게 만들었다. 창덕궁은 태종이 1405년부터 건축을 시작했는데, 1412년에 정문인 돈화문을 지으면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조선에서 가장 강한 왕이었던 세조는 후원을 2배 넘게 확장했다. 역시 강한 군주답게 자신이 쉬는 공간을 크게 만든 것이다. 그러다 임란 때 다 탄 뒤 선조가 1607년에 다시 짓기 시작했다.

건설이 끝난 1610년부터 창덕궁은 정궁으로 되었다. 원래는 경복궁을 복원했어야 하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왕자의 난 등의 이유를 들어 불길하다고 창덕궁을 먼저 복원했다. 이렇게 복원된 창덕궁은 인조반정(1623) 때 또 대부분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20여 년 뒤에 또 복원되었다. 그 뒤로 창덕궁은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정궁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창덕궁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산세에 의지해 지은 궁궐이다. 창덕궁은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북악산) 자락에 있는 매봉(혹은 응봉)을 주산으로 건설되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이런 산기슭에 마을 만들기를 좋아했다. 창덕궁도 이런 원리를 따른 것 같다. 한국 건축은 이런 원리로 지었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반드시 멀리서 산과 중첩된 건물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래서 창덕궁의 경우 정문인 돈화문에서 한참 앞으로 나와서 봐야 한다. 이런 원리로 지은 건축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을 들어가 보면 정문의 위치부터가 파격적이다. 궁의 왼쪽 구석에 있기 때문이다. 규범을 중시하는 궁궐 건축에 입구를 이렇게 만든 것은 격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성정이 반영된 것 같다.

그런데 문 안으로 들어가면 구석이라는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그러나 주 건물인 인정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인정전은 그림에서처럼 두 번 꺾어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파격적이다. 한국 건축에서는 가장 중요한 건물을 한 번에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감춰놓았다가 보여주는 일이 종종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부석사다. 주 건물인 무량수전은 앞마당에 이르기까지 그 전체 모습을 결코 볼 수 없다.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부터 정전인 인정전까지 두 번 꺾여야 한다. 창덕궁은 건물을 자연지형에 맞추어 짓다 보니 대칭적으로 지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비대칭적인지 우선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의 앞마당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곳은 얼마든지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사다리꼴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주변 지형에 맞추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는 창덕궁에 경복궁처럼 중심을 관통하는 축이 없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아니 없다고 하기보다는 3개씩이나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우선 정문인 돈화문이 한 축을 이루고 있고 그 다음에는 주건물인 인정전이, 또 다음에는 편전, 즉 국무회의 장소로 쓰이는 선정전이 각각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다양성이 엿보이는데, 그 다양함은 다시 일정한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다. 그저 하나의 축으로만 되어 있다면 단순해서 재미 없을 것이고 무질서하게 여러 축으로 되어 있으면 규범이 없어 보인다. 창덕궁은 이런 것을 다 피해서 규범과 자연스러움을 동시에 추구한 것이라고 한다.

창덕궁의 '트레이드 마크'는 아무래도 후원이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에서 금원(禁苑) 혹은 비원 등으로 불렸다. 여기에는 지형에 따라 연못을 만들고 다양한 집을 지었다. 이 가운데 으뜸은 물론 부용지이다. 부용지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애련지가 나온다. 애련지 위쪽에는 순조가 사대부들이 사는 집이 궁금해 짓게 했다는 연경당이 나온다. 연경당 오른쪽 옆에는 돌로 계단처럼 쌓아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사대부 집안에서 정원을 조경하는 양식이라고 한다.

다시 더 뒤쪽으로 가면 정자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연경당에 소속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정자들은 아주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부채꼴 모양을 한 관람정도 있고 지붕이 육각으로 된 존덕정도 있다. 이곳을 걷다 보면 내가 시내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숲이 울창하고 한적하다.

관람전 연못(왼쪽)과 옥류천(오른쪽)의 모습. 후원 영역의 울창함 숲과 연못, 그리고 정자의 조화가 아름답다. 후원의 마지막은 아무래도 옥류천 영역이다. 이곳에는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임금과 신하가 술잔을 띄우고 놀았다는 소요암과 정자가 있다. 어떻게 술잔을 띄우고 놀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 역시 아름다워서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여기에는 궁궐 정자 중 유일하게 지붕이 짚으로 된 청의정이 있다. 임금이 이곳에서 농민들의 모범이 되고자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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